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여의도성모병원 소화기내과 전문의 서연주

지난해 11월 낙마 사고로 왼쪽 눈 잃어
근무 중인 병원에 환자로 수술 후 입원
올 2월 전문의 복귀…가족 등 응원 이어져
자신의 이야기 담긴 유튜브 운영하기도
“현재에 집중하고 도전적인 삶 이어갈 것”

여의도성모병원 소화기내과 전문의 서연주씨. ⓒ투데이신문
여의도성모병원 소화기내과 전문의 서연주씨.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박효령 기자】 2022년 11월 6일. 누군가에게는 아주 평범한 11월의 어느 주말이었다. 그러나 서연주(34)씨에게는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날이었다.

평소 활동적인 취미를 즐기던 연주씨는 이날 오랜만에 승마장에 방문했다. 승마 초보였던 그에게는 가장 순한 말이 배정됐다. 말에게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얼굴을 쓰다듬고는 그는 덥석 말에 올라탔다. 하지만 그 순간이 사고 전 연주씨의 마지막 기억이 됐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떴을 때 연주씨의 앞에는 익숙한 가족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는 그의 이름을 연신 불렀고, 잘 보이지 않는 시야로 주변을 둘러보니 자신이 누워있는 곳은 응급실이었다. 그때서야 자신에게 큰일이 찾아왔음을 직감했다.

그에게 들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은 얼굴 전체가 골절됐는데 그중 왼쪽 안구가 심하게 파열돼 실명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시점부로 그는 의사에서 환자가 됐다. 자신이 일하던 병원에 의사가 아닌 환자로서 입원했다. 

그의 나이 불과 34살.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의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할 정도로 수재였던 연주씨는 급작스럽게 찾아온 사고로 완전히 뒤바뀐 삶을 마주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담담히 제 상처를 인정하고 어루만졌다. 특유의 긍정적인 성격으로 위기를 극복해 냈고 한 걸음씩 다시 사회에 발을 내디뎠다. 이에 그는 현재의 자신을,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다.

마치 윙크를 하고 있는 것 같아 친구가 붙여준 ‘윙크의사’라는 별명답게 그는 오늘도 밝게 웃으며 나아가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사고 경험을 살려 환자에게 보다 더 공감할 수 있는 의사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이에 본보는 인생의 큰 시련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나아가는, 또 그 희망을 환자들에게 베풀고 싶어 하는 서연주 의사를 직접 만나봤다.

사고 전 연주씨가 촬영한 프로필 사진. [사진제공=본인]
사고 전 연주씨가 촬영한 프로필 사진. [사진제공=본인]

# 인간 서연주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린다.

안녕하세요. 저는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내과 전문의, 소화기내과 분과에서 일하고 있는 34살 서연주라고 합니다.

Q. 말하기 힘들겠지만, 낙마 사고 당시를 설명해 줄 수 있나.

지난해 11월 하루 걸러 하루 당직을 하는 등 일과의 전부를 병원에서 생활하다 보니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지 못하면서 나의 삶을 찾고 싶은 욕구가 많이 들던 시기였어요. 그 방법으로 서핑, 승마 등 과격한 액티비티를 많이 했었죠. 그날도 병원에서 주말 행사가 있어 참석한 뒤, 마치자마자 강원도로 차를 몰고 갔어요. 그다음 아침에 승마체험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낙마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당시 승마장에 도착한 뒤 관리자분이 제가 초보니까 말 중에서 가장 착하고 순한 말을 배정해 줬고, 그 말이 너무 귀여워서 쓰다듬고 올라탄 것이 제 기억의 끝이에요.

그다음은 전혀 어떻게 됐는지 몰랐어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눈을 떠보니 아버지가 앞에서 와서 제 이름을 부르고 있었죠. 힘겹게 주변을 둘러보니 저는 원주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 있었고 정신은 몽롱한데 온몸은 피투성이었어요. 그때서야 큰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실감했죠.

저희 부모님은 제가 강원도에 가 있는지도 모른 채 사고가 났다는 전화를 받고 서울에서 강원도까지 달려오셨어요. 병원 측에서 상태가 안 좋다고 얘기하자, 아버지가 연고지도 서울이고 강원도에서 계속 치료를 이어갈 수 없으니 제가 일하는 병원으로 가보자고 제안하셨고, 저는 제가 근무 중인 성모병원으로 이송됐습니다.

구급차를 타고 이동할 때는 무언가 생각할 겨를도 없었어요. 전 너무나도 아팠고 정신이 몽롱했어요. 다만 제 옆에서 어머니가 긴장하고 또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제 손을 꼭 잡고 있었다는 것만 생생히 기억나요. 그렇게 성모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제 동기 전문의 언니가 울면서 저를 맞이했고, 이후 정신없이 여러 검사를 받았어요. 그리고 응급수술을 받았습니다.

Q. 당시 충격이 말로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한쪽 눈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심경이 어땠나.

맨 처음에는 왼쪽 얼굴을 다쳤다는 건 알겠는데 너무 피가 많이 나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는 모두가 인지하지 못했어요. 성모병원으로 이송된 후, 약 2시간 반정도의 응급 수술을 받았어요.

당시 의사 선생님은 제 왼쪽 안구가 파열됐고, 그것이 안으로 밀려서 거의 뇌 앞까지 와 있었다고 했습니다. 특히 밖에서 다쳐 찢어졌기 때문에 상처에 세균이나 곰팡이 등이 감염될 위험이 굉장히 높은 상태였습니다. 만약 감염 정도가 심하면 오른쪽 눈마저 높은 확률로 실망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응급수술은 터진 안구를 잘 봉합하는 것과 그 주변을 최대한 깨끗이 씻어내는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수술을 마치고 교수님께서 조심스럽게 저희 부모님에게 왼쪽 눈이 실명했다고, 만일 수술 후 감염이 생기면 오른쪽 눈도 실명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해줬다고 해요. 마취에서 깨 이 소식을 들으니, 눈앞이 캄캄하고 충격으로 잠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차차 안정되고 나서는 이제 와서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점차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첫 번째는 안구 이식을 받을 수 있는가, 두 번째는 내시경 등 의사 업무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세 번째는 얼굴 형태가 어느 정도 유지가 되는가. 이 세 가지 생각이 차례대로 들었죠.

하지만 안구 이식은 불가능했고 얼굴에 상처가 남을 것이라는 말도 들었죠. 당시 너무 속상하긴 했지만 스스로 ‘내가 그냥 30대 결혼 적령기의 여성이어서 그렇지 시간이 지나면 잘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 시기를 견뎌 냈던 것 같아요.

다행히도 제 주 업무 중 하나인 내시경은 2D 화면이기 때문에 한쪽 눈으로 본다면, 보는 감이 좀 떨어질 순 있지만 그외 이상은 없어 회복만 잘하면 가능하다는 말도 들었죠. 

Q. 가족, 친구, 동료 등 주변인들의 슬픔도 너무 컸을 것 같다.

정말 고맙게도 가족들이 저에게 힘든 모습을 보일 수도 있었을 텐데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되게 단단한 기둥처럼 옆에서 저의 보호자 역할을 해줬습니다.

제 동생이 저를 엄청 자랑스러워했는데 그런 언니가 실명됐다는 이야기를 듣자, 동생이 자신은 컴퓨터만 하는 사무직이기 때문에 두 눈 다 필요 없다고, 언니는 잘하는 게 많으니 눈을 빼주겠다고 울면서 말했다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이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또한 제 진짜 주변에 있었던 저희 동기들이나 저희 교수님들, 같이 근무했던 선·후배들이 저를 되게 많이 걱정을 해줬어요. 또 병원이라는 업무 특성상 한 사람이 빠지면 일이 엄청 늘고 누군가가 저의 업무를 대신해줘야 했어요.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되기 때문에 되게 싫을 수 있음에도, 그동안 동료들은 묵묵히 일을 대신해주는 건 물론 제가 부담이나 미안함을 느끼지 않게 매일 병문안을 와줬어요. 명절에는 김밥이나 유부초밥 같은 것을 싸서 주는 등 엄청 챙겨주고요. 교수님들 또한 온 마음 다해 위로해 주셨고요. 이로 인해서 제가 잘 이겨낼 수 있었고, 자신감을 많이 불어넣어 주셔서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Q. 사고 이후 주변인들에게 알려야 했을 텐데, 당시 어떤 심경과 자세로 임했나.

제가 모임도 좋아하고 바쁘게 살아서 알릴 분들이 많았어요. 당장 당일에도 약속이 있어서 지인들에게 알려야 했죠. 처음엔 엄청 조심스러웠어요. 너무 큰일이고 비극적이다 보니, 상대방한테 무거운 감정들이 전달되는 게 굉장히 죄송스럽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담담하게 전달하는 법을 택했어요. 담담하게 사실을 전하면서도 잘 이겨내고 있다고 먼저 말했죠.

그 외 연락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SNS를 통해서 글을 올려서 사고 사실을 알렸어요. 이렇게 담담하게 말하는 것이 제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는 방법이기도 했고 보다 잘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숨기거나 투정 부리는 건 저한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죠.

Q. 많은 치료와 회복을 거친 후, 본업인 의사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불편함과 어려움은 없었나.

건강을 한 번 잃고 나니 회복하는 게 되게 어렵더라고요. 사고 후 약 한 달 동안 병원 생활을 했는데,  제 시간이 통째로 날아간 것 같았죠. 하지만 나름 꿋꿋하게 잘 버티고 있었는데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나왔던 시기가 있었어요. 바로 첫 번째 퇴원할 때였는데, ‘퇴원’이라 하면 다들 기쁘고 해방이라고 여기잖아요. 저는 병원이라는 안정적인 환경에서 보호를 받던 시기가 지나, 한쪽 눈이 안 보이고 붕대로 칭칭 감은 상태인 제가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너무 무서웠어요. 나가면 넘어야 할 산이 투성이었거든요.

퇴원하고 나서 한 달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눈에서 고름이 나왔어요. 우려했던 감염이 생긴 거였고, 저는 다시 입원을 하게 됐어요. 절망적이었죠. 저에게 닥친 문제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해결해 나갈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온 몸을 잠식했어요. 다행히도 감염 문제는 치료됐지만, 사실 완전한 해결은 아직 아니에요. 또 병원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체력도 너무 약해졌죠.

가장 힘들었던 건, 세상은 그대로인데 저만 달라진 거였어요. 신체적인 한계를 지닌 모습으로 기존에 내가 했던 생활을 다시 해야 하는데, 정작 세상은 평화롭게 보일 정도로 똑같았죠. 이로 인한 고립감과 공허함 그리고 두려움이 저를 괴롭혔어요. 전 모든 게 다시 처음이 된 셈이잖아요. 지금도 저에게는 눈 하나로 맞이하는 첫 번째 여름이 다가오고 있잖아요.

하지만 혼자 끙끙 앓는 것보다 발상을 전환하기로 했어요. 일부러 세상 밖으로 많이 나섰어요. 또 생각해 보면 제가 의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고, 한쪽 눈만 다쳐서 다른 쪽 눈은 보이잖아요. 그리고 주변에 좋은 동료, 교수님들도 계셔서 저의 복귀를 응원하고 도와줬어요. 덕분에 극복해 냈고 다시 의사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됐어요. 이 모든 게 너무나도 다행이고 감사한 사실이죠.

연주씨의 명찰과 의사 가운. ⓒ투데이신문
연주씨의 명찰과 의사 가운. ⓒ투데이신문

# 의사 서연주

Q. 의사가 된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저는 대한민국의 소위 영재 교육을 받았어요. 한국과학기술원 부설 한국과학영재학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그리고 카이스트로 진학했습니다. 이 덕에 저는 자연스럽게 과학자라는 꿈을 꾸게 됐죠. 그러던 지난 2011년 카이스트에서 네 명의 학생들과 한 명의 교수님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일어났어요. 그 학생들 중 한 친구가 제 고등학교 후배이자, 대학교 동아리 후배였어요. 되게 가까운 사이였음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힘들고 위험한 상황인지 전혀 인지하지 못했어요. 당시 저는 큰 충격을 먹고 ‘내 주변이 목숨을 끊는 것조차도 알지 못한 채로 사는 삶이 과연 의미가 있는 삶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에 진로를 바꾸기로 결심했죠.

그때 의학전문대학원 준비를 해서 진학을 하게 됐는데, 목표는 단 하나였어요. 사람들한테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것. 이 목표에 의사라는 직군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고요. 특히 실습 때 보니, 내과에 오시는 환자 대부분은 육체적인 질병으로 인해서 마음에 문제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지도 못하는 상태로 힘겹게 살아가거나, 안다 해도 본인을 포함한 가족 전체의 일상이 붕괴되는 등 고통 속에서 살아가더라고요. 고령이나 중증 환자들도 많고요. 저는 이런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의료인의 길을 걸어오고 있습니다.

Q. 장애를 갖게 된 후의 선생님을 처음으로 접한 환자들의 반응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사고 이후, 일을 도우러 내시경실에 있다가 6월 셋째 주 금요일이 사고 이후 첫 외래였어요. 외래를 시작하기 전 환자분들이 내 눈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까라는 걱정도 들었는데, 오히려 같은 상처를 안은 친구를 만나 마음이 너무 안정이 된다는 말을 듣기도 했고, 아무도 저를 이상하게 본다거나, 선생님을 바꿔달라고 하지 않더라고요. 너무 안도했죠.

그래서 오히려 제가 눈이 하나가 됐다고 검사를 소홀히 하거나 원래 이 환자분들 받아야 될 만큼의 충분한 퀄리티에 검사를 하지 못한다면, 나의 존재 자체, 사회적인 기능에도 문제가 생기는 거라고 생각을 해서 사고 이후 더 많은 책임감을 느끼면서 검사를 수행하고 꼼꼼히 업무를 보고 있습니다.

Q. 의사로서와 일반 사람이 가진 장애인에 대한 편견은 무엇이 있다고 보는지.

의사는 직장이 병원이기 때문에 몸이 불편한 사람을 너무 많이 보고, 장애를 지닌 사람이 대수롭지 않게 느끼게 되죠. 사실 장애라는 게 너무 힘들고 위축되고 불안함과 두려움에 평생 시달려야 하는 거잖아요. 하지만 의사는 아픈 사람들도, 심지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도 일상적으로 보다 보니 편견보다는 무뎌지게 되죠. 사실 먼저 나서서 많은 시간 환자를 돌봐주면 좋은데, 바쁘게 일을 해야 의료 행위를 지속할 수 있다 보니 의사와 환자 간의 감정적인 고립이 생기는 것 같아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은 대다수가 경험해 보지 못한 아픔이기 때문에 일부는 ‘나보다 못한 존재’라고 여기는 것 같아요. 아직 우리나라 시민사회에서는 소수인 장애인들을 ‘진짜’ 배려하는 법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아요.

사고 후 수술을 받고 회복하는 중인 연주씨의 모습. [사진제공=본인]
사고 후 수술을 받고 회복하는 중인 연주씨의 모습. [사진제공=본인]

# 장애인 서연주

Q. 비장애인과 장애인으로서 둘 다의 삶을 살고 있는데, 다들 큰 차이가 있다고들도 생각한다. 실제 삶이 어떻게 바뀌었나.

보편적인 남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자체가 주는 고립감과 불안함,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신체적인 불편함은 있지만 과거와 큰 차이는 없어요. 사고 이후, 장애를 가진 친구들을 만나봤는데 다들 연애, 사회생활도 하고 자신의 미래도 계획하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저도 그럴 거고요. 정말 마음먹기 나름이고 또 사람들이 보기 나름인 거 같아요.

처음엔 받아들이기 어렵고 힘든 시기를 거쳤지만, 현재는 한쪽 눈으로 보는 것도 꽤 익숙해졌고 이전에 해오던 젊은의사협의체 등 단체 및 모임에 복귀했어요. 외모적인 부분에서도 현재 의안을 끼는 연습을 하고 있고, 이외에도 부수적인 기능들을 회복시키는 수술도 앞두고 있어요. 그러면서 저는 미래에 대해 ‘과연 나는 어떤 일을 하면서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될 것이냐’라는 고민도 하고 있고요.

Q. 장애인이 돼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을 거 같다.

네, 있어요. 장애 자체가 불편한 게 아니라 제가 장애인으로 사회에 나서는 과정이 너무 불편했어요. 먼저 장애인 등록 절차도 너무 복잡했는데, 중증 장애인분들은 더 힘들고 불편하실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또한 우리나라는 지난 2019년부터 장애인을 나눠 ‘경증 장애인’, ‘중증 장애인’ 등으로 등록하도록 했는데, 저는 이 명칭 자체가 불편했어요. 개인도 아닌 국가가 주관적인 기준으로 장애를 가진 모두를 심하다 혹은 심하지 않다고 평가하는 자체가 충격적이었죠.

충분히 정말 작은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장애인들이 국가를 믿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충분한 인프라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고 인식 개선도 많이 필요하다고 느꼈죠.

Q. 사고 후, 삶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뒤바뀌었을 것 같다.

한번 크게 다치고 나니까 보이는 게 많이 달라졌어요. 먼저 예전에 아등바등하던 삶과 나의 성과, 위치, 외모 등에 너무 신경을 쓰던 삶이 불필요하다고 느꼈어요. 지금 저에게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내 삶의 의미 그리고 내가 남들한테 나눌 수 있는 메시지들이 더 큰 만족감과 행복감을 주고 있어요. 진정한 행복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됐죠.

다만 아직 불안감은 잔재해요. 제가 앞으로 무엇을 할지,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걱정되고 의안을 끼거나 남은 수술을 받는 등 아직 넘어가야 할 산들이 많이 남았죠. 하지만 여기서 오는 불안감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모든 인간들이 갖고 있는 부분인 것 같아요. 그 불안감에 매몰돼서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행복하게 보내는 그런 삶의 태도가 중요하다고 봐요.

사실 저는 정말 죽을 수도 있었잖아요. 보통 낙마 사고가 발생하면, 척추뼈가 부러지거나 허리뼈가 부러져서 최소 마비되는 사례가 많은데 저는 다행히 뇌도 안 다치고 안구 한쪽도 남아있어서 앞을 볼 수 있잖아요.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내가 겪은 경험들을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의미 있게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다는 것 자체가 저한테는 감사한 일인 것 같아요.

Q.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고들 한다. 현재 장애인들이 겪고 있는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특히 국가적 지원과 인식 등이 최하위라고들 표현하는데 이 부분은 어떻게 개선되고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장애인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구가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시민들이 장애를 지닌 분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고 어떤 불편함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알아야 사소한 배려부터 사회 전반적인 복지 체계나 지원이 바뀔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해요.

이러한 창구를 시민단체, 민간인뿐만이 아니라 정부에서도 마련해 줬으면 좋겠어요. 장애인들은 자신의 몸이 불편해지고 고립되고 소외되다 보면 사람이 폭력적이고 공격적으로 변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누군가가 도움을 준다고 해도 뿌리치는 일이 생기기도 하죠. 결국 마음의 문이 열려야 해결되는 문제인 것 같아요. 장애인들이 사회에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을 만큼 진정성 있는 대화나 방식의 소통이 필요한 시점이에요.

Q.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도 있음에도 다들 장애인을 시혜적, 포용적 존재로만 여긴다. 특히 장애인의 자립은 드문 일처럼 여기는데.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일상적인 기능을 하는 건 진짜 중요한 것 같아요. 최소한의 인간의 존엄은 지킬 수 있을 만큼은 당연히 국가가 보조를 해줄 수 있는 시스템이 있어야 해요. 즉, 정부가 일정 부분 보조를 통해 시작점을 같이 맞춰주고 개인이 조금씩 한 단계씩 나아갈 수 있게 동기를 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하는 거죠. 더 나아가서는 더 큰 장벽이 발생하지 않도록 관련 시스템을 만들어주는 게 중요하고요. 

요즘 ‘공정’이라는 단어가 되게 이슈가 많은데, 저는 모두가 똑같이 생활하게 하는 걸 공정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기회의 공정, 기회의 평등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봐요. 일단 장애인들이 불편함을 극복하고 기본적인 역할은 할 수 있는 정도는 국가가 보조를 해줘야 되겠지만, 평생 단순하게 먹고살 만큼만의 돈을 지원하거나 관련 시설에서 평생 살아가게 만드는 제도 등은 옳은 해답은 아닌 것 같아요. 스스로 역량을 가지고 발전해 나가는 것 자체가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잖아요. 일률적인 제도보다는 개인의 성장을 촉진할 수 있고 용기를 북돋아줄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이 더 장애인들을 주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고 그런 움직임이 자립으로까지 이어질 것으로 봐요.

사고 전 연주씨가 등산하며 밝게 웃고 있다. [사진제공=본인]
사고 전 연주씨가 등산하며 밝게 웃고 있다. [사진제공=본인]

# 행복전도사 서연주

Q. 현재 유튜브를 운영하고 있다. 유튜브를 통해 얼굴과 사연 등을 공개하게 된 계기는. 

사고 전부터 유튜브를 개설하고 운영했었어요. 저를 포함해 주변에 의사로서 환자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환자에게 조금 더 나은 치료를 하기 위해 고민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의 환자와 의사 관계가 많이 망가졌다는 것을 느꼈어요. 이 부분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느꼈고, 의사도 남들과 똑같이 고민하고 좌절을 겪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게 됐죠.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낙마 사고가 발생했어요.

사고 직후, 같이 유튜브를 운영하는 친구가 몸을 챙기는 게 우선이지 유튜브는 안 해도 된다며 말렸어요. 그런데 제가 먼저 유튜브는 그래도 유지할 거라고 답했죠. 비통한 사고고 상실의 시간이었지만, 저는 이 시간들을 보다 가치 있게 쓰고 싶었어요. 그러려면 제 아픈 부분들까지 다 공개하고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제가 많은 위로를 받은 만큼 나누고 사고를 경험하면서 느꼈던, 그리고 그 이후에 체감했던 감정과 생각을 가감 없이 공개함으로 인해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또, 그 과정을 기록하는 것 자체가 제 치유에도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고 믿었죠.

Q. ‘윙크의사’라는 채널명이 눈에 띈다. 채널명을 이같이 지은 이유가 있나.

유튜브를 같이 운영하던 친구가 지어준 이름이에요. 제가 지금은 눈꺼풀이 떠지지만 처음에 다치고 나서는 눈이 안 떠질 정도로 많이 부은 상태였어요. 그 모습을 본 친구가 “365일 24시간 윙크하는 사람 같다”고 해줘서 ‘웡크의사’라고 별명을 붙여줬어요. 처음에는 다소 와닿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 이름이 저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고, 주변 분들도 마음에 들어 하셔서 좋은 이름인 것 같아요.

Q. 공개한 영상을 보면 삶의 의미를 찾는다고 하거나, 혼자 살기 등 도전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현재 젊은 친구들의 SNS를 보면 대부분 화려하고 좋은 모습들만 올리고, 그런 것들을 자신의 상황과 비교해 스스로한테 상처를 주고 삶을 고독하게 만들잖아요. 이런 모습에 회의감을 느낀 저는 다소 안 좋거나 고민하는 모습 아니면 내 삶의 의미를 찾아나가는 과정 자체를 그냥 올려보자 해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새로운 것을 계속 도전하는 모습은 저의 근본적인 특성인 것 같아요. 저는 호기심이 많고 도전 의식도 강한 열정적인 사람이에요. 그런데 장애를 안고 있다고 해도 자신을 잃지 않고 계속 도전하며 나아가는 모습을 기록하는 것이 제 스스로에게도 도움이 되고, 보는 사람들에게도 응원의 메시지를 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런 콘텐츠를 자주 촬영했어요.

Q. 밝고 긍정적인 모습이 인상적이다. 원동력은 무엇인지.

뭔가 하고 싶은 일들이 계속 있다는 것,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목표가 있다는 것이 저에게 큰 원동력이 돼요. 완전히 다쳐서 병원에 누워서만 생활해 왔던 시기를 지나 회복해 퇴원을 했고, 퇴원해서 하루종일 집에서 누워만 지냈다가 조금씩 움직이기도 해 집 앞까지 나가보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서는 지하철을 타고 외출도 했잖아요. 흘러가는 시간에 마냥 머무르는 것보다 좌절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도전해 나가는 것이 저에게 가장 중요해요.

또한 유튜브 댓글로 인해서 많은 용기를 얻고 있어요. 불특정 다수에게 저의 모습이 노출이 되지만 그로 인해 불특정 다수에게 힘을 얻고 나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죠. 서로 힘이, 위로가 돼주는 소통이 되게 따뜻하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사고 후 촬영한 프로필 사진. [사진제공=본인]
사고 후 촬영한 프로필 사진. [사진제공=본인]

Q. 현재에도 불의의 사고로 아프고 힘든 이들이 많다.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

제가 해드리고 싶은 말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아프고 힘든 일이 생긴 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특히 본인과 가족의 잘못은 전혀 아니란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누구에게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자책하면 안 된다는 걸요. 의사로 생활하면서 환자나 그 가족들 중에서 “그러지 않았으면 좋았을걸”이라는 말과 탓을 정말 많이 하시는데, 이 두 말은 사람을 지옥으로도 끌고 갈 수 있어요.

두 번째는 이 또한 지나간다는 것. 당장 너무 힘들고 충격적이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순간들이지만 결국에는 시간의 힘이 있으니 점점 좋아질 거고 혹은 좋아지지 않더라도 스스로의 마음이 달라졌거나 대하는 태도가 조금 더 단단해져 있을 수 있을 거예요.

Q. 앞으로 의사로서, 그리고 인간 서연주로서 목표는 무엇인가.

일단 의사로서는 초심을 잃지 않고, 환자 입장을 경험해 본 만큼 의사로서 마주하는 환자들의 입장을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그리고 그런 노력을 하는 의사가 되고 싶어요. 또, 제가 특이한 경험을 했잖아요. 일하는 병원에서 환자로도 의사로도 두 가지의 대립되는 정체성을 모두 갖고 있었던 사람으로서, 깨달았던 많은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고 이를 의사와 환자의 관계, 고충들을 조금 더 매끄럽게 해결할 수 있는 의사가 되고 싶어요.

인간으로서의 목표는 제 스스로 너무 지치지 않고 삶의 의미를 찾아 나가는 것 그리고 어떤 장애나 상실에 좌절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어요.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제가 심하지 않은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 정말 중증 장애인의 마음을 전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리고 입장을 대변할 수 있을까 하고 걱정이 많이 됐어요. 이번 인터뷰로 인해 장애가 있으신 분들이 상처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용기 낸 만큼 제 말이 조금이라도 나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밑거름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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