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br>▸철학박사<br>▸상지대학교 강의전담교수<br>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강의전담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환국(換局)의 사전적 정의는 ‘시국 또는 판국이 바뀜’이다. 보통 한국사에서, 특히 조선 후기인 17세기에서 18세기, 서인과 남인 사이 정권의 교체와 관련해 일어난 대규모 숙청 사건, 또는 이 숙청이 일어났던 사건을 일컫는다. 환국의 발생에는 북벌, 예송논쟁 같은 표면적인 명분이 존재하지만, 그 내막을 살펴보면 특정 붕당(朋黨)에 집중된 권력을 분산시키고, 왕이 신하들로부터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성격이 강했다. 이로 인해 학계 일부에서는 환국으로 인해 당대 붕당 정치의 균형과 합리성이 붕괴됐다고 평가한다.

대표적인 환국으로 경신환국(숙종 6년, 1680년), 기사환국(숙종 15년, 1689년), 갑술환국 (숙종 20년, 1694년), 정미환국(영조 3년, 1727년)을 꼽을 수 있다. 사례들을 본 독자들은 눈치챘겠지만, 환국은 주로 숙종 대에 집중돼 있다. 참고로 영조 대의 정미환국을 계기로 이인좌(李麟佐, ?~1728)가 난을 일으켰고, 이후 영조는 탕평책(蕩平策)을 시도한다. 다시 숙종 대 이야기로 돌아가면, 숙종 대 3차례의 대표적인 환국에서 핵심 명분으로 작용한 것이 바로 장희빈, 즉 희빈 장씨(1659~1701)와 관련된 것이었다.

희빈 장씨는 당대로서는 매우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집안 인물들 가운데 조정에서 핵심 관리를 역임한 사람조차 찾기 힘들 정도의 가문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사람은 희빈 장씨의 숙부인 장현(張炫)이었다. 장현은 역관(譯官)이었는데, 당시 역관은 중인 신분이었다. 이것은 희빈 장씨의 집안이 희빈 장씨가 비빈(妃嬪)이 될 정도의 신분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신분’에 국한된 얘기다. 실제 장현은 역관으로 엄청난 부를 쌓았고, 이것을 바탕으로 당대 남인(南人) 세력과 친분을 쌓았다.

희빈 장씨의 계모인 윤씨가 당시 우의정이었던 조사석(趙師錫, 1632∼1693)과 사통(私通)한 사이였다. 이에 조사석은 귀인 조씨(인조의 후궁)의 아들인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 1660~1701)에게 자기 정부(情婦)의 딸을 입궁시켜달라고 요청했고, 이때 입궁한 사람이 희빈 장씨였다.

희빈 장씨는 매우 미모가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실록’에서 비빈이나 궁인의 미모에 대해 직접 언급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희빈 장씨의 경우 그 미모에 관한 언급이 다수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장씨를 책봉해 숙원(淑媛)으로 삼았다. 과거 역관 장현은 나라의 큰 부자로서, 복창군 이정과 복선군 이남의 심복이 됐다가 경신년의 옥사에 형을 받고 멀리 유배됐는데, 장씨는 곧 장현의 종질녀이다. 나인(內人)으로 뽑혀 궁중에 들어왔는데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

-『숙종실록』, 숙종 12년(1686년, 병인 / 청 강희(康熙) 25년) 12월 10일 (경신) 4번째 기사

이 외에도 간관(諫官)들이 숙종에게 희빈 장씨의 미색에 현혹됐다는 비판을 받지 않도록 정무를 수행하라는 건의도 있었다. 이런 것들을 감안하면 희빈 장씨의 미모가 매우 뛰어났음을 추론할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희빈 장씨의 궁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1680년(숙종 6) 희빈 장씨가 21세였을 때 인경왕후(仁敬王后) 사후 처음 숙종으로부터 승은을 입었으나, 대비인 명성왕후(明聖王后)에 의해 궁에서 쫓겨났다가, 명성왕후 사후인 1683년(숙종 9)에 다시 입궁해서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1688년(숙종 14) 10월 28일 왕자 윤(昀, 훗날 경종)을 낳았고, 윤이 원자로 책봉되면서 희빈으로 책봉됐다. 그리고 1689년(숙종 15) 5월 2일, 당시 중전이었던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희빈을 투기했다는 죄목으로 서인(庶人)으로 폐출됐고, 대신 희빈 장씨가 중전의 자리에 올랐다.(같은 해 5월 6일) 그러나 1694년(숙종 20) 6월 1일 인현왕후가 환궁 후 복위됐고, 중전이었던 희빈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됐다. 결국 1701년(숙종 27) 8월 14일 인현왕후가 승하했고, 그 직후 희빈이 취선당(就善堂) 서쪽에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왕비가 죽기를 기도한 일이 발각되면서, 10월 8일 내전을 질투해 모해(謀害- 꾀를 써서 남을 해침)했다는 죄목으로 자진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표면적으로 희빈 장씨의 파란만장한 궁에서의 생활은 시어머니 명성왕후의 탄압, 숙종의 변덕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내막에는 서인과 남인 사이의 정치적 갈등이 있었다. 애초에 명문가가 아닌 희빈 장씨의 입궁이 가능했던 것은 삼촌이었던 장현이 그 부를 바탕으로 남인과 교유했기 때문이다. 또한 대비인 명성왕후가 희빈 장씨를 궁 밖으로 내쫓은 것 역시 당색이 달랐기 때문이고, 악연으로 얽힌 인현왕후 역시 그 뒷배에는 서인 세력이 있었다. 특히 희빈 장씨가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원자로 책봉되면서, 조정의 신하들과 특정 붕당이 희빈 장씨에게 줄을 서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리고 인현왕후의 복위로 서인이 다시 조정 주도권을 획득했고, 이전에 당했던 것을 다른 붕당에 보복하는 과정에서 희빈 장씨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희빈 장씨를 소재로 집필된 소설과 드라마, 영화는 수도 없이 많다. 이들 매체의 상당수는 희빈 장씨를 ‘권력을 지향한 요부(妖婦)’, 혹은 ‘중전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욕망에 휩싸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악녀’ 정도로 묘사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희빈 장씨는 권력 다툼 속에서 희생당한 가련한 인물일 수도 있다. 그러나 희빈 장씨는 자기 중심을 잡지 못하면서 붕당이 보내는 손길을 적절히 뿌리치지 못했고, 이것은 본인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조선조에 비빈으로 책봉된다는 것은 굉장한 영광인 동시에 막강한 권력을 누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을 적절히 사용하지 않거나, 무엇보다도 왕실 사람으로서 엄격한 생활을 유지하지 않고 작은 실수라도 하게 되면, 이것은 정치적 반대파에 의한 공격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하물며 민주주의 사회이고, 인기가 바닥을 치는 현직 대통령의 부인은 오죽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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