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가격’ 세 번째 납부자, 래퍼 꿈나무 박동진씨의 이야기
23살 전역과 동시에 상경…월 150 치킨집 알바로 근근이 버텨
꿈 하나로 버텨온 타향 살이…생활고와 현실에 부딪혀 좌절
결국 현실 순응한 동진씨 “꿈을 좇던 당시, 살아있음을 느껴”

‘빈곤이란, 누구나 갖는 꿈을 똑같이 갖고 있지만, 실현할 방법이 전혀 없는 것’ -도서 <풍요의 시대, 무엇이 가난인가> 中

상대적으로 소득수준이 높은 우리나라도 빈곤 문제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않다. 특히 고달프게 살아가는 빈곤 청년들에게선 꿈을 잃은 슬픈 자화상을 여과 없이 목도하게 된다.

과연, 꿈이라는 작은 씨앗에 푸른 싹이 트고 잘 익은 열매가 맺히기 위해선 몇 리터의 땀과 눈물이 필요할까. 그간 흘려온 땀과 눈물로 꿈이라는 씨앗에 물을 준다면 꿈은 무탈하게 자라날 수 있을까. 또, 우리 사회라는 토질(土質)은 꿈을 심기에 얼마나 비옥한가.

다들 ‘꿈을 크게 가져야 깨졌을 때 그 조각도 크다’고들 말한다. 꿈을 크게 가지는 것조차 사치스러울 땐 어떻게 해야 할까. 또, 무기력하게 깨져버린 꿈의 조각들이 온 몸을 할퀴어 올 때, 그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해선 그 누구도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못한다. 꿈을 위해 모든 것을 맨 몸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청년들에겐 꿈은 어떤 존재일까.

<투데이신문>이 만나본 꿈꾸는 빈곤 청년들의 눈빛은 그 무엇보다 뚜렷이 빛났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침이고, 밤이고 죽어있다. ‘꿈의 가격’을 제때 지불하기 위해서다. 언제 이뤄질지 모르는 꿈을 오롯이 자력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청년들은 심적으로도, 물적으로도 빈곤했다. 청년들은 꿈을 담보로 가불인생을 살고 있다. 

너무나도 성실한 이들은 깨어있는 동안 꿈의 청사진에 열심히 덧칠한다. 꿈은 아름답다고들 말하니까, 여기저기서 열심히 긁어모은 가장 선명한 색으로 가득 채운다. 그런데 이상하다. 덧칠을 하면 할수록 소중한 청사진이 흐려진다. 청년은 급하게 붓을 내려놓는다. 대한민국 청년들이 그려나가는 꿈의 가격은 얼마일까. 

박동진(가명·26)씨가 출장 업무 전화를 받고 있다. ⓒ투데이신문
박동진(가명·26)씨가 출장 업무 전화를 받고 있다.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박세진·박효령 기자】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곳, 서울 땅에서 참 많이 울었다. 평생을 눈물 없이 살아왔던 그였다. 어떤 시련과 고난이 길을 막아서도 보란 듯이 헤쳐나갔다. 그 탓일까. 스스로가 정말 강한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착각이었다. 그렇게 벌거벗은 자신을 마주했을 때, 거대했던 그가 무너졌다. 고작 돈 몇 푼 때문에. 텅 빈 방안엔 축축한 울음소리만 가득했다. 그날 청년의 방 안에는 알 수 없는 무력감이 출렁였다.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이런 자신이 마치 난파선 같게만 느껴졌다. 거대한 바닷가에 표류하는 난파선. 그래도 그에겐 꿈이 있었다. 꿈이 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야윈 어깨에 걸친 가방. 그 속에 들어있는 짐은 옷도, 돈도, 음식도 아니었다. 오직 꿈 하나였다. 혹여나 누가 훔쳐갈세라, 어디 흘러버릴까 가방 지퍼를 꽉 잠갔던 그다. 하지만 이곳은 서울, 눈 뜨고 코 베어간다는 곳이 아닌가. 나 홀로 서울살이를 버텨내는 동안 야금야금 도둑맞은 꿈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다. 먼지 쌓인 가방만 바라보는 그다. 

청년은 세상 그 어떤 단어를 조합해도 그때 당시의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한다. 모든 것을 잃은 기분. 하나뿐인 꿈조차 지킬 수 없는 현실이 사무치게 미웠다. 우울감이 온몸을 어루만질 때면 미친 듯이 한강 변두리를 걸었다. 한강 수면 위로 비치는 빌딩 불빛은 눈부시게 빛났지만, 청년의 삶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이 땅에서 청년은 평생 모르고 살았던 어둠을 알게 됐고, 서울은 여전히 그 어둠을 몰랐다. 이루지 못한 꿈은 소년을 어른으로 만들었다.

동진씨가 살았던 반지하방.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30만원. 관리비 별도. [사진제공=박동진씨]
동진씨가 살았던 반지하방.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30만원. 관리비 별도. [사진제공=박동진씨]

300/30. 관리비 별도. 반지하. 화장실 없음.

박동진(26·가명)씨의 꿈은 래퍼였다. 글 쓰는 행위를 누구보다 사랑했던 그였다. 하얀 종이 위에 형형색색의 볼펜으로 글을 써내려갔다. 때론 가슴 따뜻한 사랑 이야기를, 때론 꿈에 대한 희망찬 이야기를 꾹꾹 눌러담았다. 하나, 둘 글이 쌓여갈 때 즘, 문득 내가 쓴 글에 또 다른 생명을 불어넣고 싶었다. 무대 위에 올라가 직접 내가 쓴 글을 읊조리는 상상을 했다. 글과 노래로 누군가에겐 공감과 위로를, 또 다른 누군가에겐 희망과 행복을 주고 싶었다. 23살, 아직 어린 그가 맨 몸으로 서울 땅에 뛰어든 이유다.

“서울엔 더 좋은 직장이 많아. 거기서 일을 하면서 많은 것을 느껴보고 싶어”

군대를 전역함과 동시에 고향땅을 등졌다. 사랑하는 부모님에겐 서울로 향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당연하게 지원을 바랄 수 있는 부유한 집안이 아니었기에, 아들의 걱정을 나눠드리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가진 걱정은 온전히 나 혼자 짊어지고 싶었다. 내가 선택한 삶이고, 내가 선택한 꿈이다. 힘들다 응석부리기엔, 이미 부모님의 어깨에 짊어져있는 짐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부모님을 안심시켜드리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서울엔 더 좋은 직장이 많다는 거짓말. 당장 서울 땅에서 면접 본 곳도, 오라는 곳도 없으면서. 허울 좋은 거짓말로 부모님을 안심시켰다. 부모님은 떠나는 아들을 말리지 않았다. 그렇게 꿈 많은 청년은 고향땅을 떠났다. 동진씨가 그토록 사랑하던 부모님은 멀어지는 아들의 등만 바라봤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라는 말과 함께.

갓 상경한 동진씨에게 서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하늘 높은줄 모르는 보증금과 월세. 거미줄마냥 복잡하게 얽혀있는 지하철. 감당이 안 될 만큼 수많은 사람들. 모든 것이 낯설었고 새로웠다. 이런 동진씨의 주머니에 들어있는 돈은 500만원. 군 생활 중 틈틈이 모은 적금과 알바를 하며 모아둔 돈이 전부였다. 동진씨는 수중에 들려있는 500만원으로 타지생활을 시작했다. 

300/30. 관리비 별도. 반지하. 첫 보금자리. 서울 신림역에서 꽤나 떨어진 반지하 방이다. 집 안에 화장실도 없는 이 곳에서 동진씨는 꿈을 위한 첫 단추를 뀄다. 그래도 홀로 일궈낸 집이다. 월세이지만, 스스로 금액을 지불하고 살아갈 수 있음에 뿌듯함을 느꼈다. 다만, 부모님에게 사는 집은 말씀드리지 않았다. 싼 값에 넓은 집을 잘 구했다고 또 다시 거짓말을 했다. 부모님 눈엔 여전히 어린아이 같을 아들이 화장실도 없는 반지하 방에서 산다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뱉을 수 없었다. 

동진씨의 뒷모습. ⓒ투데이신문<br>
동진씨의 뒷모습. ⓒ투데이신문

청춘이 꿈을 좇자, 사랑이 떠났다

20대의 빈곤은 당연한 일이라고들 하지만 간혹, 현실의 무게가 너무 버거울 때가 있다. 치킨 한 마리 사먹는 일로 반나절을 고민하는 시기. 택시를 타는 대신 20분 넘는 거리를 걸어야 마음이 편한 시기. 동진씨는 그 시기의 한 가운데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녀는 사랑을 이유로 동진씨의 가난한 마음을 모두 끌어 안았다. 꿈이 있어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고 말해준 그녀의 든든한 응원 덕에 동진씨는 수 많은 밤을 허기 없이 보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살아가는게 급선무였다. 이를 위해선 일을 해야 했다. 여자친구의 응원에 힘 입어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글을 썼다. 낮과 밤, 하루의 두 조각 중 한 조각은 10시간 가량 치킨을 튀기는 행위로 채워 넣었고, 두번째 조각은 새벽 무렵 집으로 향한 뒤  글을 쓰며 마저 채워 넣었다. 온 몸 가득한 기름기를 지워낸 뒤 미친듯이 글을 썼다. 반지하 방에 자그마한 볕이 자리를 잡으려고 할 때면 동진씨는 잠에 들었다. 

때때로 느슨해진 마음 틈새로 찬바람이 불고 이내 현실과 타협하고 싶어질때면, 동진씨의 여자친구는 동진씨를 다독이며 볕 좋은 날이 곧 올 것이라고 따뜻한 말만 해주었다. 또 그녀는 마이크 살 돈이 없어 휴대폰으로 녹음을 하는 동진씨의 모습을 보고 선뜻 고가의 마이크를 선물해줬다. 그렇게 꿈을 가진 청년은 누군가의 응원을 안고 꿈을 향해 묵묵히 나아갔다.

안타깝게도, 연인이 주는 안정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너무 꿈만 좇았던 탓일까. 동진씨의 든든한 동반자는 서서히 지쳐갔다. 다툼도 잦아졌다. 그럴법도 하다. 여느 젊은이들이 누리는 아름답고 알콩달콩한 연애가 아니었기에, 동진씨는 지쳐가는 그를 이해했다. 결국, 두 청춘의 사랑에 오지않을 것만 같았던 슬픈 겨울이 찾아왔다. 그렇게 애틋한 청춘의 사랑이 떠나갔다. 차디 찬 한 겨울, 동진씨는 길을 잃었다. 

동진씨는 “떠나간 옛 여인 덕에 깜깜한 터널을 지나 올 수 있었는데, 그러느라 그에게 뜻밖의 짐을 지워준 일이 마음 시리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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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씨가 서울살이를 마치고 고향으로 내려와 취업한 첫 직장 전경. ⓒ투데이신문

월급 150만원으론 너무 버거운 꿈

2018년 당시 최저 시급 7530원. 치킨을 열심히 튀기고 또 튀겨서 번 월급 150만원. 동진씨는 부족한 살림에도 무너지지 않고 일했다. 그런데 꿈을 향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보이지 않던 장애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하나 둘 동진씨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고 버티고 버티던 청춘은 결국 넘어지고 말았다. 보이지도 않는 꿈 앞에서.

청년유니온이 2018년 당시 월소득 200만원 이하인 만 19~39세의 남녀 255명의 생활비 등을 조사한 ‘2018 청년 가계부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4%가 소득 수준 때문에 식비, 주거비, 의료비 등 생활에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항목에 제대로 지출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동진씨도 이들 중 한 명 이었다. 꿈을 살찌우기 위해 본인은 밥을 굶었다. 공과금을 아끼기 위해 에어컨은 커녕, 방에 보일러 조차 켜지 않았다. 부모님 지원은 물론 정부 지원 조차 받지 못했다. 애매한 가난은 결국 꿈 많은 청년을 병들게 만들었다.

청춘을 담보로 꿈을 연명하기엔 현실의 벽이 너무나도 높았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어지자 한 없이 무기력해졌고, 하루종일 깊은 물에 잠긴 듯 한 기분이었다. 또, 이 꿈을 계속해서 붙잡아 두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었다. 친구들은 하나, 둘 자리를 잡아가는데 스스로만 제자리 걸음인 듯 했다. 떠나온 부모님에게 너무나도 죄스러웠다. 가계에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짐만 되는 것 같은 죄책감에 동진씨는 결국 큰 결단을 내렸다. 오랜 서울 살이를 뒤로 한 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동진씨는 남들이 가난한 예술가라 손가락질해도, 본인의 고집으로 인해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고 비난해도, 스스로가 풍족하다면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청춘의 치기 어린 젊은 날의 패기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흔적 조차 남지 않았다. 희망찬 꿈의 청사진이 아닌, 어둡고, 버거운 현실을 마주해버린 동진씨는 상경할 때 가져온 단출한 짐들을 하나 둘 챙기기 시작했다. 그토록 소중했던 꿈은 어둡고, 습한 반지하방에 내버려 둔 채로.

출장 업무 차 경기도 고양시 킨택스에 방문한 동진씨. 업무에 관한 정보를 훑어보고 있다. ⓒ투데이신문

냉정한 현실은 ‘소년’을 ‘어른’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동진씨는 2년 간의 고된 서울살이를 마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부모님은 부쩍 수척해진 아들을 말 없이 안아줬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도 동진씨를 보듬어 줬다. 고향 땅에선 그 누구도 꿈 많던 청년에게 손가락질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진씨를 더욱 쓰다듬어줬다.  마치 자신을 패배자처럼 여겼던 동진씨는 따스한 온기를 품에 안고 다시금 힘을 내기 시작했다. 

서울에서의 경험을 녹여낸 자기소개서는 서서히 빛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타향살이에서 얻은 추진력과 서글서글한 성격을 높게 평가한 한 식품업체는 그를 영업관리 신입사원으로 채용했다. 취업에 성공한 동진씨는 가장 먼저 가족에게 알렸다. 그의 부모님은 늘 그랬듯 동진씨를 응원했다. 사회구성원의 일부로서 첫발을 땐 새내기 직장인은 묵묵히 자신의 밥값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월급이 오르고, 연차가 쌓일수록 동진씨의 살림은 풍족해져갔다. 꿈을 좇아 허덕이던 지난 날과는 꽤나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그토록 원하던 차량도 구입했다. 본인의 힘으로 혼자살기 충분한 전세집도 구해서 살아가고있다. 그런데 그의 가슴 한편이 자꾸만 공허하다. 소중한 꿈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그때가 잊혀지지 않는다. 동진씨는 꿈을 좇던 그 젊은 날에 가장 살아있음을 느꼈다고 전한다. 

“꿈을 좇던 그 날, 제 생에 그런 날이 또 올까 싶을정도로 살아있음을 느꼈습니다. (기자님이 보셨을 때) 지금의 저는 어떤 모습인가요. 현실에 순응한 저는 죽어있나요, 살아있나요.”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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