‘모성’이라는 틀, 죄책감 갖게 해
“도움 없이 일·가정 양립 어려워”
본능 이유로 모성애 강요 말아야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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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2020년 39세가 된 <82년생 김지영>의 김지영은 30대에 아이를 낳아 육아를 시작하게 됐다.

김지영은 국문학을 전공하고 홍보회사에 다니며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출산·육아 등의 문제로 기획부서 발령에서 남자 직원에게 밀려났다. 이후 김지영은 회사를 그만두고 육아와 가사노동을 전담하게 된다.

영화 속 김지영의 남편 정대현은 김지영의 육아를 최대한 도우려고 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런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본 뒤 많은 이들이 영화를 본 뒤 ‘저 만큼만 도와주면 더 바랄 게 없겠다’는 감상평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김지영은 ‘많이 도와주는’ 정대현의 모습에도 육아와 ‘맘충’이라며 조롱하는 주변의 시선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 때문인지 김지영에게는 친정어머니가 빙의해 사돈(김지영의 시어머니)은 물론 사위(정대현), 가족들에게 마음속에 있던 말을 한다.

김지영이 육아를 하면서 받는 스트레스와 그로 인한 모습은 많은 여성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김지영이 겪는 많은 일들 중 대부분은 ‘엄마’이기에 겪게 된 일이었다. 여성들이 김지영의 이야기에 공감을 했다는 건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엄마에게 요구하는 기준을 채우기 힘들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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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주는’ 남편

실제 아이가 있는 30대 워킹맘은 어떻게 육아와 일을 병행하고 있을까.

30대 중반의 프리랜서 아나운서 김아진씨는 8세 아들과 5세 딸을 키우고 있는 워킹맘이다.

20대 후반에 결혼한 김씨는 결혼 전 부산에서 정규직 아나운서로 일했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서 경기도 수원으로 거처를 옮기게 돼 프리랜서로 전환했다.

“가사나 육아 문제가 아니라 제가 원해서 프리랜서로 전환했어요. 회사에서는 ‘주말부부 생활이 가능하다면 계속 일해도 좋겠다’고 했지만, 정규직으로 전환되면서 반복되는 일상에 젖어드는 것 같아 싫기도 했어요. 그래서 결혼이 프리랜서로 전환하는 좋은 계기가 됐어요. 안정적인 것 보다는 불안정하더라도 여러 경험을 해보고 싶었어요.”

프리랜서 아나운서로 전환을 하면서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아진 김씨는 직장에 다니는 남편보다 육아와 가사노동을 더 많이 감당하고 있다.

“출산 전에는 5:5 정도로 가사노동을 분담했어요. 출산 후에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비교적 시간이 많고, 육아도 주로 담당하게 되다보니 자연스럽게 더 많이 하고 있어요.”

김씨는 그럼에도 프리랜서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육아나 가사노동을 전담하고 있지는 않다.

“남편이 많이 도와주는 편이에요. 도와주지 않으면 일을 병행할 수가 없어요. 또 최근에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로 가정보육기간이 굉장히 늘어났잖아요. 그래서 더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남편은 업무시간이 정해져 있다 보니 평일에는 많이 못 하지만, 주말에는 거의 전담해서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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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단절’ 피하려면 주변 도움은 필수

김씨는 출산 이후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도움을 받지 않고는 일·가정 양립은 어렵다”고 말한다.

“일·가정 양립을 위한 노력은 지금도 진행형이에요. 고학력 여성들도 많고 경제활동(수입이 있는 노동)을 하는 엄마들이 많아요. 육아와 일을 병행하려면 육아에 도움을 받아야 해요. 친정부모나 시부모가 멀리 살면 이마저도 어렵죠.”

다행인지 불행인지 코로나19로 인해 대학원 수업이 온라인으로 진행돼 아이를 돌보면서 공부를 할 수 있는 상황이 되긴 했지만, 김씨는 “좋게 생각하면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는 상황이고, 반대로 생각하면 일만 하거나 아이만 돌보던 상황보다 일이 가중됐다”고 했다.

“아이가 고학년쯤 되면 몰라도, 엄마가 일을 하는 동안 가만히 있지 않잖아요. ‘돌밥돌밥’이라는 말처럼 돌아서면 밥 차리고 또 돌아서면 밥 차리는 상황이 반복돼요. 집안일 하면서 아이를 돌보고 업무도 한다는 게 쉽지는 않아요.”

김씨는 이 같은 이유로 많은 엄마들이 경력단절을 겪는다고 말했다.

“아이가 학교나 유치원에 갔다가 빠르면 오후 두시, 보통 네시쯤 하원하는데, 직장에 다니면서 이 시간에 맞춰 아이들을 데리러 가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잖아요. 부모님이나 친척이 가까이 살면 대신 아이를 데려와서 간식을 챙겨주거나 학원으로 보낼 수 있을 텐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엄마들이 많아요.”

다행히 출산 후에도 일을 이어갈 수 있는 김씨는 출산 전과 출산 후 가치관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친구나 후배들에게 ‘여자는 결혼이 아니라 출산에 따라 가치관이 달라지는 것 같다’는 말을 자주 해요. 전에는 제 꿈이나 원하는 목표에 집중을 했다면, 지금은 아이들이 저를 보고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가 됐어요. 아이들을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좋은 본이 되고 싶다는 거죠. 그러려면 그만큼 제 삶에 충실해야 할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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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적 아버지…육아·가사는 엄마 몫

어릴 적 김씨의 가정은 당시 사회분위기상 ‘평범한’ 가정이었다. 아버지가 돈을 벌어오고 어머니는 가사노동을 전담하면서도 일을 하셨다.

“어머니께서는 1960년생이시고, 24살에 결혼을 하셨어요. 저는 외동인데, 다행히 할머니께서 가까이 살게 되셔서 저를 돌봐주신 덕분에 일을 계속 하시게 됐어요.”

김씨의 어머니는 시부모의 도움으로 일은 꾸준히 할 수 있게 됐지만 여전히 가사노동을 전담했다.

“아버지는 가부장적인 분이고 무뚝뚝한 분이셨어요.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인식을 갖고 계셨죠. 지금까지도 그런 모습을 보이시고요. 가사노동은 어머니의 몫이었어요.”

김씨가 장성한 이후에도 어머니는 김씨를 지극히 돌봤다. 때문에 김씨는 어머니가 보여준 모습들이 자신의 삶에 많은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지나고 보니 어머니는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주셨던 거 같아요. 특별히 생각나는 건, 제가 결혼 전까지 아침 생방송을 진행했는데 매일 아침마다 새 밥을 해서 챙겨주셨어요. 어쩌다 아침에 밥을 못해주시면 미안해 하셨고요. 그 밖에도 여러 순간을 생각해보면 항상 헌신적이셨어요. 그 당시엔 ‘나는 엄마처럼 저렇게까지 희생하진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아이를 낳고 보니 저도 아이들에게 똑같이 하고 있더라고요. 어머니께서 보여주신 모습들이 지나고 보니 많은 도움이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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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애 인식 변화하고 있어”

어머니의 희생과 헌신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 김씨지만, 엄마의 희생이 본능적 ‘모성’이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모성애에 대한 ‘희생’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것 같아요. ‘아이를 위해 감수해야 해’라는 인식이 있는 거죠. ‘엄마는 이런 모성을 가져야 해’라며 기준에 맞지 않으면 이상한 엄마인 것처럼 말을 하기도 하잖아요. 맘카페 같은 곳에는 ‘저는 모성애가 없나 봐요’라는 글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사회에서 만들어놓은 ‘모성’이라는 틀에 갇혀서 죄책감을 갖게 되는 거죠.”

그럼에도 김씨는 이 같은 통념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고 말했다. 자녀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엄마가 가진 본능적 모성애라는 인식이 세대를 지나면서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본능적인 부분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본능에 너무 치우쳐서 모성애를 강요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주위에서도 그런 변화를 자주 볼 수 있고요. 저보다 몇 년 더 육아를 경험한 분들의 말도 듣고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보면 ‘완벽한 엄마’ 역할을 조금 내려놓으면 일과 육아를 다 즐겁게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엄마들 스스로도 그런 틀에서 벗어나는 게 필요하다고 봐요.”

김씨는 스스로를 사회통념적인 어머니상에서 벗어난 엄마라고 평했다.

“저는 통념적인 어머니상(像)에서 조금 벗어난 것 같은데, 저는 둘째가 15개월쯤 됐을 때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전통적인 어머니상에 대한 인식을 갖고 계셨던 아버지께서는 ‘아이가 이제 갓 돌 지났는데 공부를 하려고 한다’면서 부정적으로 보셨어요. 주변에서도 육아와 공부, 일을 병행하는 걸 보고 ‘어떻게 아이를 두고 갈 수가 있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 같고요. 그런 면에서는 사회가 요구하는 모성에서 벗어난 엄마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프리랜서 아나운서 김아진씨가 자녀들과 함께 찍은 사진. 사진제공 = 김아진씨
프리랜서 아나운서 김아진씨가 자녀들과 함께 찍은 사진. <사진제공 = 김아진씨>

통념적 모성과 현실의 괴리

<여성조선>이 지난해 4월 6일부터 같은 달 15일까지 기혼여성 5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 92%가 <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이 겪은 일에 공감한 부분이 있다고 답했다.

또 응답자 가운데 85%는 ‘주부로 살기 힘들다’고 답했으며,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힘들다’는 응답은 40%로 나타났다.

응답자들은 가장 필요한 변화로 ‘남편의 태도’(36%)를 꼽았으며, ‘육아·가사노동에 대한 인정’(24%), ‘기혼여성에 대한 직장의 배려’(14%), ‘주부를 보는 부정적 시선’(13%), ‘양육수당·육아휴직 등 정책’(6%)이 뒤를 이었다.

자녀가 결혼할 때쯤 가장 달라지길 바라는 것을 묻는 질문에서는 ‘출산 후 아이 걱정 없이 일할 수 있는 환경’(45%), ‘가사노동을 가족이 함께하는 분위기’(30%), ‘주부에 대한 부정적 인식’(15%), ‘기혼여성에 대한 직장의 배려’(5%), ‘정부정책의 변화’(5%)순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조사 결과를 보면 남편들은 여전히 가사·육아를 ‘돕는다’는 인식을 갖고 있으며, 가사노동의 가치를 ‘바깥 일’보다 낮게 여기는 것으로 보인다.

김씨는 남편과의 가사·육아 분담을 말하면서 ‘남편이 도와준다’고 말했다. 전통적 통념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진 김씨도 사회적 인식 속에서 남편이 ‘돕는다’고 인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김씨가 말했듯 이 같은 모습은 모성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는 과정이다. 사회적 통념 속에서 교육을 받아 온 남편들은 필연적으로 육아와 가사노동이 여성의 몫이라는 인식을 갖고 살아간다. 다만 ‘도와주는’ 남편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함께하는’ 것이 당연해지는 사회가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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