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2019 문학동네 신인상 한여진 시인
“언어의 감도를 찾아가는 사람이 쓰는 사람”
나를 벗어나 거리를 두고 시 쓰려고 노력해

한여진 시인  ⓒ투데이신문
한여진 시인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박중선 기자】 찬바람이 겨울의 방아쇠를 당긴다. 폭죽처럼 터지는 눈. 겨울의 불꽃, 가장 뜨거운 지점으로 도달하려는 수많은 시선. 거뭇한 하늘에 밝은 눈이 울려 퍼진다. 들여다볼 줄 아는 사려 깊은 눈앞에서는 모든 것이 새롭게 존재를 드러낼 준비가 돼 있다.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휘슬러가 안개를 그리기 전까지 런던엔 안개가 없었다”고 말했다.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마침내 마주하는 생경함의 연대는 시시포스적인 삶 속에서 발견하는 시적인 위로라고 여겨볼 수 있겠다. 그리하여 한여진 시인은 “우리는 이웃에게 더 많은 친절한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한여진 시인은 2019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올해 10월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로 첫 시집을 냈다.

만둣가게의 만두 맛은 매일 다르다. “그건 세상에 똑같은 만두란 없기 때문이고 그건 어떤 재료도 같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날씨가 없듯 같은 겨울이 없고 항구적인 존재도 없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더욱 선명한 별의 죽음이 관측되듯 시인은 겨울 날씨에 오돌오돌 떠는 육체를 느끼며 비로소 살아있다고 감각한다. 

그러한 감각의 체격과 상상의 부피는 나를 초과하는 ‘나들’을 발견하게 한다. 그리고 나들은 다시 “흐르고 넘어지고 흐르고 슬프고 흐르고 흐른 채 나에게 도달한”다. 첫눈 위에 발자국을 내기 시작한 한여진 시인의 첫 시집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이다.

인터뷰 말미에 시인은 “우리는 매일 죽음으로 가고 있어서 잘살고 있다는 말은 잘 죽어가고 있다는 말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무구한 두부의 마음으로 되묻는다. “올해는 어떤 겨울에서 잘 죽어가고 있나요?” 

[사진제공=문학동네]
[사진제공=문학동네]

전공이 건축으로 알고 있어요.

네. 현재 건설사에서 현장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어요.

시와 인연은 언제 어떻게 닿게 되었나요.

전공이 건축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건축일로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했는데 2년 차까지 너무 힘들었어요. 원래 책 읽기를 좋아했던 터라 그 시간을 독서로 버텼어요. 그러다 읽는 것을 넘어서서 쓰고 싶다는 욕망이 커졌던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을까. 어떤 게 좋은 글일까. 이런 것들을 혼자 고민하다가 아카데미에 등록하고 시 수업을 듣고 합평도 하면서 즐거움을 찾았어요. 그러다가 등단이라는 것을 하게 됐고 그 뒤로도 늘 읽거나 쓰거나 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꼭 시가 아닌 짧은 일기일지라도 뭔가를 쓰고 있을 때 제일 나라는 자각이 있는 것 같아요.

이미 대학교 때 시로 윤동주 문학상을 수상한 걸로 알고 있어요. 시인님 시작(詩作)의 역사를 좀 더 듣고 싶어요.

대학교 때 연극동아리를 했기 때문에 희곡을 정말 많이 읽었어요. 그래서 원래는 희곡을 쓰고 싶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시에 대해서는 잘 몰랐어요. 그런데 옛날 그리스 희곡들이 시의 어떤 형태라고 하잖아요. 희곡을 쓰기 위해 틈틈이 메모했던 글들이 어쩌면 시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희곡을 주로 읽으시나요.

네. 최근엔 백하룡 작가의 희곡 ‘뼈의 기행’을 재밌게 읽었고요. 만화책, 소설도 자주 읽어요. 건축 관련 책도 많이 보는 편이에요. 특히 ‘도시’에 관련한 이야기를 좋아해요. 

건축이 삶의 공간을 구축하는 예술적 장르라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타고난 재능이 시로서 발현된 거라고 생각됩니다.

등단 전까지 투고했던 작품들이 본심에 올랐던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그래서 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어요. 그런데 막상 등단이 된 이후의 삶과 시집을 내고 나서의 삶은 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점이 어렵다고 느껴졌나요.

등단이라는 건 오히려 목표가 뚜렷한 것 같아요. 투고 시점이 있고 그때까지 계속 퇴고하고 순서 정하고 이렇게 어떤 목표 시점상의 목표가 있는데 등단하고 나서는 온전히 나에게만 달린 것이기 때문에 어렵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첫 시집을 내셨는데 기분이 어떠신가요.

시집이 나온 지 두 달 정도 됐는데 사실 아직 저는 이 시집을 열어보지 못했어요. 

어떤 이유에서죠.

어색하고 부끄럽고 약간 이 친구랑 낯을 가리는 느낌이랄까요. 이런 어리둥절한 마음이지만 이게 뭔지 천천히 들여다볼 생각입니다. 사실 이 원고를 출판사에 보냈던 시기는 2년 전이기 때문에 저는 2년 전의 저와 마주할 참인 거죠. 모든 글이라는 게 그렇겠죠. 글은 현실보다 조금 늦게 오니까요.

방금 말씀하신 부분에서 “시를 쓰고 나서는 그 시와 낯설어지기를 기다린”다는 이수명 시인의 말이 떠올랐어요.

저 이수명 시인님 너무 좋아해요. 그러고 보니 제가 그런 걸 원하고 시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저와 시의 거리두기를요. 

시인님과 시의 거리두기가 시를 쓸 때 가장 신경 쓰는 포인트라고 할 수 있나요.

맞아요. 내가 시로부터 조금 빠져나와야 제삼자의 시각으로 볼 수 있고 그래서 다시 내가 독자가 되고 이제 또 글을 쓴 사람이 되고 글 안에서 살고 있는 화자 이렇게 세 가지 꼭짓점이 있을 거잖아요. 거기서 다 벗어나 봐야 각각의 상황에 들어가서 그 시를 봤을 때의 느낌이 내가 정말 표현하고 싶었던 게 맞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한여진 시인  ⓒ투데이신문
한여진 시인 ⓒ투데이신문

최근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타 장르에 비해 덜 읽히고 배고픈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새로운 시인은 계속 태어나고 시가 써지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김현 평론가가 문학에 대해 한 말을 인용하고 싶어요. “문학이 사실은 배고픈 사람 하나도 구할 수 없고 큰돈을 벌 수도 없어서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적 힘을 알게 된다.” 

시인은 쓸 수밖에 없도록 선택되는 사람이라고도 하잖아요. 

저는 시든 뭐든 어떤 형태의 글이건 그냥 쓰기의 행위라고 생각해요. 딱히 제가 시를 쓰는 시인이라는 것보다 그냥 쓰는 사람, 안 쓰고는 살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이게 누군가에게 가닿지 않더라도 저는 언제나 늘 쓰는 사람이었을 것 같아요.

쓰는 행위를 할 때 가장 행복하신가요.

제가 질문을 드려볼게요. 행복을 믿으시나요.

짧게 생각해보니 아직 행복은 무엇이라고 보편적으로 정의된 적이 없는 것 같네요.

맞아요. 너무 포괄적이죠. 그래서 부가 설명이 필요한 단어라고 생각돼요. 언어는 늘 한계를 가지고 있기에 더 정확한 언어를 쓰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행복 혹은 불행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아요. 말씀하신 대로 보편적으로 정의된 적이 없는 언어는 수많은 감도가 있을 텐데 그 감도에 맞는 언어들을 찾아가려고 하는 사람이 읽는 사람이자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지 않을까 해요.

시집 제목도 그러하거니와 수록 작품에서도 겨울이라는 계절적 이미지가 많은 이유가 있나요.

저는 사실 겨울을 싫어해요. 수족냉증이 있어서 핫팩이 없으면 겨우살이가 힘들어요. 그런 탓인지 역설적이게도 겨울은 타인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계절이에요. 추위로 덜덜 떨고 있을 때 진짜 살아있는 몸이라서 추위를 감각하고 있다는 생각과 동시에 타인에 대한 생각으로 확장되는 것 같아요. 

건축일을 하고 계시니 관련 질문 하나 드릴게요. 최근에 읽은 책 중에 어느 유명한 건축가가 “누수가 없는 집은 숨 쉬지 않는 집이다”라고 했는데 저는 상당히 시적인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공감하고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건물도 살아 숨 쉬어야 되거든요. 벽과 기둥만 있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 우리가 보이지 않게 전기가 흐르고 공기가 흐르고 물이 흘러요. 다만 누수를 최소화하는 게 목표일 뿐이죠. 

실제 시집에 누수와 관련된 <조사>라는 시가 있어요. 실제 제가 지은 건물에서 누수가 발생했는데 안 잡히는 거예요. “물이 여기도 세내요” “저기도 세내요” “기다리는데 안 세내요” 사람들의 이런 말들이 오가는 상황이 연극적으로 느껴졌어요. 물론 이것도 거리감이 생겼을 때 이게 연극적이라는 생각을 했지 제가 당사자잖아요. 누수가 안 잡혀 무척 당황하고 있었는데 순간 한 발짝 떨어져서 거리를 두고 보니 사람들이 물길을 찾아 건물을 헤매고 있는 장면이 시적인 순간으로 다가왔어요. 그게 꽤 인상 깊어서 이후로 좀 순하게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됐어요.

경험에서 우러나온 시의 소재, 그러니까 건축 관련된 <기호와 소음>이라는 시도 기억에 남아요.

토목 기사가 현장에서 일하다가 점심을 만들어 먹으러 가는 내용인데 바로 제 이야기거든요. 물론 저는 건축 기사고 시에서는 토목 기사로 바꾸긴 했지만요. 아무튼 시에 나오는 토목 기사가 자꾸 현장을 벗어나는 장면이 있는데 제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과 맞닿아 있어요. 저는 제 감정을 제대로 보기 위해 자꾸 벗어나기를 시도하는 것 같아요.

지금 떠올렸을 때 기억에 남는 시는 무엇인가요. 

설화 속에 나오는 호랑이를 되게 좋아해서 <초기화>라는 시에 집어넣고 너무 재밌게 쓴 기억이 있어요. 꿈속에서 호랑이를 봤는데 그 호랑이를 또 만나고 싶었어요. 그런데 아무리 상상해도 꿈에서 다시 만나지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제 시 속에 호랑이를 집어넣었어요. (웃음) 

시집 평론 제목이기도 합니다만, ‘미선 언니’ 연작에 대한 얘기가 궁금하네요. 미선 언니는 어떤 존재인가요.

일단 가상의 인물이라는 점을 밝힙니다. 제가 만나 적이 없는 사람이죠. 그런데 그 이름을 실제로 듣기는 했어요. 셰어하우스에서 잠깐 살았던 적이 있는데 제가 들어오기 전 방을 쓰셨던 분 이름이 ‘미선’이었어요. 그런데 같이 살던 친구들이 자꾸 저더러 ‘미선 언니’ 닮았다고 하더라고요. 그 이후로 미선 언니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했어요. 나와 닮았다는 그분의 거취를 상상하다가 “미선 언니는 어디에도 있을 수 있고 어디에도 없을 수 있고” 이런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그러니까 미선 언니의 수많은 가능성들 말이죠.

한여진 시인  ⓒ투데이신문
한여진 시인 ⓒ투데이신문

죽음에 대한 고찰이 작품 곳곳에 있는데.

늘 죽음에 대해 생각해요. 살아있다는 게 결국 죽어가고 있다는 거잖아요. 저는 매일매일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부정적인 그런 느낌이 아니에요. 특이한 생각일 수도 있는데 저는 제 안에 죽어 있는 나도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에겐 분명 내가 만들어 놓은 여러 자아가 있잖아요. 그중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죽어 있는 자아에 대해 생각해요. 죽어 있는 채로 내 안에서 살고 있는.  

다음 시집에서는 어떤 시를 쓰고 싶으신가요.

첫 시집을 엮을 때는 어떻게 하면 더 퇴고해서 조금 더 나아갈지 이런 고민을 했다면 지금 쓰고 있는 시들은 순전히 너무 재밌어요. 너무 재밌어서 막 써보자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예요. 그러다 보니 쓰고 싶은 게 더 명확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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