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

인하대에서 성폭력 사망 사건이 일어난지 불과 열흘 뒤인 지난 25일, 윤석열 대통령은 “여성가족부 폐지 로드맵 조속 마련”을 지시했다. 대통령 지지율이 30% 초반대를 기록하며 20%대까지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 속에 지지율 반등을 위한 카드다. 여성들이 어떤 일을 경험하며 어떤 불안감을 가지고 사는지 아무런 관심이 없기에 보일 수 있는 언행이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은 “이건 학생 안전의 문제지, 또 남녀를 나눠 젠더 갈등을 증폭하는 건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며 젠더 기반 폭력(Gender Based Violence)에 대한 개념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냈다.

구조의 문제를 외면하고 개인화하면 국가로서는 모든 문제가 손쉬워진다. 매년 100명 가까운 여성들이 친밀한 관계(애인, 남편 등)를 맺고 있는 남성들에게 살해 당한다(경찰청). 젠더 기반 폭력을 구조적인 문제로 보지 않으면 ‘페미사이드(여성살해)’는 우연한 개별적 사고들의 집합이며 안타까운 개별적인 사례가 되어버린다.

국가가 ‘젠더 기반 폭력 같은 건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사회 전반에서 종합적이고 복합적인 노력을 기울여 체계적으로 변화를 만들어가야 하는 매우 어려운 구조적 문제의 해결을 아예 포기한다. 성차별, 성폭력, 여성살해 등을 가해자 개인의 문제로 책임을 전가하며 이들만 처벌하면 되는 납작하고 손쉬운 사건으로 만든다. 젠더 기반 폭력이 구조의 문제로 호출되지 않음으로써 국가는 실재하는 차별과 폭력을 묵인하고 방조하게 되며, 이는 차별과 폭력이 아님을 사회적으로 학습하게 된다. 그 사회가 만들어낼 비극은 온전히 여성의 안전, 생존과 연결된다.

대학 내에서 여성이 경험하는 구조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생겨났던 총여학생회는 강력한 학내 백래시(페미니즘과 성평등에 대한 반발) 흐름 속에서 많은 대학에서 사라졌다. ‘여성과 남성은 동등한 인간’이라며 안전하고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는 여성들을 ‘여성우월주의자’로 낙인했다. 또한 성공적인 취업을 위한 개별경쟁에 나서야 하는 현실에서 총여학생회와 같은 자치공동체는 사치스러운 경험이 되면서, 많은 총학생회와 마찬가지로 공석이 길어진 학교들도 있었다. 대학 내 여성주의 강의들은 공격을 받아 폐강되기 일쑤였다. 강력한 백래시 속에서 대학 내에서 여성이 ‘몸뚱아리’가 아닌 같은 인간으로서 평등하게 함께 살아가야 함을 생각할 기회들이 차단되었다. 여성이 안전하기 어려운 대학 문화 속에서 인하대 사건과 같이 극단적인 사례가 나왔다. 안타깝게도 이 사건은 고인의 사망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지만, 이는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교육하기를 포기한 교육기관에 몸담은 학생들이 경험해야 했던 뭍 위로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성폭력 사건 중 하나라는 점이 더욱 절망적이다.

대학은 사회의 축소판이다. 최근 몇 년간 진행된 강력한 백래시 가운데 큰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대학의 실패를 살펴야 한다. 강력한 백래시의 흐름 속에서 충분한 사유없이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섣부른 선언을 하고,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기 위한 시동을 걸고 있는 윤 대통령이 만들 사회적 해악은 결국 여성을 향할 것이다. 후보시절부터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 차별은 개인적 문제’라던 윤 대통령은 여전히 제도, 교육, 문화 등 어떤 측면에서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강간문화(Rape culture)가 공고한 상황에서 지금도 아무것도 안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한다. 구조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갖지 못한 채 차별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의 정치는 위험하다.

남자의 뇌, 여자의 뇌가 따로 있다고 말하며 성역할고정관념을 강화하고 피해자 비난하기를 가르치던 국가수준의성교육표준안에 어떠한 사과도 없었던 교육부는, 인하대 사건을 두고 CCTV 확대와 야간출입통제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대학의 실패, 성교육/성평등교육의 실패에 책임이 있는 교육부는 교육을 통한 그 어떤 근본적인 대안도 제시하지 않은 채 CCTV와 출입통제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한다. 철학도, 가치도 없이 언발에 오줌만 누는 교육행정은 존재자체가 무의미하다.

암흑 속을 걷는 듯 힘겨운 정치적 현실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시민사회는 어떠한 대안을 만들고 제시할 것인가. 우선 남성을 여성에 대한 폭력을 끝내는 주체로 초대해야 한다. 남성문화를 공유하는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폭력을 중단시키며, 여성폭력을 끝내는 주체로서의 남성들이 늘어날수록 실질적인 피해를 줄이는 동시에, 문제가 제기되고 논의되는 공동의 경험을 통해 학습효과 또한 높아질 수 있다. 또한, 이미 많은 인권/시민/여성단체들에서 애쓰고 있는 것처럼 특히 남성에게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해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메시지를 가득 담은 미디어를 제대로 분석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을 제공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과정을 동료를 발견하는 즐거운 과정으로 제공하며, 주입식 교육이 아닌 대화를 통한 상호배움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국가가 제 역할 하기를 멈춘 그 공백의 기간 동안, 시민사회가 성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대안을 함께 마련하면서 많은 남성을 여성폭력을 끝내는 주체로 초대하는 과정을 통해 더 많은 동료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 김지학 소장은? 

- 한국다양성연구소 소장 

-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부이사장 

-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운영위원 

- 대한성학회 이사, 학술위원 

- 사회복지법인 프리웰 사외이사 

- 전) 숭실대학교 외래교수

- 전) 서울예술대학교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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