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벤허’ 공연장면. [사진제공= EMK뮤지컬컴퍼니]<br>
뮤지컬 ‘벤허’ 공연장면. [사진제공= EMK뮤지컬컴퍼니]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건, 단 한 번의 실수는 가문을 몰락시키기에 충분했다.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사랑하는 가족들의 생사도 모른 채 곧장 노역장으로 끌려가야 했던 남자는 뒤늦게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커다란 배신감을 느낀다. 평범한 청년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뜻을 이어 명망 높은 예루살렘 귀족 가문의 장자로서 로마에 대항할 힘을 키우게 되기까지 수많은 일이 벌어졌지만, 인간이라는 존재의 위대함은 견딜 수 없을 만큼 힘겨운 고통까지 뛰어넘으며 경이를 느끼게 만든다. 뮤지컬 ‘벤허’는 바로 그런 이야기로 과거와 현재를 잇는 명작의 중심에 선다.

뮤지컬 ‘벤허’가 더욱 섬세해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2017년 초연과 2019년 재연을 거쳐 이번이 세 번째 시즌이다. 지난 9월 2일 EMK뮤지컬컴퍼니의 손을 잡고 새로운 무대를 선보인 뮤지컬 ‘벤허’는 기존 작품이 가진 매력은 온전히 살리면서 일부 장면 연출이나 넘버, 오케스트라 연주에 변화를 주어 비슷한 듯 다른 느낌으로 눈길을 끌었다. 이전에 비해 종교적인 색채는 더욱더 약해졌다. 이번 시즌은 무대 양옆까지 돌무더기와 계단으로 채우고, 관객들의 시선이 배우들의 발걸음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동하면서 더 깊숙이 몰입할 수 있도록 했다. 또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화려한 군무는 완벽한 호흡과 절도 있는 동작으로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신구조화가 어울린 캐스팅도 호기심을 자아냈다. 이번 공연에서는 박은태, 신성록, 규현이 유다 벤허 역을 맡고, 그의 어릴 적 친구이자 로마 신임 총독의 사령관 메셀라 역에는 박민성, 이지훈, 서경수가 이름을 올렸으며 에스더 역으로 윤공주, 이정화, 최지혜가 무대에 오른다. 이밖에 홍경수(퀸터스 아리우스 역), 한지연, 류수화(미리암 역), 장혜린, 문은수(티르자 역) 등이 함께 하며 감동적인 대서사시를 써 내려가고 있다.

뮤지컬 ‘벤허’ 공연장면. [사진제공= EMK뮤지컬컴퍼니]<br>
뮤지컬 ‘벤허’ 공연장면. [사진제공= EMK뮤지컬컴퍼니]

배경은 1세기 초 제정 로마의 박해로 인해 어려움을 겪던 예루살렘이다. 명작의 반열에 오른 장편 영화 ‘벤허(1959)’를 본 적이 있다면 당시 사회적 분위기나 현실이 어땠을지 더욱 쉽게 떠올릴 수 있을 만하다. 좀처럼 희망을 찾기 어려운 시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휩쓸려 버린 사람들의 모습은 절망 그 자체다. 눈부시게 화려한 치장을 하고 여유롭게 웃는 귀족들과 달리 차갑고 단조로운 무대 위에 누더기와 다를 바 없는 옷을 걸치고 채찍을 피하던 유대인들을 보다 보면 벤허 가문에 닥친 재앙이 얼마나 크고 엄청난 일이었는지 곧바로 실감할 수 있다.

벤허는 로마 장교가 되어 돌아온 어릴 적 친구 메셀라와 재회하고 반가워하지만, 그로부터 유대 폭도를 진압하는 일에 힘을 보태달라는 부탁을 받고 곧바로 거절한다. 그러나 이날의 만남이 로마 제국주의에 심취해 있던 메셀라에게는 다르게 기억된다. 다음 날, 유대 총독 그라투스 장군이 승전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를 구경하려던 벤허의 동생 티르자가 실수로 집 옥상의 기왓장을 떨어뜨리는 사고를 내고 만다. 메셀라는 이를 반역이라 칭하면서 벤허 가문 전체를 나락으로 몰고 간다. 이 때문에 벤허는 로마 군함의 노를 젓는 노예로 팔려 가는데,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해적과의 전투에서 퀸터스 장군의 목숨을 구한 대가로 자유를 얻고 그의 양자가 된다. 비록 로마인의 것이었지만, 다시 찾은 부와 명예 덕분에 메셀라를 향한 복수를 실행할 수 있게 된 벤허는 우연히 노예로 팔려나온 에스더를 만나 구출한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카타콤에 모여든 유대인들과 고향에 돌아가 같이 힘을 모을 기회를 도모하게 된다. 당시 예루살렘은 나사렛에서 새로운 유대의 왕이 온다는 소문에 기대를 품고 있던 시기였는데, 벤허 역시 신비로운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절대적 존재의 가호 아래 잃어버린 가족을 다시 찾고 조국의 영광을 되찾을 준비를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 그토록 고대했던 메셀라와 대면하며 최후의 결전을 치르게 된다. 이때 실물 크기의 조형물과 함께 박진감 넘치게 펼쳐진 2막 후반부 전차 경주 장면은 뮤지컬 ‘벤허’를 대표하는 명장면이다.

뮤지컬 ‘벤허’ 공연장면. [사진제공= EMK뮤지컬컴퍼니]<br>
뮤지컬 ‘벤허’ 공연장면. [사진제공= EMK뮤지컬컴퍼니]

이렇게 150분간 무대 위로 펼쳐진 대서사시는 커다란 감동을 선사한다. 인간이라는 나약한 존재가 극한의 고통에 닿았을 때 어떤 감정을 갖게 되는지, 또 그러한 상황과 마주했을 때 어떤 방식으로 눈앞에 닥친 어려움을 헤쳐 나가려 하는지를 생생하게 지켜보며 우리는 인간 존재의 위대함을 깨닫는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절망 속에서 스스로 성장해 나가는 인물들의 모습은 다시금 내일을 버텨낼 힘이 된다.

한번 들으면 쉽게 잊히지 않을 만큼 강렬하고도 매력적인 넘버들 역시 뮤지컬 ‘벤허’가 가진 자랑 중 하나다. 작곡가 겸 음악감독 이성준은 사랑과 용서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거대한 규모의 스토리가 하나로 모일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이번에는 기존에 삽입됐던 넘버 ‘살아야 해’가 ‘살아있으니까’로 바뀌면서 삶의 의미를 찾고 나 자신을 위해 새로이 나아갈 방향을 확인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다소 의견이 갈린다. 드라마적 연결 요소와 시간에 따른 벤허의 심리 변화를 고려한다면 지금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어울리지만, ‘살아야 해’가 워낙 뚜렷한 인상을 남겼던 넘버라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이밖에 ‘희망은 어디에’, ‘승전’, ‘그리운 땅’, ‘운명’, ‘죽음의 질주’ 등 작품 분위기와 잘 어우러지는 넘버들 덕분에 감상이 더욱 풍부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 최윤영 공연 칼럼니스트·아나운서<br>- 한국영상대학교 미디어보이스과 교수<br>-네이버 오디오클립 ‘최윤영의 Musical Pre:view 공연을 말하다’<br>-클래식, 콘서트 등 문화예술공연 전문 MC<br>-인천국제공항 아나운서, 경인방송 FM 리포터
▲ 최윤영 공연 칼럼니스트·아나운서
- 한국영상대학교 미디어보이스과 교수
-네이버 오디오클립 ‘최윤영의 Musical Pre:view 공연을 말하다’
-클래식, 콘서트 등 문화예술공연 전문 MC
-인천국제공항 아나운서, 경인방송 FM 리포터

인간이기에 느낄 수 있는 총체적 감정, 강인한 의지로 확립한 인간 존재의 절대적 위상을 재확인할 계기가 될 뮤지컬 ‘벤허’는 11월 19일까지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이번 기회에 가슴 깊이 울려 퍼질 에너지 가득한 포효를 직접 느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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