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

유학시절 사회정의 수업 시간에 이란 영화를 한 편 보았다. 그 영화에서 테러리스트로 등장하는 사람은 미국 국적의 백인이며 개신교 신자들이었고, 그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내가 사는 나라, 우리 마을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총으로 사람들을 쏴죽이는데 “테러리스트”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영화가 끝나고 우리는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중동에 위치하고 있는 국가에 살고있는 아랍인 학생들과 무슬림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편견을 나누었다. 미국의 정치와 문화에 큰 영향을 받는 나라인 한국에서 성장한 나는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W. 부시가 이라크, 이란, 북한이 악의 축(Axis of evil)이라고 하면 ‘그들이 정말 악의 중심인가 보다’ 생각했다. 교회의 가르침이 나에게 미친 영향도 컸다. 교회는 무슬림은 정말 싫어했고 악마화했다. 라마단 기간동안 같이 금식을 하며 ‘대적기도’를 했다. 이 대화를 통해 나는 내가 반대하고 저항해야 할 것은 폭력, 무기, 전쟁인데 그동안 엉뚱하게도 특정 지역의 사람과 그들의 종교를 미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느 날은 수업 중 짝꿍대화 시간에 히잡을 쓰고 있는 학생과 대화를 하게 됐다. 평소 궁금했던 히잡에 대해서 물어봤다. “한국도 그렇지만 지금 우리가 있는 미국도 그런데, 히잡을 여성에 대한 억압의 상징으로 여기잖아. 너는 생각해? 해외에 나와있는 동안에도 히잡을 계속 써야하는 이유가 있어?” 그 친구는 “나는 내 신앙을 내가 드러내고 싶은 방식으로 드러낼 뿐 코란 그 어디에도 반드시 히잡을 해야한다는 규율은 없어. 강제가 아니야”라고 말했다. 그 친구는 “강제” 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억압”이 아니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 친구는 이어서 말했다. 미국에 와보니 아주 조그만 옷을 입거나 아주 타이트한 옷을 입는 여성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슴, 허리, 엉덩이, 허벅지 등을 많이 노출하는 것이 예쁘거나 자유롭다고 여겨지고 획일적인 기준에 의해 등급을 매기듯이 평가받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리곤 내게 여성들이 그 평가를 통해 자존감을 얻거나 잃는 현실은 어떻게 생각하냐고 되물었다. 그동안 ‘히잡으로 여성의 머리를 가리게 하는 것은 억압이다’라고 생각했던 내게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명확히 인식하게 해주었다.

들으면 들을 수록 히잡은 벗게 하기만 하면 되는 납작한 이슈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됐다. 여성 통제가 본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성의 신체 노출을 불경하게 여기며 몸을 가리게 하는 억압이든, 여성의 신체를 많이 노출하게 하며 평가하고 대상화하는 것이든 그것은 정치, 종교, 미디어 등 사회에 작동하는 남성이 가진 젠더권력을 통해서 이뤄진다. 가부장제 사회구조와 문화 속에서 여성의 몸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그리고 평가하고 소비하는 권력과 여성을 그 틀에 갇혀살게 하는 억압을 봐야하는 것이다.

동시에 개인이 가진 종교적 맥락 등의 신념을 고려하지 않고 히잡을 강제로 벗도록 요구하는 것 역시 억압이다. 이란에서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잡혀갔던 마흐사 아미니가 사망하게 한 사건으로 여성인권을 요구하는 시위가 촉발되었다. 이 시위는 현재 계급이나 성별과 관계없이 많은 시민이 동참하는 정권퇴진시위로 이어지고 있다. 전 세계가 연대하고 있는 이 싸움에서 이미 수십명이 사망했고, 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체포됐다. 목숨을 건 어려운 싸움이다. 이 투쟁에 강력한 연대의 마음을 전한다. 동시에 우리가 이 이슈를 납작하게만 판단하지 않기 위해 함께 살펴야 할 것이 있다. 히잡 착용을 강제하며 발생한 살해에 맞서는 여성운동 뿐 아니라, 히잡 착용 금지명령에 맞서 착용 투쟁을 하는 여성운동의 역사도 함께 기억하자. 알제리 여성은 프랑스 식민지 시기에 히잡 착용 금지조치에 맞서 싸웠다. 종교적 민족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도구였기 때문에,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란과 터키에서도 공공장소에서 히잡착용을 금지한 것에 맞섰던 여성운동의 역사가 있다. 신장 위구르의 여성들중에는 중국의 인민으로만 호명되기를 거부하며, 카슈미르의 여성들중에는 인도의 국민으로만 불리는 것을 거부하며, 로힝야족 여성들중에는 이제는 패권주의 상징이 되어버린 아웅산 수치의 미얀마 국민이 되기를 거부하며 히잡을 씀으로써 무슬림으로서의 정체성을 고수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프레시안 2017.02.14). 북미에서는 개신교의 성소수자 혐오에 저항하기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히잡을 착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히잡을 벗는 것 만이 여성해방의 상징이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히잡을 쓰든 벗든 자신이 가진 문화적 맥락과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따라 스스로 착용여부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 이란에서 일어나고 있는 탈히잡 시위는 ‘히잡’ 하나만에 대한 시위가 아닌, 여성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요구다. 우리도 그 요구에 응답하자.

모든 사람-특히 여성과 성소수자처럼 젠더에 기반한 차별과 폭력을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신체, 젠더, 섹슈얼리티를 포함한 삶의 모든 부분에 온전한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가자.

● 김지학 소장은? 

- 한국다양성연구소 소장 

-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부이사장 

-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운영위원 

- 대한성학회 이사, 학술위원 

- 사회복지법인 프리웰 사외이사 

- 전) 숭실대학교 외래교수

- 전) 서울예술대학교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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