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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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최근 임신 14주 이내에 대해 조건 없이 임신중지(낙태)를 허용하고 24주 이내에 대해서는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내용의 낙태죄 개정안이 입법예고 되자 온라인상에서 스텔싱(stealthing)을 하겠다는 글이 다수 올라와 법적 제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스텔싱이란 전투기가 레이더에 탐지되지 않도록 하는 군사기술인 스텔스(stealth)에 빗댄 말로, 남성들이 성관계 시 상대방인 여성에게 들키지 않도록 몰래 콘돔을 빼거나 콘돔에 구멍을 뚫는 등 상대방의 동의 없는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온라인 상의 ‘스텔싱 선언’은 정부의 개정안 입법예고 후 뿐만 아니라 지난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뒤에도 있었습니다.

남성들은 “(낙태죄 개정으로) 임신중지가 허용되니 콘돔에 구멍을 뚫어 임신을 시키겠다”거나 “콘돔 안 써도 되겠다”는 등의 발언을 하기도 합니다.

콘돔 사용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는 남성들은 성관계 시 콘돔 사용을 거절하거나 몰래 콘돔을 빼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은 콘돔을 사용하면 성감(性感)이 떨어진다거나 남성중심적이고 왜곡된 시각으로 만들어진 포르노 또는 불법촬영물을 통해 학습한 성적 판타지 등을 이유로 콘돔 사용을 거부하거나 스텔싱을 합니다.

심지어는 결혼을 거절하는 여성을 임신시켜 결혼을 강제하거나 여성을 협박하려는 의도를 갖고 스텔싱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콘돔은 피임 외에 성병 예방에도 중요한 도구입니다. 성기의 직접적인 접촉을 막아 성병이 전염되는 것을 막는 것이죠.

콘돔 사용을 거부한 채 성관계를 맺거나 스텔싱을 하는 남성들은 만족할만한 성감을 얻거나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를 경험한 여성들은 계획되지 않은, 원치 않은 임신과 성병 감염에 대한 걱정을 떠안게 됩니다.

실제 임신으로 이어져 출산을 해야 한다면 학업이나 직장, 가족관계 등 많은 부분에서 포기해야 할 것들이 생기게 되고 여기에 신체적인 부담까지 더해집니다.

스텔싱을 당한 피해여성들은 남성들이 “장난이었다”며 무마하려고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책임지겠다”는 말로 안심시키려 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후피임약을 처방받아 먹거나 실제 임신이 돼 임신중지를 하거나 출산을 하는 등 부담을 지는 것은 여성입니다. 남성이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스텔싱은 여성계가 낙태죄 폐지를 주장한 근거이기도 했습니다. 스텔싱으로 인해 예상치 못한 임신을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원치 않은 임신을 여성 자신의 의사에 따라 중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여성계는 스텔싱 피해를 호소하며 낙태죄 폐지를 주장했는데, 남성들은 정부가 임신중지 제한적 허용안을 입법예고하자 오히려 스텔싱을 하겠다며 ‘가해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동의하에 이뤄진 성관계라고 하더라도 스텔싱은 명백한 가해행위입니다. 계명대학교 인권센터 초빙교수인 김희정 박사는 지난 2019년 법학논문집에 발표한 ‘스텔싱의 형사처벌 가능성에 관한 소고’에서 “스텔싱의 피해가 강간과 같이 정신적, 신체적 피해의 정도가 크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현행법상 스텔싱을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은 없습니다.

해외 몇몇 국가에서는 스텔싱을 처벌한 사례가 있습니다. 독일의 경우 지난 2018년 스텔싱 가해자에 대해 유죄가 선고된 바 있습니다.

캐나다의 경우 지난 2014년 상대방에게 콘돔에 구멍을 뚫은 사실을 알리지 않고 성관계를 맺어 피해여성이 원치 않은 임신을 하고 임신중지를 하도록 한 남성에 대해 특수성폭력(aggravated assault)을 인정해 징역 1년6월을 선고한 바 있습니다.

스위스에서는 지난 2017년 스텔싱에 대해 모독죄(defilement)를 적용해 처벌하기도 했습니다. 스위스 법원은 스텔싱이 형사처벌의 대상이지만 강간으로 보기는 어렵다며 모독죄를 적용해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스텔싱에 대해 처벌을 하고 있는 국가들 대부분은 스텔싱을 강간으로 처벌하고 있지는 않으나, 성범죄로 판단해 처벌하고 있습니다.

미국, 싱가폴 스텔싱에 대한 처벌을 논의 중인 국가들도 있습니다. 처벌 논의의 중점은 ‘상대방의 동의’입니다.

스텔싱을 동의가 없는 성관계로 보고 강간죄로 처벌하거나, 성관계 동의는 인정되나 콘돔 사용에 대한 동의가 없었기 때문에 성폭력, 성적학대, 모독죄 등을 적용해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이들 국가에서는 강간 또는 성폭력 범죄의 구성 요건에 ‘상대방의 동의’가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강간죄의 구성 요건에 상대방의 동의 여부가 포함되지 않아 처벌이 어려운 실정입니다.

김 박사는 논문에서 “우리나라의 경우 외국과 달리 비동의 간음죄가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사안에 따라 상해죄나 과실치상죄가 검토될 수 있다”면서 “비동의 강간죄 형법개정안이 통과된다면 외국과 같이 강간죄 또는 강간 치상죄와 같은 성폭력 범죄로 검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정의당 류호정 의원은 지난 8월 12일 강간의 구성요건에 ‘상대방의 동의가 없는 경우’를 포함하는 내용의 형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한 바 있습니다. 스텔싱에 대한 처벌이 이뤄지기 위해서 반드시 처리돼야 하는 법안입니다.

낙태죄 개정안 입법예고에 스텔싱을 하겠다는 발언이 이어지는 가운데, 여성의 안전과 건강권을 보장할 수 있는 법안 마련이 시급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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