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책짓는 아재]
[사진제공=책짓는 아재]

4세기 기독교를 대표하는 예언자 요한 크리소스토무스(크리소스톰)의 설교집을 읽었다. 본문은 〈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나사로(나자로)의 비유담이다.

나사로는 늘상 잔치가 열리던 어느 부잣집 대문 옆에서 구걸하며 살아간 걸인이다. 둘의 처지는 사후(死後)에 역전된다. 집주인인 부자는 죽어서 음부 곧 지옥으로 가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 곧 낙원으로 간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누가복음 16:25)

황금의 입 크리소스토무스

‘황금의 입’이라 불릴 정도로 탁월한 설교자인지라 가톨릭과 개신교 양 진영에서 그의 설교집을 출간하였다. 심지어 이 나사로의 비유을 다루는 설교집은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번역했다. 가톨릭 진영은 분도출판사에서 한국교부학연구회 주도로 출간하는 ‘그리스도교 신앙 원천 시리즈’의 6권으로 나왔고(하성수 역본), 개신교 진영은 규장출판사에서 영역본(Rich Man and Lazarus)을 중역해 내놓았다(조계광 역본).

하성수 역본(분도 판)은 충실한 해제가 장점이다. 개인적으로 존대어법으로 옮긴 게 마음에 든다. 조계광 역본(규장 판)은 비교적 잘 읽힌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절판돼 구하기가 어렵다. 분도 판에 수록된 일곱 편의 설교 가운데 다섯 번째 것은 누락돼 있지만, 바울과 욥, 아브라함 등을 다루기에 나자로와는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

두 권의 번역은 상당히 다르지만 논지 자체는 명확하고 어렵지 않다. 먼저 크리소스토무스는 부자의 나쁜 점과 빈자의 좋은 점을 논하지만, 가난 자체는 불행이고 두려운 것이라고 인정한다. 결국 그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물질적 행복이 아니라 영적인 행복이다. 또한 사후 영적인 세계에서의 운명을 통해 누가 참다운 부자이고, 진정한 빈자인 지를 규명한다. 그러므로 그는 물질적 부자를 정죄하기보다 풍족한 재산으로 사치하기보다 절제하며 살아가고 또한 그 재산으로 선행하고 구제하며 환대할 것을 권면한다.

부를 대하는 기독교의 태도들

나는 이 서평의 제목을 “부자와 종교”로 잡았다. 기독교를 주류 종교의 패러다임으로 삼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실상 기독교 안에서 재현되는 모든 양태가 다른 주요 종교 안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더불어 염두에 둘 사항은 현대 종교학에서 기독교나 불교 등 주요 종교를 단수로 취급하지 않고, 복수로 취급한다는 점이다. 기독교는 전혀 단일하지 않고, 기독교인들의 모습도 제각각이다(돈과 섹스, 권력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그러하다). 이는 다른 주요 종교 또한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가장 민감한 주제인 부에 대한 입장을 보라. 부를 믿음의 표지로 삼기도 하고, 가난을 경건의 표식으로 삼기도 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교회 공동체의 현실적 모습이 이를 보여주기도 한다. <고린도전서>에 등장하는 고린도 교회는 부자들끼리 친교하고, <야고보서>에 등장하는 교회 공동체는 부자들을 접대하고, 빈자들을 박대(薄待)한다. 그러나 바울과 야고보는 이런 작태를 비판하고, 특히 야고보는 빈자에 대한 전횡(專橫)이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가 된다고 경고한다. 반면 〈사도행전〉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는 온 교인들이 재산을 공유했고, 앞서 언급된 고린도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에 동참했다. 성경 안에서조차 이렇게 단일한 모습이 아닌데,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현실 교회는 어떻겠는가.

종교의 예언자적 순기능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기독교 내부의 예언자적이고 복음주의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크라소스토무스의 설교를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앞서 소개한 대로 크리소스토무스의 논지는 명확하다. 여기서 우리가 듣게 되는 크리소스토무스의 목소리는 예언자적이다. 예언자는 땅을 향해 하늘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사람, 더 정확히는 강력하게 선포하는 사람이다. 이는 그의 설교가 지향하는 영성이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차원까지 포괄한다는 뜻이다.

혹자는 이러한 영성을 일컬어 사회적 영성이라고 명명하는데, 영성의 토대가 개인적(인 차원의 변혁)이라고 믿는 나로서는 다소 거리를 두게 된다. 진보의 많은 문제가 바로 이런 개인적 영성의 부재로 인해 발생한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종교의 예언자적 순기능을 잘 보여주는 영화로 〈로메로〉와 〈1987〉을 들고 싶다. 〈로메로〉는 경건하고 학구적인 성직자 로메로 신부가 예언자로 거듭나고 마침내 순교자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순수한 신앙인이 정치에 눈을 뜨자마자 목숨을 걸고 시민들과 함께 투쟁의 자리에 나선다. 〈1987〉은 1987년 당시 어느 대학생의 물고문 중 발생한 죽음의 진상(질식사)을 공개하기 위해 개신교, 가톨릭, 불교 주요 종교의 인사들이 힘을 합치는 점이 인상적인 영화다. 이 두 편은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그들의 출발점은 모두 종교적 헌신과 경건한 영성이다.

다시 우리가 다루던 책과 그 저자로 돌아가자. 크리소스토무스는 대단히 경건한 영성가이다. 하지만 그의 경건한 영성을 반영한 복음주의적 설교는 사회적 변혁을 독려하는 예언자적 설교로 확장된다. 내면의 개혁을 넘어서 사회의 변혁으로 나아가는 것은 영성의 올바른 방향이다.

특히 그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돈과 부의 문제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앞서 말한 대로 그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물질적 행복이 아니라 영적인 행복이다. “진짜 부자는 많은 재물을 모은 사람이 아니라 많은 재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며, 진짜 가난한 이는 재물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탐욕이 많은 사람입니다.”(《라자로에 관한 강해》, 71쪽) 이렇게 영적인 관점에 기반해서 그는 부와 사치, 탐욕에 대해 예언자의 음성을 발한다.

<strong>바벨 도서관의 사서</strong><br>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br>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br>나 역시 마찬가지다.<br>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br>
바벨 도서관의 사서
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
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이처럼 우리의 재산은 다른 이들의 것이니 아껴 씁시다. 그럴 때 그 재산은 우리의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다른 이들의 재산을 아껴 쓰는 것입니까? 필요 이상으로 재물을 낭비하지 않고 우리 자신의 필요만을 위해 소비하지 않으며, 가난한 이들의 손에 똑같은 몫을 주는 것입니다.”(《라자로에 관한 강해》, 89쪽)

나는 크리소스톰의 설교가 무조건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올바른 종교인이 부를 대하는 모범적인 자세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나누고 싶었을 뿐이다. 비록 1,600여 년 전에 선포된 설교이지만, 그 안에서 흘러넘치는 크리소스톰의 맑은 영성은 그저 옛날 사람으로 취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로 우리 시대에 부합하는 참다운 예언자로 대하게 해준다. 신앙과 무관하게 누구라도 그의 설교집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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