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br>▸철학박사<br>▸상지대학교 조교수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역이기(酈食其)가 돌아오자 한왕이 물었다.
“위(魏)의 대장은 누구인가?”
역이기가 대답하여 말하길, “백직(柏直)입니다.”라고 하였다. 한왕이 말하길
“구상유취(口尙乳臭)라, 능히 한신(韓信)을 당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고제기(高帝紀)」 상 제1상, 『한서(漢書)』 권1상.

위의 인용문은 그 유명한 ‘구상유취(口尙乳臭)’라는 사자성어가 나온 <한서(漢書)>의 일부다. 많은 포털에서 <사기(史記)>에 나오는 대목이라고 나오는데, <사기>에는 저 내용의 대략적인 맥락만 나올 뿐 “구상유취”라는 말이 제대로 나오진 않는다. 포털들의 수정이 필요하다.

구상유취. 입에서 아직 젖냄새가 나서 말이나 행동이 유치하다는 뜻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한서>의 내용은 <사기>와 함께 보면 알 수 있다. 한(漢)의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초(楚)의 왕인 항우(項羽)와 대립하던 때에, 한에 복종하던 위(魏)의 왕인 표(豹)가 한을 배신하고 초와 화친을 맺었다. 이에 유방은 우선 역이기(酈食其)를 보내서 표를 달래려고 했으나, 표는 이것을 듣지 않았다. 결국 유방은 한신(韓信)을 시켜서 위를 공격할 것은 명했고, 인용문의 상황은 공격을 결정한 직후 유방이 역이기와 나눈 대화의 일부다. 결국 구상유취는 어린애처럼 나이도 어리고 능력도 없어서 나의 상대가 될 수 없는, 혹은 어떤 일을 해낼 수 없는 사람을 뜻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구상유취’라는 말을 유명하게 만든 정치인은 유진산(柳珍山, 1905~1974)이다. 유진산은 1905년생으로 3.1 운동 당시 벽보 사건에 가담하고, 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연락원 역할을 하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해방 이후 정치에 투신해서 4·19 민주혁명을 겪고, 5·16 군사쿠데타로 정치제재를 당했으며, 이후 야당의 분열에 원인을 제공하는 등 산전수전을 다 겪은 정치인이었다.

1970년, 박정희 독재정권의 중앙정보부는 야당인 신민당의 당대표가 된 유진산을 앞으로 있을 제7대 대통령선거의 야당 후보로 낙점했다. 박정희 정권 입장에서 유진산은 노회하고 타협적이라 상대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이례적으로 유진산에게 동남아 순방을 시켜주고, 박정희와 영수회담까지 가졌다. 그리고 결국 중앙정보부 요원이 유진산의 집에 드나들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러한 유진산에게 도전했던 사람이 당시 40대였던 김영삼(金泳三, 1929~2015)이었다. 김영삼의 생물연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김영삼과 유진산의 나이는 지지(地支) 두 번을 거스르는 24년 차이가 났다. 노회하고 타협적인 유진산에게 맞서서 김영삼을 비롯한 상대적으로 젊은 정치인들이 내세운 것이 ‘40대 기수론’과 ‘선명야당’이었다. 이들의 움직임을 향해 유진산이 했던 말이 바로 ‘구상유취’였다. 그러나 유진산과 박정희 독재정권과의 관계에 대한 의혹이 커지고, 40대 기수론이 힘을 얻으면서 결국 유진산은 대통령 후보 경선을 포기했다.

이후 한국 정치에서 ‘구상유취’라는 말은 잊을만하면 등장했다. 2023년 인요한 당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당원 행사에서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를 향해 “준석이는 도덕이 없다”라고 발언한 것에 대해 홍준표 대구시장이 유진산이 ‘구상유취’라고 말한 것을 회자했다. 2022년 국민의힘에서 이준석 당시 대표가 직후 있었던 문자파동에 대해 ‘양두구육(羊頭狗肉·양 머리에 개고기)’이라고 비판하자, 친윤계 이철규 의원이 이준석 당시 대표를 향해 ‘구상유취’라고 비판했다. 2021년 더불어민주당 대권주자인 정세균 전 국무총리가 국민의힘 이준석 전 최고위원에 대해 ‘장유유서’를 언급했다가, 국민의힘의 한 당협 위원장이 이를 비판하면서 2023년의 홍준표 대구시장처럼 유진산이 ‘구상유취’라고 말한 것을 회자했다. 공교롭게도 모두 이준석 개혁신당 공동대표가 연루돼 있다.

한국은 총선 때마다 의원직 물갈이가 꽤 많이 일어나는 나라다. 한국 정치의 변화나 변혁의 주체는 대개 학생이나 젊은 정치인들이었다. 이들의 저항에는 필연적으로 나이와 발언을 핑계로 ‘구상유취’라는 비판이 따랐다. 그러나 결국에는 진영에 상관없이 한국은 노회하거나, 부정부패를 일삼거나, 독재의 주체이거나 부역자인 정치인들을 언젠가 반드시 심판받았다.

2024년은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는 해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이번 총선에서 ‘구상유취’라는 비아냥을 뚫고 젊고 참신한 정치인들이 많이 등장하길 바란다. 그런데 필자가 이제 나이가 들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희망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적다는 느낌이 든다. 특히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소위 ‘소년등과’에 성공했으며, ‘조선제일검’이라는 칭찬을 들으면서 검사 생활을 한 끝에 법무부장관까지 역임했던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에게서 “싫으면 시집가”라는 말이 나왔을 때 나도 모르게 ‘구상유취’라는 외마디 탄성이 터져나왔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제발 본인의 정치력을 성찰하길 바란다. 그런 표현 하나 때문에 자칫 ‘젊은 것들은 역시 안돼!’라는 비난이 일어서 청년 정치인들의 의욕을 꺾고 기회를 박탈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아울러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싫으면 시집가” 발언은 서울대 법대, 소년등과, 법 전문가 출신이라는 것이 아무 소용없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는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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