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취재] 국내 최대 쌀 주산지, 당진 들녘을 가다
“정부 쌀만 천대해 …수매 보장해도 쌀농사 더 안해”
당진제2통합RPC 출범…쌀값 하락에 벌써 손실 걱정
“근시안적 정책으론 안 돼…농정 전환 논의할 시점”

당진시농협쌀조합공동사업법인 관계자가 당진시 우강면에 있는 제2통합RPC에서 도정한 쌀을 보여주고 있다. ⓒ투데이신문
당진시농협쌀조합공동사업법인 관계자가 당진시 우강면에 있는 제2통합RPC에서 도정한 쌀을 보여주고 있다. ⓒ투데이신문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농가 수는 102만2797가구이며 이 중 논벼를 수확하는 농가 수는 53만829가구로 약 51.9%에 달한다. 우리농업에서 쌀농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수치다. 1인당 쌀 소비량은 지난 2019년부터 60㎏ 이하로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제1주식이다. 우리나라에서 어떤 상차림을 해도 밥그릇이 놓이는 자리는 달라지지 않는다.

최근 정치권에서는 쌀농업을 두고 한바탕 격론이 벌어졌다. 여야가 양곡관리법 개정을 놓고 정면으로 충돌했지만 현장 농민들은 둘 다 내키지 않는 모습이다. 이들이 보기엔 야당이 제출한 방안도 ‘생색내기’ 수준에 불과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거부권 행사로 쌀농업을 둘러싼 여러 논쟁을 단칼에 잘라버렸다. 이어 정부는 수확기 쌀값을 20만원(80㎏ 기준) 수준으로 유지하겠다고 큰소리를 친 상황이다. 2019년 12월 국회에서 통과된 마지막 쌀 목표가격이 21만4000원이었으니 새삼스런 목표라 하겠다.

본보는 국내 최대 쌀주산지인 충청남도 당진지역의 들녘을 찾아 쌀농업의 현재를 살펴봤다. 쌀값 폭락의 원인이 공급과잉에 있다며 농민을 탓하는 서울의 사정이야 어디 하루이틀 일이었던가. 당진의 들녘은 올해도 쌀농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대신 매일 묵묵히 상 위에 오르는 밥 한공기가 이들의 대답일 것이다.

【투데이신문 홍기원 기자】 충남 당진은 시군단위 지역 중 쌀 생산량이 가장 많다. 지난해 생산량은 14만7050톤(조곡)으로 강원도 전체 생산량(19만5440톤)과 약 5만톤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당진지역은 5월 무렵 모내기에 들어간다. 벼 수확은 대게 10월경 이뤄진다. 생육기간이 짧은 조생종은 8월에도 수확할 수 있다. 그래서 4월 당진의 논은 텅 비어있다. 

논은 비었지만 농민들은 볍씨 파종 준비에 바쁜 시기다. 당진시농민회 이종섭 회장은 창고에 상토를 들이고 일손을 맞추느라 정신없는 사이에 기자를 만났다. 이 회장은 벼농사를 5만평(약 16.5㏊) 규모로 짓고 있다.

흔히 ‘벼농사는 기계화로 쉽게 농사짓는다’고 말한다. 이어 ‘쉽게 농사짓는데 정부가 강제수매까지 하면 모두 벼농사를 지을 것’이라고도 한다. 이 논리에는 결정적인 함정이 숨겨져 있다. 기계화된 벼농사는 진입장벽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벼농사를 짓지 않던 농민이라면 일단 논을 구해야 한다. 벼농사로 수익을 내려면 규모화가 필수다. 좋은 논은 이미 임자가 있는데다 한 곳에서 필요한 논 규모를 다 확보할 수도 없다. 이 회장도 5만평의 논이 합덕읍 일대에 나뉘어져 있다.

규모화된 벼농사를 본격적으로 지으려면 농기계가 있어야 한다. 농기계를 임차하는 방법도 있지만 같은 지역에서 같은 작목을 재배하면 농사달력도 똑같다는 얘기다. 농사는 때를 놓쳤다가는 망치기 십상이니 결국 농기계를 직접 구입해야 된다.

이 회장은 “콤바인, 트랙터, 건조기, 이양기를 갖고 있는데 트랙터는 2대, 건조기도 3대는 있어야 한다”라며 “한 5억원은 장비 값으로 들인 것 같다”고 말했다. 농기계는 365일 필요한 게 아니라 목적에 맞는 농사때에만 필요하다. 그러다보니 사용기간은 1년에 15~20일 정도 밖에 안 된다. 그래서 농기계가 있는 몇몇 사람들은 벼농사 시기에 맞춰 타 지역에 출장을 가기도 한다.

기계는 소모품이다. 특히 농기계는 포장된 도로가 아닌 농지에서 활동해야 하니 고장이 잦을 수밖에 없다. 이 회장은 “수리비만 3년에 1000만원~2000만원 정도 나온다”라며 “물가상승까지 겹쳐 벼 1㎏당 2100원은 받아야 생산비를 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농협 수매가를 기준으로 보면 당진지역 벼값은 지난해 ㎏당 1550원~1600원 정도에 형성됐다고 한다. 2021년과 비교해 ㎏당 100원 가량 낮아진 금액이다. 12개 농협별로 약간씩 차이가 있을 뿐, 이 회장이 계산한 생산비에 턱없이 미치지 못한다. 이런 마당에 대규모 투자를 감당하면서까지 정부수매만 믿고 쌀전업농이 될 농민이 있기 어려워 보인다.

이 회장은 최근 정부수매를 놓고 벌어진 논쟁에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건설사들의 미분양 아파트는 매입하면서 식량인 쌀은 천대하는 것 같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롤 보면 알겠지만 쌀은 식량주권 차원에서 꼭 지켜야 한다”고 강변했다. 

당진시농민회 이종섭 회장이 볍씨 파종에 쓰일 상토를 보여주며 벼농사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당진시농민회 이종섭 회장이 볍씨 파종에 쓰일 상토를 보여주며 벼농사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매년 40만톤’ MMA 쌀 수입물량부터 해결해야

당진시농민회 김희봉 전 회장은 “당진은 벼농사가 농업의 중심이라며 대단위 간척사업을 한 뒤 쌀농업이 중심인 지역이다. 그게 약 20여년 전이다. 그런데 이제와서 과잉생산이라며 갑자기 천덕꾸러기 취급을 한다”고 탄식했다. 김 전 회장은 “정부가 수매를 보장한다해도 농민들이 추가로 쌀농사를 지을 의향이 없다”고 잘라 말하기도 했다. 정부의 정책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 정부는 생산안정 수단으로 공공비축과 함께 쌀 목표가격제를 추진한 바 있다. 이 제도는 정부가 가격을 산출하고 국회 동의를 거쳐 쌀 목표가격을 확정하면 이에 맞춰 변동직불금을 통해 쌀농가 소득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전 문재인정부는 쌀 목표가격제를 폐지하면서 정부수매만으로도 충분히 생산안정을 이룰 수 있어 쌀농가 소득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거듭 약속했다. 그러나 윤석열정부가 들어선 뒤 추락하는 쌀값을 정부수매만으로 방어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통계청 산지쌀값 조사를 보면 2021년 10월 5일 5만5064원(정곡 20㎏ 기준)이던 쌀값은 지난해 10월 5일 4만4734원까지 내려갔다. 이달 15일 기준 산지쌀값은 4만4412원으로 여전히 맥을 못추고 있다.

지난해 벼 생산량은 499만8223톤으로 2021년(521만1037톤)보다 약 21만톤 가량 줄었다. 김 전 회장은 쌀값이 불안한 근본적인 원인으로 2015년 쌀 관세화 개방 이후, 고정적으로 수입하는 MMA(최소시장접근) 물량을 지목했다. 

우리나라는 단 5%의 관세로 매년 40만8900톤의 쌀을 MMA물량으로 수입하고 있다. 우리나라 총 쌀생산량이 380만톤 수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규모다. 김 전 회장은 “자유무역 시대를 맞아 국내 기업들은 엄청난 수익을 올렸지만 농민들은 피해만 입었다”라며 “재협상을 통해 MMA 물량을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진시 우강면에 있는 제2통합RPC는 지난해 12월 준공됐으며 올해부터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한다. ⓒ투데이신문
당진시 우강면에 있는 제2통합RPC는 지난해 12월 준공됐으며 올해부터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한다. ⓒ투데이신문

낮은 쌀값에 저가경쟁까지…RPC 규모화 괜찮을까

정부수매를 의무화하면 쌀농업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지적도 있으나 현장의 사정은 딴판이다. 벼는 도정 등의 가공을 거쳐야 쌀이 된다. 쌀값 하락은 농민에게도 타격이지만 가공·보관·판매를 맡은 RPC(미곡종합처리장), DSC(쌀 건조저장시설)의 수익 저하로도 이어진다. 

쌀농업에서 수익이 나지 않으면 이들 시설에 대한 재투자가 이뤄지기 힘들게 된다. 주로 1990년대에서 2000년대에 지어진 시설들의 노후화가 심화되고 있지만 쌀농업 전망이 어둡다보니 해결은 난망한 상황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같은지역 쌀인데도 판로확보를 놓고 저가경쟁에 돌입하는 악순환도 이어지고 있다. 이에 지역농협 사이에서는 악순환을 끊을 대안으로 조합공동사업법인(이하 조공법인)을 구성해 쌀사업 통합에 나서고 있다. 

당진지역은 관내 3개 농협이 구성한 제1통합RPC(당진해나루쌀조합공동사업법인)에 이어 8개 농협이 참여한 제2통합RPC(당진시농협쌀조합공동사업법인)가 올해부터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한다. 당진시 우강면에 건립된 제2통합RPC는 부지면적 2만9302㎡, 건축면적 7128㎡ 규모로 국내 최대 쌀생산시설이다. 시간당 백미 20톤을 생산할 수 있으며 기존 8개 농협 시설까지 합치면 연간 총 6만톤 가량의 벼를 수매해 관리할 수 있다. 

당진 제2통합RPC 건립에만 300억원이 투입됐으며 8개 농협이 보유한 기존 쌀생산시설들도 보수에 들어갈 계획이다. 이들 농협이 막대한 투자까지 하면서 쌀사업을 통합한 이유도 저가경쟁을 근절하고 규모화를 통해 시장협상력을 높이겠다는데 있다.

제2통합RPC 관계자는 “쌀도 가공보관이 중요하다. 보통 6~7월이면 미질이 떨어지는데 이번에 들어온 사일로는 자체 냉각기가 설치돼 제품관리가 한층 수월해졌다”라며 “친환경쌀, 기능성쌀도 따로 관리할 수 있게 돼 브랜드 경쟁력 제고도 기대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기능성쌀 시범재배와 저탄소인증을 준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통합RPC의 성패는 쌀값에 달렸다. 지난해 쌀값이 폭락하며 당진지역 농협 중에서는 쌀사업에서만 10억원 내외의 손실을 입은 곳도 나왔다. 이 관계자는 “10월에 벼를 수매하려면 쌀 판매가 원활해야 하는데 아직 창고들이 많이 차 있다”라며 “올해도 지난해 못지않게 쌀값이 좋지 않아 우리도 손실을 안 볼 수가 없다”고 사정을 전했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15일 기준 산지쌀값은 4만4412원(정곡 20㎏ 기준)으로 지난해 4월 15일(4만6091원)보다 더 내려갔다. 2021년 4월 15일 산지쌀값이 5만5180원으로 2년 전과 비교해 19.5% 남짓 하락한 가격이다. 80kg으로 따지면 17만7648원으로 정부가 목표로 제시한 ‘수확기 쌀값 20만원’과 상당한 격차가 나고 있다.

정부가 수확기 쌀값이라 국한한 점도 현장의 사정과 맞지않는 면이 있다. 가을에 벼를 수확해 1년 내내 쌀을 판매하고 다시 가을에 벼를 수확하는 구조에서 수확기 쌀값만 보장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지적이다.

이래서는 제2통합RPC 건립에 들인 투자 회수는커녕 적자규모가 더 커지는 최악의 상황이 닥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 관계자는 “최소한 1일 150톤은 가공해 판매해야 하는데 현재는 가동률이 50%대”라며 “지금 쌀값도 우리가 수매한 벼값을 환산해 비교하면 약 10% 정도 떨어져 있다고 본다”고 우려했다. 그는 “너무 큰 규모화는 리스크도 따라 커질 가능성이 있다. 쌀농업 규모화가 맞는 방향인지 시험대에 오른 셈”이라고도 말했다.

당진 제2통합RPC에 포장작업까지 마친 쌀이 쌓여있다. ⓒ투데이신문
당진 제2통합RPC에 포장작업까지 마친 쌀이 쌓여있다. ⓒ투데이신문

목표가격제 부활 고개…“주요작물까지 확대해야”

당진지역에서 만난 농민과 쌀농업 관계자들은 “현재 논의를 보면 현장과 맞지 않는 점이 많다”고 입을 모았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올해 초 신동진벼가 다수확품종이라며 공공비축미 매입대상 및 정부보급종 대상에서 제외하는 방안을 추진하다 유예한 바 있다.  

당진지역에서도 일부 신동진벼를 농사짓지만 과연 신동진벼가 다수확 범위에 들어가는지에 대해선 고개를 외로 꼬았다. “정녕 다수확이 문제라면 정부에서 새로운 대체품종을 개발해야 한다. 고품질쌀이 보급되면 자연스레 다수확품종이 교체되지 않겠냐”는 얘기도 나왔다. 

논에 벼 대신 콩류나 조사료 등을 재배하는 ‘논 타작물 재배 지원’에 대해서도 비관적인 분위기였다. 이전 문재인정부는 논 타작물 재배 지원사업을 추진하다 3년여 만에 사실상 중단한 바 있다. 쌀값이 반등하고 콩값은 하락하는 기미를 보이자 부랴부랴 타작물 재배 지원을 끊은 것이다. 

논 타작물 재배 지원을 다시 추진하더라도 쌀과 콩이 맞물린 상황에서 두 품목 모두 수급균형을 맞출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자칫 쌀값 폭락이 타 품목까지 확산되는 도미노 현상을 촉발할 여지도 있어 쉽게 결론짓기 어려운 사안이다.

이에 양곡관리법뿐 아니라 직불금제도도 개정해 다시 쌀 목표가격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윤준병 의원은 지난 14일 ▲쌀 생산비 보장제 도입 ▲목표가격 및 변동직불금제 부활 ▲농산물가격 안정제 도입을 골자로 한 양곡관리법·농업농촌 공익기능 증진 직접지불제도 운영에 관한 법률·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이는 기존 목표가격제를 부활시켜 공시된 쌀 목표가격과 해당연도 쌀 수확기 평균가격 차액의 90%에서 소농직불금과 면적직불금을 제외한 남은 금액을 변동직불금으로 지급하자는 내용이다. 윤 의원은 “양곡관리법 개정안 부결에도 불구하고 쌀 재배농가의 소득안정과 식량안보 확보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국가적 과제”라며 “정부의 미온적인 농정정책을 확인한만큼 쌀 수급안정과 농민의 소득안정을 위한 여러 정책수단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시행될 필요성이 커졌다”고 강조했다.

GS&J인스티튜트는 지난 5일 연구리포트를 통해 “쌀과 주요 농산물의 실질가격이 기준가격 이하로 하락하는 경우 그 차액의 85%를 보전하는 가격위험완충제도를 도입하자”고 대상품목을 쌀 이외 주요품목까지 확대하는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GS&J인스티튜트는 “각 농가가 대체작물의 재배면적을 결정하면 수확 후에 생산량과 수요에 불일치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라며 “계약거래 방식이 생산과 유통의 중심이 되도록 계약거래에 따른 위험을 완충하는 지원사업을 시행하자”고 덧붙였다.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송원규 부소장은 “가루쌀, 스마트팜, 다수확품종 금지와 같은 개별화되고 근시안적인 정책으로는 미래농업을 만들 수 없다”고 단언했다. 송 부소장은 “쌀값 폭락에 대한 정부 대응과 무조건적으로 시장에 맡기는 정책 방향성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해 식량주권 강화를 위한 직불제 개편, 곡물자급률 제고, 적정 가격 보장과 안정성 강화 등 농정 전환의 논의로 나아갈 시점”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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