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 저자 이규식 장애인 활동가

출퇴근길 지하철 시위했던 전장연의 행동대장
장애인권사 변천을 모조리 겪으며 변화 이끌어
국내 중증 뇌병변 장애인 최초로 자서전 발간해
시민 사회의 연대가 인권 문제 해결하는 지름길

지난 21일 혜화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규식 씨. ⓒ투데이신문
지난 21일 혜화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규식 씨.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이주영 기자】 서울 지하철 탑승 시위로 세간에 알려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의 상임대표 이규식(54)씨. 왠지 어려워 보이는 소개 문구 뒤에 가려진 그의 진짜 모습은 여러 사람과 만나 대화하기를 좋아하고 술과 담배를 즐기는 호쾌한 사람이었다. 

<투데이신문>은 지난 21일 혜화의 한 카페에서 장애인권 운동가이자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의 저자인 그를 만났다. 투사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실 노는 일에 더욱 진심인 그는 자신을 소개해달라는 요청에 “싸우는 이규식보다는 노는 이규식으로 기억되고 싶은 사람”이라고 답했다.

기계 다루는 일에 푹 빠졌다는 그는 자신의 몸에 맞게 개조한 휠체어 ‘탱크’를 타고 혜화 여기저기를 누볐다. 바다 수영이나 다이빙 같은 활동적인 체험도 마다하지 않는 그는 말 그대로 인생을 여행하는 모험가였다.

소년 이규식은 무엇이 잘못된지조차 몰랐다

전장연의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시위가 이어진 지 1년 5개월, 시민들의 시선은 여전히 따갑다. “이렇게 해서는 오히려 반감만 산다”, “무고한 시민의 발목만 잡는다”, “우리도 먹고살려고 출근하는 거다”라는 여론을 등에 업은 경찰과 서울교통공사는 과격한 시위 저지와 6억원대 손해배상 청구로 맞받았다.

마치 세상이 등진 것처럼 느껴져도 고된 몸을 이끌고 어김없이 집을 나서는 이들이 있다. 이씨도 그들 중 한 사람이다. 전장연 상임대표인 그는 지하철 선전전을 위해 매일 아침 5시에 겨우 눈을 뜨면서 ‘활동 지원사가 아팠으면, 내가 불러도 그가 잠에서 깨지 않아 나도 안 나갈 수 있다면’하고 기도한다. 하지만 기어이 마음을 다잡고 문밖으로 나온다.

이규식씨의 반평생은 아무것도 모른 채 갇혀 지낸 삶이었고, 나머지 반은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해온 삶이다. 두 시절의 차이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싸움을 멈출 수 없다. 이씨는 이제 중증 뇌병변 장애인으로서는 한국 사회 최초로 자신의 생애사를 책으로 펴낸 엄연한 작가다. 그는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를 통해 1969년 태어난 이래로 겪어왔던 경험을 생생한 언어로 묘사했다.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 책 표지. 이규식씨가 반려견 ‘두부‘를 안고 직접 개조한 휠체어에 타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후마니타스]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 책 표지. 이규식씨가 반려견 ‘두부‘를 안고 직접 개조한 휠체어에 타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후마니타스]

50년간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으로 살아오면서 장애인권사 변천을 모조리 겪어 온 그의 삶을 연대기 순으로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10대 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나한테 장애가 있는지 없는지, 장애는 또 뭔지. 보통 돌이 지나면 다른 아이들과 장애를 가진 아이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되니까 그때쯤 우리 부모님도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갔었다. 근데 그 당시엔 병원도 잘 몰랐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별다른 조치를 받지 못하고 그냥 집에만 있었다”

2남 4녀 중 둘째로 태어난 소년 이규식은 그렇게 10대를 집에서 지내야 했다. 동생들이 학교에 가고 형이 일하러 가도 그의 할 일은 붙박이 가구처럼 누워 TV를 보는 것이 전부였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학교를 보내주지 않은 부모님이 너무하다고 생각하지만, 먹고살기도 바쁜 시절이어서 부모님이 지레 포기한 것 같다고 짐작할 뿐이다.

성인이 된 이후 그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가족과 떨어져 시설에 거주하면서부터는 자유롭지 못한 채 갇혀 지내는 날들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똑같은 옷을 입은 똑같은 사람들과의 똑같은 대화는 그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이씨는 이때를 ‘삭제된 10년’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군대는 시간이 지나면 끝이라도 나지, 시설은 아예 나올 수가 없다. 부모님이 나오라고 하면 나오고 그게 아니면 평생을 거기서 지내야 한다”라며 시설 생활의 괴로움과 선택권조차 가질 수 없는 부당함을 토로했다.

노들야학에서 시작한 장애 운동 활동가의 삶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는 문턱에서 만난 노들 장애인 야간학교(이하 노들야학)는 이씨 삶의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 그곳에서 장차 장애 운동의 멘토가 될 박경석 교장을 만나 장애 운동가로서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와 생활 반경은 시설에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졌다. 쉬는 시간에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눴고, 포장마차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 밤을 꼴딱 새우고 수업을 들으러 가는 일도 생겼다.

“시설에 있으면 서로 언어장애가 심해서 재미없는 대화만 할 수밖에 없다. 또 갇혀 지내다 보니 사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그야말로 깡통이었다. 그랬던 저, 이규식이가 노들야학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됐으니 완전 땡잡은 거였다”

인터뷰를 진행한 혜화의 한 카페 앞에서 카메라를 바라보는 이규식씨. ⓒ투데이신문
인터뷰를 진행한 혜화의 한 카페 앞에서 카메라를 바라보는 이규식씨. ⓒ투데이신문

그가 처음 ‘운동’을 하러 간 곳은 평택에 있는 청각장애인 시설 에바다복지회였다. 시설 장애인을 대상으로 무급 노동을 시키고 밥도 제대로 안 주거나 성추행을 하는 등의 비리와 폭력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노들야학도 집회에 참여하러 갔다. 그때는 운동이 뭔지 잘 몰랐던 이씨는 점차 많은 집회에 앞장서면서 ‘투모사(‘투쟁밖에 모르는 사람’의 준말)’라는 별명도 얻었다.

투모사로 변모한 데에는 혜화역 리프트 사고가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그가 친구의 공연을 보기 위해 대학로에 방문했던 1999년 6월, 혜화역 승강장으로 가는 휠체어 리프트에 탑승했다가 난간이 고장 나는 바람에 리프트 밖으로 고꾸라져 다치고 말았다.

해당 사건에 대해 노들야학은 대책위원회를 꾸려 지하철공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고, 이씨는 1년이 넘는 법정 공방 끝에 배상금으로 500만원을 받을 수 있었다. 승소 이후 혜화역에는 전국 최초로 양방향 엘리베이터가 설치됐고, 혜화역 2번 출구 바닥에는 그곳이 장애인 이동권 투쟁 현장임을 알리는 동판이 자리 잡게 됐다.

혜화역 2번 출구 장애인 ‘이동권 요구현장’ 동판 앞에서 결의에 찬 표정을 짓는 이규식씨. ⓒ투데이신문
혜화역 2번 출구 장애인 ‘이동권 요구현장’ 동판 앞에서 결의에 찬 표정을 짓는 이규식씨. ⓒ투데이신문

아버지의 사과로 보답받은 청춘

이씨의 인생은 40대에 접어들고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2011년 6월 ‘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이하 이음센터)’의 초대 소장이 되면서 배운 적 없는 행정 업무와 사무 처리, 공무원들과의 비즈니스 회의까지 도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때를 회상하며 “이 일은 어떻게 하는 거라고 알려주는 사람도 없고 책임질 것도 많아서 무척 버거웠다”라고 소회를 털어놓았다.

일하랴 투쟁하랴 몸이 열 개여도 모자란 와중에도 이씨는 학교에 다니기로 결심했다. 아버지에게 ‘나도 사람답게 살 수 있다, 장애인인 당신 자식도 졸업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방송통신중학교와 경복고등학교를 6년간 다닌 후 드디어 졸업장을 딸 수 있었다.

이씨가 당당하게 내민 졸업장을 본 그의 아버지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곤 한참이 지난 후 이씨에게 “나는 네가 태어났을 때부터 너를 짐승으로 취급했다. 그래서 공부시킬 생각은 아예 안 하고 그저 살아있기만 바랐다. 근데 졸업장을 보니까 내가 틀렸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너도 사람이었구나. 규식아, 미안했다”라며 뒤늦은 사과를 건넸다.

이씨에게 졸업장은 자신도 당당한 사회의 일원임을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징표가 됐다. 그는 이때를 회상하면 가슴이 뭉클해진다고 전했다.

이씨는 배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뒤늦게 고등학교를 마친 후 그는 사회복지사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 머리 아픈 내용이 많을 것 같았는데 막상 강의를 듣다 보니 익숙한 단어가 들려왔다.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 <장애인활동지원에 관한 법률>,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 장애인자립생활센터. 전부 사람들에게 욕먹어 가며 자신과 동료들이 싸워서 만들어낸 법률과 제도였다.

장애인을 향한 사회의 차별과 멸시를 일평생 받아왔고, 이런 사회를 바꾸기 위해 반평생을 싸워온 끝에 얻어낸 차별금지법, 저상버스 의무화, 활동지원제도... 그러나 그에겐 아직 부족하다. 장애인이 감옥 같은 시설에서 나와 지역 사회의 구성원으로 당당히 살아가려면 정부가 약속했던 더욱 촘촘한 이동권과 탈시설 지원, 그리고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노동권과 교육권의 법제화 실현이 남아있다. 그래야 비장애인과 똑같은 출발선상에 겨우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이 시설에 고립돼 살지 않고 지역 사회로 나와서 비장애인과 어우러져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씨는 짧게 답했다.

“사람이니까. 장애인도 사람이니까”

우리 사회는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명제를 구조가 바라는 효율을 위해 비용의 문제로 처리하려 든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 17일 혜화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규식씨(왼쪽)와 그의 활동지원사 김형진씨(오른쪽).&nbsp;ⓒ투데이신문
지난 17일 혜화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규식씨(왼쪽)와 그의 활동지원사 김형진씨(오른쪽). ⓒ투데이신문

이씨가 속한 전장연의 요구사항을 단순히 ‘예산 증액’, ‘장애인콜택시 법정대수 100% 즉각 도입’과 같은 몇 글자의 단어로 곱씹어서는 그들이 왜 이런 주장을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장애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간접적으로 경험해 보고, 그들이 시민 사회의 떳떳한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해 보면 결국 하나의 목적으로 종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목적은 바로 ‘자유’다.

자유란 무엇인가. 언어적, 법률적, 철학적 정의에 따라 쓰임은 조금씩 달라지지만 한 개인이 자신보다 큰 구조에 의해 구속되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개인과 개인, 또는 집단과 집단의 이익이나 권리가 충돌하는 상황은 자유가 침해되는 상태와는 거리가 멀다. 자유를 ‘서로’ 침해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자유는 언제나 ‘일방향으로’ 침해된다. 서로를 향한 비난의 화살은 애꿎은 사람들만 다치게 할 뿐,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이씨는 지하철 탑승 시위에 눈살을 찌푸리는 시민들을 향해 “내가 경찰이랑 부딪히고 사람들한테 욕먹어가면서까지 싸워서 남는 건 벌금이랑 전과밖에 없다. 근데 그렇게 만들어진 저상버스랑 지하철 엘리베이터는 모든 사람들이 편하게 쓴다. 가끔은 너무 자기밖에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얄밉게도 느껴진다”라며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 사회에 바라는 것이 하나 있다는 이씨는 “왜 출퇴근길 막고 시위하냐고 비난하지 말고, 차라리 우리랑 같이 싸워주면 시위를 이렇게 길게 끌 필요도 없이 국회가 얼른 해결해 주지 않겠나”라는 말을 전했다. 민주국가에서 문제를 가장 빨리 처리하는 방법은 다름 아닌 연대라는, 너무나 쉬운 정답을 두고 우리는 오늘도 먼 길을 돌고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세상을 누비는 장애 운동가 이규식씨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세상에는 바꿔야 할 슬픔과 누려야 할 기쁨이 여전히 이씨를 기다리고 있다. 더욱 큰 세계를 향해 그의 휠체어는 오늘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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