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서정인 기자】 지난해 11월 8일, 오늘은 또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과 첫 번째 인터뷰의 성공적인 마무리로 자신감을 얻은 기자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1호선에 도착했다. 두 번째 장소는 종로3가역이다. 1호선, 3호선, 5호선의 환승이 가능해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장소이자 노인들의 놀이터로 불리는 ‘탑골공원’이 주변에 있다 보니, 역사 구석구석에 앉아 수다를 떠는 노인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기자의 신분은 피하고 싶은 존재였다. 서울의 구도심이자, 정보통이라는 종로엔 기자들의 잦은 출입으로 이미 경계의 대상인 듯했다. 그렇게 연이어 인터뷰를 실패한 기자는 기운이 빠져, 1호선 플랫폼에 자리를 잡고 아픈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이게 왜 안 나오지?”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리니, 자판기 앞에 할머니(이하 김 할머니) 한 분이 서 계셨다. 누군가 한 명을 지목해서 도움을 요청하는 음성은 아니었지만, 왠지 그는 기자를 선택한 눈치였다.

모든 음료가 품절된 자판기에 실수로 돈을 넣은 그는 거스름돈을 돌려받는 방법을 몰라 허덕이고 있었다. 버튼 하나 누르면 해결되는 문제였지만, 이상하게 그의 앞에 설치 돼있는 자판기는 거대해 보였다.

그를 도와 물을 뽑은 후, 자리로 돌아가니, 할머니 친구 분(이하 한 할머니)이 시장에서 사 온 떡의 포장지를 벗기고 있었다. 그들은 기자를 ‘애기’라고 칭하곤 떡을 좋아하는지, 먹긴 하는지, 들고 있던 떡을 내밀며 먼저 선택하라 권유했다. 그렇게 1호선 두 번째 인터뷰가 시작됐다.

김 “요즘 젊은 친구들은 다 귀에 뭐 꽂고 있어서 말도 못 걸어. 나도 껴봤거든, 아무것도 안 들리더라? 그래서 말 안 걸어. 근데 오늘 오랜만에 손녀딸 같은 숙녀랑 얘기하니까 좋네”

한 “그래도 덕담은 하지 마! 싫어해!”

김 “알았어”

오후 1시부터 만나 제기동에서 맛있는 갈치조림을 사 먹고, 집에 돌아가기 아쉬워 지하철에 앉아 수다를 떨기 위해 역사 안으로 들어왔다. 커피만 없었지, 그들에게 역사 안은 카페나 다름없었다. 김 할머니가 검은 봉투 안에 들어 있는 가벼운 옷가지를 보여주며 싼값에 샀다고 자랑을 하자 한 할머니도 지지 않고 아들이 신상 핸드폰을 사줬다며 자연스럽게 사용 방법을 물었다. 이런 유치한 싸움이 익숙한지, 적당히 하라며 서로를 꾸짖었다.

그들은 어린 나이에 서울로 시집와 옆집에 살던 이웃이었다. 서울 관악구 난곡동. 물이 나오지 않아, 물을 길어 산꼭대기까지 옮겨야 하는 동네. 산사태가 나서 가끔 사람이 죽기도 했다며 과거를 회상했다.

김 “산사태가 나서 사람 겁나게 많이 죽은 것도 봤어”

한 “어우 그만해, 애기 놀라겠다”

김 “그냥 옛날에 엄마들은 고생하면서 살았어, 힘들었다고 얘기하는 거야”

한 “그래도 이제는 애들 다 시집 장가보내고, 잘 살고 있지, 손주까지”

자식들 모두 시집, 장가보내고 시간적 여유가 많아진 둘은 자주 약속을 잡는다고 했다. 종로 ‘송해길’에 있는 ‘먹고갈래 지고갈래’식당을 아냐며,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노인들 사이에선 유명한 맛집이라고 그들만의 문화를 알려주었다. 둘이 가도 일인분만 파는 가게들이 넘쳐나고, 정이 많은 동네라고 이야기하는 할머니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은 마음에 나름 노인들의 쉼터 ‘탑골공원’도 가봤다며 아는 척을 해보았다. 하지만 기자의 한마디는 순식간에 웃음거리가 돼버렸다.

김 “거기는 나이 많이 든 할아버지들이 가는 곳이야(웃음)”

한 “맞아. 우리 같은 사람들은 잘 안 가지(웃음)”

처음 인사를 나누고 연세를 물어봤을 때, 그들은 나이를 많이 먹었다며 ‘80세’라고 수줍게 대답했다. 80세 노인들이 나이 많은 할아버지들이라 칭하며 같이 노는 무리가 아니라고 선 긋는 발언에서 귀여운 자부심을 발견할 수 있었고, 이 좁은 종로에서 생성된 그들만의 리그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한 “그래서 애기는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서로의 정체도 모르고 대화를 나누는 상황에 푹 빠져 있을 때, 처음 받는 질문이었다. 그 상황이 우스워 한참 서로를 보고 웃었다.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1호선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기자라며 본인을 소개했다. 할머니들은 손녀가 밖에서 고생하는 게 안쓰러우면서도 기특한지 흔쾌히 인터뷰의 응해주었다.

김 “지하철도 아주 복잡해, 이게 길을 알아야지 나올 수 있는 곳이야”

종로3가역은 노선 3개가 겹쳐있는 곳이라, 처음 방문한 사람에겐 굉장히 어려운 공간이다. 종일 역사 안에 위치하면서 서로 길을 물어보는 노인들을 볼 수 있었다. 인터뷰 진행을 위해 귀가 열려 있던 기자도 출구가 어딘지, 환승을 어디서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꽤 받을 수 있었다. 뭔가 매섭게 쪼아대는 목소리지만 존댓말을 사용했고, 불친절해 보이지만 상세하게 안내해주는 관계들이 있었다. 종로3가역에는 그런 목소리가 참 많았다.

한 할머니는 종종 마주치는 외국인들도 지하철 자리를 양보하는데, 고개 숙이고 자리에 앉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국내 젊은이들이 많다며 섭섭함을 내비치기도 했다. 기자는 한 할머니께 “제가 보기에 두 분 다 나이가 많이 안 들어 보이셔서 자리를 양보 안 할 수도 있어요”라며 진심 어린 소견을 전달했다. 그러자 그들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아이 같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우린 서로를 너무 몰랐다. 공공장소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노인들이 알고 보면 어려운 초행길을 알려 주는 상냥한 시민들이었고, 혹여나 젊은이에게 피해가 갈까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배려 깊은 사람들이었다. 어쩌면 그들이 생각하는 지하철 빌런은 우리였을지도 모른다.

김 할머니와 한 할머니는 오후 4시가 되자, 퇴근 시간대는 피해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만나게 되면 갈치조림을 함께 먹으러 가자고 약속을 한 후, 번호 교환을 했다. 젊은이는 절대 찾을 수 없는 미지의 공간을 소개해준다는 그들의 모습이 오래된 친구처럼 느껴졌다.

자판기에서 물 뽑는 게 어려워 도움을 요청했던 노인은 어느새 손녀의 끼니를 걱정하는 할머니가 돼 있었고, 함께 맛집을 공유하는 친구가 됐다. 우연한 만남이 인연이 되는 순간이었다.  

오늘 지하철을 타게 된다면 귀에 꽂은 이어폰을 빼고 세상 소리를 들어보는 것이 어떨까. 우리도 모르게 차단했던 관계를 바꿀 기회가 될지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