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기업인 출신 역사연구가 황대용 작가 10여년 노력 결실
◈ 한국 외에도 중국, 일본 역사서까지 두루 공부...오류 교차검증
◈ 공대 출신다운 꼼꼼한 검증정신, 개인 시간 들여 역사 공부 매진
◈ 아마추어가 일으킨 파장...학계 인사들과의 논쟁과 협업 기다려

황대용 작가는 부산대학교 공대를 나와 옛 현대전자 등에서 근무했다. [사진제공=본인] 
황대용 작가는 부산대학교 공대를 나와 옛 현대전자 등에서 근무했다. [사진제공=본인] 

【투데이신문 임혜현 기자】취미에 공을 들이는 사람에게는 독특한 멋이 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돈이나 명예 같은 세속적 결과가 보장되는 것도 아닌데 삶의 상당 부분을 바치는 열정에서 나오는 멋인 셈이다.  본인은 겸손하게 이야기하지만, 취미의 경계를 넘어 ‘제2의 업’의 경지까지 승화시키는 이들도 있다. 역사연구가인 황대용 작가가 그런 경우에 속한다. 황 작가는 ‘삼국기년의 변조구조와 실제시대’를 쓰면서 우리 역사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고구려는 기원전(BC) 37년이 아니라 서기(AD) 32년에 건국됐고, 백제는 기원전 18년이 아니라 서기 51년에, 신라는 기원전 57년이 아니라 서기 76년에 건국됐다. 사실, 삼국의 왕계에서 이러한 인위적인 변형은 ‘삼국사기’가 편찬되기 이전에 이미 완성돼 있었고, 김부식도 이를 알지 못했다”는 폭발력 강한 연구성과를 정리해 책으로 펴낸 것.

사실, 삼국시대 초기는 기록상 모순이 많아 수수께끼의 시대로 남아있다. 바로 이렇게 뭔가 엉켜있는 점을 명쾌히 정리하는 새 역사 기년(연도를 계산하는 기준 혹은 그 방법)을 내놓고 왜 그렇게 바로잡아야 하는지도 증명한 것이 황 작가의 책이다. 그 자체로도 파격적인데, 이런 성취를 평생 학계에 몸담아온 인사도 아닌 순전히 개인적 흥미로 연구해 온 인물이 이뤄냈다는 점이 더욱 관심을 모은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결과물에 겸양을 잃지 않는다. 독특한 멋과 매력을 뿜는 황 작가의 역사 연구 여정을 들어봤다.

김부식조차 ‘알면서도 알지 못했던’ 기년 조작 내막

Q. 옛 현대전자(오늘날의 SK하이닉스) 등 기업체에 근무했는데, 어떤 계기로 역사 연구에 빠져들었나.

1957년생으로 2021년 퇴직하기 전까지 국내기업과 그와 관련된 일본이나 중국의 현지기업에서 줄곧 직장생활을 했다. 역사 전공이 아닌 공과대학 출신이긴 하지만 사실은 어릴 때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문제의 제기만 있을 뿐 영원히 해답을 구할 수 없을 것 같은 소위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10여 년 전쯤부터 ‘삼국사기’의 해당 부분을 직접 찾아보기 시작한 것이 계기라면 계기였던 것 같다. ‘일본서기’를 구입해서 정독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Q. 저서를 통해 일본인들은 자기 역사의 존엄성을 높이기 위해 실제보다 역사가 더 길어보이도록 ‘일본서기’의 기년을 조작했고, 우리나라 삼국시대 여러 역사책 편찬자들도 일본서기의 이런 오류를 알고 바로잡기 보다는 이를 방치하거나 활용해 우리 역사도 끌어올렸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그 근거는.

일각에서는 삼국사를 다룬 역사서들, 특히 ‘삼국사기’의 ‘기년의 오류’가 심각하다는 의문을 제기한다. 하지만 사실은 오류가 아니라 의도적인 변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시간축이 변형되기 이전의 고구려의 왕계는 ‘위지동이전’이나 ‘후한서’가 기록하는 고구려의 시간과 일치하고, 백제왕계는 ‘일본서기’와 ‘속일본기’가 기록하는 백제의 시간과 부합한다. 신라왕계도 ‘일본서기’가 기록하는 신라의 시간과 들어맞는다.

원래라면 현실의 시간에도 부합하고 중·일의 정사가 기록하는 내용에도 부합하던 삼국의 왕계보가 지금의 모습으로 변형되면서, 시간은 시간대로 비현실적이 되고 중·일의 정사와도 정합성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서로 입체적으로 정합하면서 현실의 시간으로 동시에 복원되는 ‘모든 비현실적인 시간’이 단순히 여러 오류들의 우연한 집합체일 수는 없는 일이다. 의도가 개입돼 있는 인위적인 변형이다.

 Q. 고려시대에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는 그동안 기년 논란에도 불구하고 가장 권위있는 역사서로 평가돼 왔는데, 삼국사기조차 이런 문제점에 노출돼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삼국의 왕계에서 앞서 설명한 인위적인 변형은 ‘삼국사기’가 편찬되기 이전에 이미 완성돼 있었고, 김부식도 이를 알지 못했다. ‘삼국사기’의 태조왕 94년조에는 우리의 기록인 ‘해동고기’와 중국의 기록인 ‘후한서’가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 부분을 일일이 적시하면서도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내용의 주석이 있다. 결국, 김부식으로서는 중국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의 기록인 ‘해동고기’의 기년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 김부식이 가졌던 관점과 정보량을 그대로 유지하는 한, ‘해동고기’와 ‘후한서‘가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영원히 알 수 없게 된다.

 Q. 일본 측이 자기들의 기록 속에서 우리 쪽이나 일본 역사를 조작한 예를 몇 가지 들어본다면.

‘일본서기’의 기록에는 많은 왜곡과 과장이 포함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공기(神功紀)와 그로부터 이어지는 응신기(應神紀)에는 적지 않은 백제왕들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삼국사기와 대조해볼 때 그 백제왕들은 일본서기가 기록하고 있는 시간보다 정확히 120년 후대에 실제로 재위하던 왕들로 확인가능하다.

말하자면 ‘일본서기’는 신공기와 응신기에 해당하는 실제시대를 묘사하면서 그 기록의 시간을 실제로부터 120년 인상하고 있다. 실제로 일본서기가 신공 46년에 처음으로 등장시킨 근초고왕을 초고왕이라 호칭한 것도, (단순히 두 유사한 이름의 혼용이 아니라) 신공 46년에 해당하는 기록상의 시점에 실제로 초고왕이 재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활용해(끼워맞춰) 변조가 가져오는 불가피한 혼선을 최대한 적당히 매듭지은 것이다.

또 ‘일본서기’에서 무내숙녜라는 인물은 신공기를 거쳐 응신기까지 장수하는 전설적인 인물로 묘사돼 있다. 하지만 무내숙녜나 오백성입언이 태어난 경행 초기로부터 그들의 손녀가 응신이나 인덕의 비가 되기까지는 3대가 생존하는 평범한 시간에 불과하다. 책에서도 자세히 밝힌 것처럼, 무내숙녜의 수명이 전설적으로 길게 보이는 것은 순전히 기년 변조의 반사효과다. 

삼국기년의 변조구조와 실제시대 표지 [사진제공=시화음]
삼국기년의 변조구조와 실제시대 표지 [사진제공=시화음]

Q. 대단히 방대한 자료 검증, 엄청난 물리량의 계산 및 검증이 필요한 작업이 뒷받침됐을 것 같다. 과연 개인이 이 같은 문제를 정량적으로 입증해 내는 게 어떻게 가능했나.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삼국의 시간을 실제의 시대로 재구성하거나 ‘일본서기’의 변조된 시간과의 관계를 식별하는 일은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일이다. 새로운 작업이었던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나의 작업은,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에 기록돼 있는 시간이 비록 변형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아무렇게나 변형된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히려 두 사서의 시간 모두 현실의 시간으로부터 ‘특정구간에서 입체적이고 정교하게 변조돼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행운’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 같다.  

국내외 자료 두루 섭렵해 결실...학계 전문가들과의 치열한 토론 기다려 

 Q. 겸손하게 표현했지만 대단한 자료 검증과 집중력, 시간과 비용 등의 지출이 수반되는 작업이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 취미로 시작한 작업을 지난 10여년 간 지속해 이런 발견까지 일궈내는 과정은 어땠나.

적잖은 시간을 들여 공부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문헌사료에 집중했기 때문에, 답사 등 작업은 생각만큼 많이 필요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 직접적인 교과서는 ‘삼국사기’ 외에도 삼국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중국의 여러 정사와, ‘일본서기’나 ‘속일본기’ 등 일본의 정사였다.

그러나 이들 정사는 원문과 현대어 번역본은 물론, 역주와 해설서도 국내와 일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특히 일본에는 역사에 관한 간행물이 다양하고 풍부해서 개인적으로 많은 도움이 됐다. 더욱이 자료 욕심과 연구 시간 투자에 내 개인사를 상당 부분 할애했지만 가족들이 항상 지지하고 이해해 주려고 해서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Q. 이번 연구 성과에서 삼국의 기년을 대폭 수정해야 한다고 했는데, 기존 강단사학 즉 학계 중심부와는 어떻게 논의를 펼쳐갈 의향을 갖고 있나.

정규 과정에서 역사학에 대해 훈련받은 적도 없고 학회에 가입, 소속돼 있는 것도 아니라 기존 학계와의 소통에는 기본적으로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제가 책에서 제시한 ‘병립하는 삼국왕계’나 ‘수정 삼국 연표’는 시간적으로는 내물왕이 사망하는 서기 402년까지의 모든 시간을 커버하고, 계보상으론 신라의 3성을 포함하는 삼국의 모든 계통을 포괄하는 것이어서 그 범위가 방대하다. 그러므로  그로부터 파생될 연구과제는 아마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나리라 짐작된다.

황대용 작가 [사진제공=본인]
황대용 작가 [사진제공=본인]

서두른다고 될 일은 아니나, 시간이 흘러 내 관점이나 주장에 공감하는 학자들이 나타나게 된다면 다행한 일이겠다.

 Q. 우리나라 역사 연구자들이 현재 간과하고 있거나 치중하지 않는 부분을 삼국 역사 분야의 재야 고수로서 짚어 준다면 어떤 것이 있겠나.

우리 고대사의 적지 않은 파편이 다행히도 중국이나 일본의 사서 속에 화석으로 기록돼 있다. 편견과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나 개방적으로 이러한 화석들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일본서기’는 삼국사기가 간행된 이래 한반도에서 너무 오랫동안 하나의 역사서로서 참조되지 못한 것 같다. 여기에는 물론 너무나 뚜렷한 왜곡과 과장이 포함돼 있어서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 속에 있는 모든 개별적인 서술에 대한 사료가치까지 통째로 부정한다는 건 너무 과격하고 거친 인식의 결과 아닌가 생각한다. 

 Q. 역사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는 전문가들과 아마추어 연구자들, 역사 애호가에게 당부하고 싶은 점은?.

우리 역사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제고하기 위해서라면 역시 전문가의 역할이 가장 중요할 것 같다. 전문가가 먼저 학습하고 창의적인 관점에 서서 새로운 콘텐츠를 발굴할 수 있어야 대중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소구력이 있지 않겠느냐는 당부를 하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관점이나 시도만이 역시 새로운 정보를 생산할 수 있다고 믿는다. 때로는 익숙함으로부터 벗어나 새 관점에서 과거를 조망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 점에서 학계 인사가 아닌 연구자들의 몫도 앞으로 계속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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