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

키즈카페에 가면 처음 만난 어린이들이 금세 단짝이 되어 몇 시간이고 어울려 함께 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몇 시간 전에 만난 단짝과 헤어져야 할 때 무척 아쉬워하고 울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그 사회성에 감탄하며, 누구나 마음이 맞는 사람을 찾아 쉽게 어울릴 수 있다는 새삼스러운 가능성에 놀라기도 한다.

어린이들은 다른 아이들의 양육자들에게도 쉽게 다가가 질문을 하는데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은 거의 한 번도 어김없이 “성별”과 “나이”다.

같이 사는 어린이인 다인이와 키즈카페에 가면 다른 어린이들이 젠더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다인이의 머리 모양과 옷을 보며 내게 묻는다. “얘는 남자에요 여자에요?”

‘머리와 옷을 보면 성별을 바로 알 수 있어야 하는데, 얘는 잘 모르겠다. 이상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질문이다. “성별”이라는 것이 반드시 이분법적으로 여성 혹은 남성 둘로 나뉘어 진다는 가정과 모든 사람은 시스젠더(외부성기 모양에 의해 지정된 지정성별과 자신이 인지하는 자신의 성별인 성별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여야 한다는 억압 그리고 그것을 머리 모양과 옷으로 적절히 표현해야 한다는 억압은 영유아 시기부터 시작해서 성별로 구분된 수의를 입고 땅에 묻힐 때까지 이어진다.

성별 정보와 꼭 함께 던지는 질문이 있다. “얘는 몇 살이에요?”

나이를 말해주면 “나는 5살인데! 내가 오빠네”, “내가 언니네”와 같은 반응이 이어진다. 성별과 나이를 확인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래야 호칭 정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걸 어디서 배웠을까? 양육자들부터 시작해서 어린이집과 유치원 교사들 그리고 온 사회가 나이와 지정성별을 통해 호칭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성별과 나이를 묻는 것이 무례하다 여기지 못하며 당당히 질문을 던지는 문화, 심지어 본인이 그것을 직접 확인하고 ‘성별과 나이에 맞게 살라’고 강요할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문화는 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 있다. 여전히 만나자마자 나이를 묻는 사람들이 있다. 나이를 묻는 게 실례라고 사회적으로 알려지자 모든 사람이 대학을 나왔을 것이라 전제하며 학번을 묻기도 한다. 자신보다 어린 사람과의 대화의 기본값은 ‘반말’로 이어간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서로를 존중하며, 법과 규칙을 지키는 사람이 되는 것은 사회화의 과정이다. 그러나 상대의 성별, 나이, 인종, 민족, 장애, 외모, 소득 수준, 학력, 학벌과 같은 사회적 정체성을 빠르게 파악하고 그에 따라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를 다르게 하고자 하는 욕구와 그래도 된다는 문화는 그릇된 사회화의 결과다.

친구 아기의 첫 번째 생일파티, 돌잔치에 갔을 때의 일이다. 돌잔치 사회자는 ‘젠더리스’한 분이셨는데 친구의 아버지가 사회자에게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물었다. 사회자가 현명하게 ‘오늘의 주인공은 손주님이십니다’라고 친절하게 말했으나 친구의 아버지는 서너번 연속으로 계속 집요하게 사회자에게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물었다. 그 분은 사회자의 성별이 왜 그토록 궁금했을까? 그런 집요한 질문은 ‘너의 성별에 맞게 살아라’는 메시지가 되고 이런 현상을 젠더 폴리싱(gender policing)이라고 부른다. 경찰관 노릇을 한다는 뜻이다.

성별과 나이에 따라 사람이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인권과 평등의식이 높아진 요즘에도, 이 억압은 여전히 살아남아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 인간 대 인간이 관계를 맺는데 나이와 성별을 인지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 없지만, 무례하게 빠르게 상대를 파악하고자 하는 욕구는 다양한 정체성과 맥락을 가진 존재들을 삭제하며, ‘오만함’으로 다가온다. 빠르고 효율적인 것을 미덕으로 삼는 자본주의 사회가 성별과 나이에 따라 사람을 다르게 대접했던 유교문화를 잘못 만나, 오만함과 무례함이 곳곳에 점철된 사회를 만들었다. 지정성별과 나이만으로 납작하게 상대의 정보를 파악하는 것으로 그 관계는 차별이 없는 평등한 관계로 이어지기가 어렵다. 모든 인간은 다양한 정체성과 맥락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친구가 되는데 성별과 나이는 상관이 없는 문화는 자유와 행복감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문화에서는 청소년과 노인도 친구가 될 수 있다. 성별, 성별정체성, 성적지향, 장애, 인종, 민족 등 어떤 사회적 정체성과도 무관하게 동일한 관심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고 취미를 공유하는 모든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공고한 젠더권력과 나이로 인한 차별과 억압은 줄어들고 자신과 타인을 긍정할 수 있게 된다.

안타깝게도 이런 문화를 만들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닌 한국사회에서 ‘두 사람‘이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나이와 성별이 같아야 한다. 그러니 누군가와 “친구”가 될 수 있는 확률은 낮을 수밖에 없다. 나이가 다르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해야지 친구가 될 수 없는 걸까? 연애감정을 느끼게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이성과 친구가 될 수 있는가”를 논의로 삼는 것은(깻잎논쟁 등) 이성애중심적인 사고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타인에게 느끼는 감정이 오직 연애 감정 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편협한 사고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나이와 성별이 아니라 불리고 싶은 이름이나 별칭을 물어보면 된다. ‘언니‘, ‘오빠‘, ‘누나’, ‘형’ 같은 성별과 나이에 기반한 호칭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불리고 싶은 이름”으로 부르면 된다. 나이와 성별과 상관없이 우리는 모든 사람을 존중해야 하고 누구에게나 존중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나이와 성별은 애초에 누군가를 다르게 대하는 요소가 되서는 안 된다. “친구”에 단순히 나이와 성별이 일치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관심사가 같은 “모든 사람”이 포함되는 사회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은 정말 크다. 한국 사회가 서로 기꺼이 친구가 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거나 자신의 약자성을 확인하는 관계의 정치학을 지우고, 서로의 존재로 하여금 즐거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관계의 미학을 시작하자.

● 김지학 소장은? 

- 한국다양성연구소 소장 

-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부이사장 

-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운영위원 

- 대한성학회 이사, 학술위원 

- 사회복지법인 프리웰 사외이사 

- 전) 숭실대학교 외래교수

- 전) 서울예술대학교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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