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뉴시스
더불어민주당 대표 시절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뉴시스

주제를 무엇으로 하느냐와 상관없이 글쓰기는 무척 어렵다. 특히 사람을 주제로 한 글은 더욱 어렵고 조심스럽다. 그 사람의 전부를 알기도 어렵고, 어찌어찌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어떻게 쓸 것인가를 생각하면 더욱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이 지면에서 다룰 추미애뿐만 아니라 지금껏 다뤄왔던 인물에 대한 글의 내용 또한 꽤나 피상적이고 부분적이며 주관이 개입된 것이라는 점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에 대한 글, 그 중에서도 정치인을 다루는 글을 쓰는 까닭은 이들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생각보다 크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싫든 좋든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정도와 깊이의 차이는 있겠지만 정치의 영향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다. 국민을 대신하여 정치 활동을 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지켜보면서 격려하고 때로는 비판을 하는 일은 어찌 보면 우리의 삶을 위해 당연히 해야 하는 일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국민이 정치인에게 주목하는 것은 ‘이 사람에게 정치인의 자질이 있느냐’, ‘정치인으로서 무슨 일을 했느냐’, ‘이 사람에게 기대할 수 있는 점은 무엇이냐’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는데 사실 이 조차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알기 어렵고, 저 세 가지 질문 속에 담긴 기준 역시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단언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하겠다. 게다가 추미애처럼 ‘추다르크’라는 다소 전투적인(?) 별명을 지닌 정치인은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사람들의 선입견에 막히게 되어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가 더욱 쉽지 않다.

■ ‘추다르크’는 좋은 별명이 아니다

추미애의 별명을 부르면서도 이 별명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일견 크게 중요하다고 볼 순 없겠지만, 이 사람은 어떤 성정을 지니고 있는지, 그간의 정치적 행보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한 번 살펴보고자 한다.

추미애는 1996년 김대중 총재가 이끌던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서울 광진구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알다시피 추미애는 이전까지 판사로 있었으며,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비례대표로 가지 않고 곧바로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대단한 성공이라고 하겠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SNS와 같은 소통 창구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을 알릴 방법이 거의 없었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지역구에서 당선되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점 하나가 있다. 추미애는 이 승리로 서울 지역구 소선구제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듬해 12월 18일에 제15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추미애는 11월 말에 김대중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대구로 내려갔다. 대구는 지금도 보수 세력의 중심지다. 영호남의 지역주의는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해소되고 있지만, 여전히 알게 모르게 굳건한데 당시에는 더욱 견고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겠다. 이런 상황에서 추미애는 ‘잔다르크 유세단’이라는 이름의 유세단을 조직해서 만류하는 주변을 설득하여 기어이 대구로 내려가 김대중 후보를 지원하고, 지역주의를 깨기 위해 애썼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추미애를‘추다르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추다르크’라는 별명 속에는 남들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에 희생을 감수하고 기꺼이 뛰어드는 강단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유세단이 얼마큼의 성과를 거뒀느냐의 여부는 차치하고, 지역주의가 횡행하던 그 시절, 김대중을 두고 빨갱이라고 부르던 그 지역에 뛰어 드는 일은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하겠다. 2012년부터 대구에서 세 번을 도전해서 한 번 당선되었고, 이후 낙선했던 김부겸을 떠올려 본다면 당시 추미애의 유세단 활동은 좋은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한다.

물론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이나 김부겸처럼 자신이 험지에 출마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아주 큰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겠지만, 당시의 상황과 김대중이라는 이름 석 자가 지녔던 상징성을 감안한다면 하나의 이벤트 정도로 작게 볼 수도 없지 않은가 한다. 이 유세단이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민주당이 영남에서 자리를 잡는데 나름대로의 선구적인 기여를 한 측면도 분명히 있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이후 추미애는 초선 포함 다섯 번이나 국회의원이 되었고, 2016년에는 더불어민주당의 당대표로 뽑혔으며, 2020년에는 법무부장관까지 지내면서 ‘거물’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 사람을, 그것도 호의적인 시각을 지닌 사람들이나 ‘추다르크’라고 부르면서 환호하고 있을 뿐인 것 같다. 추미애를 좋게 보지 않는 사람들 역시 ‘추다르크’가 지니는 이미지에 갇혀 있기는 마찬가지다. 추미애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별명에 주목하여 ‘강단이 있다’고 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은 ‘고집만 세다’, ‘독하다’고 한다. 추미애 스스로 그간 정치를 하면서 대찬 모습을 각인 시켰기 때문이었겠으나, 이와 동시에 국민들 역시 이 사람의 내용을 보기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더욱 주목했음을 알 수 있다. 추미애 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장점이 그 사람의 성장을 방해하는 단점 또는 한계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간 추미애는 기존의 ‘추다르크’가 지니고 있는(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강한 이미지와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찬성을 했던 이력 때문에 민주개혁진영 지지자로부터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고, 법무장관 재직 시에 당시 검찰총장이던 윤석열과 대립각을 세우는 모습을 보여 양 진영 모두에게 비판을 받았다. 이 비판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제가 공직에 근무하면서 여성이어서 개인 사정을 봐달라고 한 적이 없어요. 그럴 수도 없었고요. 아이 셋을 출산하면서 항상 마지막 날까지 근무했어요. 여자라고 봐 달라면 ‘여자는 다 그래’ 할 것 아닙니까. ‘여자의 한계야’ 라는 소리를 듣지 않아야 했어요. 선구적 여성으로서 내가 흐트러지면 여성이라는 존재가 위축되죠. 여성에게 맡겨도 해낸다는 것, 그건 후배 여성들에 대한 책임이기도 했죠. 물론 아직 임명직에는 여성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지만 저는 임명직에 도전한 게 아니잖아요. 경쟁의 무대에 서면서 영남출신이라고, 여성판사라고, 혜택을 받을 수 없었고 또 받아도 안 되는 것 이었죠.”<중앙일보, 2008. 10. 10>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의 거물 정치인 추미애가 있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정치인 추미애로 평가받기 보다는 남성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은 여성으로 간주되고, 사람들의 이런 생각이 ‘추다르크’ 속에 담겨 있지 않은가 한다. 이런 면에서 ‘추다르크’는 추미애의 정치적 소신, 정치인의 자질, 성정을 보여주기에 충분하지만, 정치인 추미애를 더 이상 성장할 수 없게 만드는 별명이라고 생각한다. ‘추다르크’는 좋은 별명이 아니다.

■ 추미애는 괜찮은 정치인이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추미애는 강성 이미지를 지닌 정치인이 되어 있다. 이래서 보수진영은 당연히 추미애를 싫어하고, 민주개혁진영에서도 조차 추미애에 대한 호오(好惡)는 극명하게 갈리는 편인 것 같다. 긍정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설상가상 법무장관으로 있으면서 윤석열과 대립각을 세우는 바람에 더욱 강성 이미지가 굳어지면서 미운 털까지 박혀 버렸다. 정권과 집권여당에 호의적이지 않은 언론은 지속적으로 둘의 싸우는 모습만 보여주면서 많은 국민들이 피로감을 호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이 피로감을 느끼게 된 점에 대해서는 언론의 의도적인 몰아가기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추미애 뿐 아니라 정부와 집권여당이 그 피로감을 반감해 줄 책임이 있다. 다만 둘의 싸움은 개인 간의 힘겨루기가 아니라 ‘검찰이 법을 어기고 국민에게 대항한 것’이라는 점은 분명히 밝혀 두어야 하겠다.

“법률상 검찰은 법무부 소속의 외청(外廳)이고, 검사는 수사권과 기소권을 갖는 공무원이다. 사전 상으로도 검찰은 중앙행정기관으로서 법무부 소속으로 검사의 감찰업무를 맡아 본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권위주의 정권 동안 검찰이 거꾸로 법무부를 지배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검찰에 대해 수사 지휘를 했을 때도 검찰은 사사건건 반발했다. 윤석열 총장은 사표를 던지는 대신 긴장과 소음을 일으키며 저항했다.(…) 법무부 장관의 지휘가 내려오면 그 자체로 바로 효력이 발생하지만, 자신은 동의할 수 없다는 뜻이다.”<조국, 『조국의 시간』, 한길사, 2021, 119-120>

추미애는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장관직을 수행했을 뿐이다. 물론 언론이나 국민은 이 행위에 대해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고, 그런 비판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한 쪽은 ‘법대로’ 움직였고, 다른 한 쪽은 법을 거부한 것을 두고 이를 ‘추윤갈등’으로 치부하면서 추미애의 행동만 탓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추미애의 성정과 그에 따르는 행동이 강해 보이는 건 사실이므로 이에 대해 호오의 감정을 드러내도 좋고, 이를 정치활동으로 연결해서 평가해도 무방하다고 생각은 한다. 그건 전적으로 그 사람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감히 그렇게 보는 독자들에게 ‘공정하지는 못하다’고 말하고 싶다. 덧붙여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그 비판이 오직 ‘정치인 추미애’만을 향한 것이었나? 혹시 ‘여성’이 ‘나댄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나?

이즈음에서 정치인 추미애의 행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추미애는 정치를 해 온 시간만큼 다양한 경험을 쌓아 왔다. 국회의원으로 있으면서 외교, 통일, 법제사법, 국방, 경제, 노동 분야 위원회에서 일했으며, 초선 시절 국회의정활동 행정자치위원회 최우수상 수상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에 걸친 수상 경력이 있으며, 한국을 이끌어갈 리더로 주목받았던 적도 있다. 2014년에는 여러 단체에서 국정감사 우수의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정치인 추미애의 가장 크고 빛나는 업적은 이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주 4·3을 알기 전까지는 내게 제주는 그냥 아름다운 관광지였다. 제주 4·3의 비극을 알았을 때 느낀 것이 있다. ‘모르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드디어 내가 대표 발의했던 제주 4·3 특별법이 이념의 대립을 돌파해내고 1999년 12월 16일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이제 비로소 인권사에 새벽을 열었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절로 쏟아졌다.”<글로벌뉴스통신GNA, 2014.01.17.>

‘제주 4.3 특별법’의 본 명칭은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다. 추미애는 4.3사건 수형인 명부를 발굴해 내서 이를 바탕으로 특별법이 제정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추미애는 의정 활동을 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로 이 일을 꼽고 있다.

“수형인 명부를 통해서 재심 신청이 이뤄졌고, 또 재심에 승소해 공소기각이라는 무죄 취지의 명쾌한 결론이 내려졌다. (…) 하나하나 걸어온 길을 생각하면 수형인 명부를 발굴해 낸 것이 계기가 되지만, 역시 희생자 유족 제주도민이 한마음이 돼서 진실을 향해서 꾸준히 외길을 걸어왔다는 것 (…) 고생하고 헌신해 주신 보람이고, 이것은 평화로 귀결되고 대한민국 정의가 살아있다는 것을 직접 증명해 주신 것이다.”<헤드라인제주, 2020.04.03.>

말마따나 모든 결과는 제주도민이 노력해서 얻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의 공을 적다고 할 수 없다. 나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정치인으로서 추미애는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보고 있다. 내 평가가 편파적이라면 이 사람의 행적을 둘러싸고 오직 비판만 쏟아 내는 사람들의 평가도 공정하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한다. 추미애는 괜찮은 정치인이라고 생각한다.

■ 멈추지 않으려면 부드러워져야 한다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정치인은 우선 소신이 뚜렷해야 하겠지만, 다양한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조율할 수 있는 유연함과 자신의 반대편도 설득할 수 있는 태도와 성품을 지니고 있어야 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물론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면 대차게 싸워야 하겠지만 말이다. 이런 면에서 추미애는 싸움에는 능할지 모르나 만인을 아우르는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재미있는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대로 인용해 본다.

“추미애 의원의 성격이 워낙 불 같아서 주변에 보좌관이나 심지어 운전기사까지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루머가 제보된 적이 있었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글쎄요. 제가 워낙 많이 움직이고 일을 많이 하니까. 업무량이 적지 않죠. 그래서 일이 힘들면 그만 두시는 분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만약 그런 소문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제 불찰이겠지만, 저로서는 그런 루머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중앙일보, 2008. 10. 10>

십여 년 전의 인터뷰 기사라서 지금은 어떠한 지 알 수 없고, 자신이 루머라고 일축했기 때문에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근래에 정치권에 있지 않은 나 역시 저런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추미애가 주변 사람 조언을 잘 듣지 않고 고집이 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마 스스로 대찬 정치인이라는 점을 부각해 왔기 때문에 저런 소문이 들리지 않았는가 짐작한다. 억울할 수 있겠지만, ‘그런 소문이 있다는 자체가 불찰’이라고 생각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한다. 중국의 병법서 『삼략(三略)』에 이런 말이 있다.

“부드러움은 굳셈을 제어하고 약함은 강함을 제어한다.” 하였다. 부드러운 것은 덕이고 굳센 것은 적이며, 약한 자는 사람들이 도와주고 강한 자는 사람들이 공격한다.<柔能制剛, 弱能制强, 柔者, 德也, 剛者, 賊也, 弱者, 人之所助, 强者, 人之所攻>

▲ 김재욱 칼럼니스트
▷고려대 문과대학 한문학과 강사
▷저서 <군웅할거 대한민국 삼국지>
<아이를 크게 키운 고전한마디>
<왜곡된 기억> 외 7권

앞서 말했듯이 추미애는 다선 의원, 당 대표, 장관까지 지낸 거물 정치인이다. 앞으로 무슨 일을 어떻게 할지 알 수 없고, 어느 자리까지 도전하게 될지 알 수 없으나 자신이 하고 싶은 정치를 그에 맞는 자리에서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기존의 강성 이미지를 조금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싸우더라도 힘 대 힘으로 붙기 보다는 부드럽게 대응을 하고, 메시지를 낼 때도 좀 더 온화한 표현을 쓰는 게 낫다고 본다. 강경일변도는 어찌 보면 자신의 역량을 가두는 게 될 수도 있고, 무엇보다 만인을 아울러야할 리더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부드러움과 굳셈을 능수능란하게 할 수 있으면 나라가 더욱 빛나고, 약함과 강함을 그렇게 할 수 있으면 나라가 더욱 드러나며, 부드럽기만 하고 약하기만 하면 나라의 영토는 반드시 줄어들고, 굳세기만 하고 강하기만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能柔能剛, 其國彌光, 能弱能强, 其國彌彰, 純柔純弱, 其國必削, 純剛純强, 其國必亡>

기존의 이미지나 대찬 성정을 한꺼번에 다 바꾸라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한 순간에 쉽게 변하지 않는다. 다만 정치인 추미애에게 현재 또는 앞으로 필요한 덕목은 부드러움이라고 말할 뿐이다. 그래야 주변에 자신을 도울 사람이 모이고,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멈추지 않으려면 지금보다 더 부드러워져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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