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9년 4월 30일 서울 종로구 효자치안센터 앞에서 열린 ‘공무원노조특별법 폐지 및 대통령 약속이행 촉구 결의대회’  ⓒ뉴시스
지난 2019년 4월 30일 서울 종로구 효자치안센터 앞에서 열린 ‘공무원노조특별법 폐지 및 대통령 약속이행 촉구 결의대회’ ⓒ뉴시스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한국 노동계의 숙원사업이던 ILO(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 비준이 가시화됐다. 올해 2월, 3개의 ILO 핵심협약 비준동의안이 국회를 넘어서면서다.

90년대 초반 한국은 ILO 회원국이 됐지만, 그간 ILO 회원국이라면 반드시 수행해야 할 ‘핵심협약’ 일부를 비준하지 않아왔다. 이에 대해 국내 노동계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압박은 계속돼 왔다.

때문에 역대 정권에서는 핵심협약 비준을 추진해왔으나, 결과적으로는 모두 실패로 끝났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강한 의지를 드러내며, ILO 100주년을 맞이하는 2019년에 맞춰 핵심협약 비준을 이루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비록 약속한 시점에 맞추진 못했으나 올해 초 ILO 핵심협약 비준동의안 본회의 통과라는 결과를 냈다.

ILO 가입 이래 30년 만에 이룬 값진 성과였다.

하지만 노동계는 마냥 반갑게만 받아들일 수 없다. 현행 노동법은 여전히 ILO 핵심협약 기준에 못 미치며, 되레 노동기본권 보장 수준을 후퇴시키는 방향으로 개악이 이뤄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경영계 또한 개정 노조법이 산업현장에 적용됐을 때 원만히 시행될 수 있도록 보완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ILO 핵심협약 발효까지 남은 시간은 1년여. 말뿐인 비준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 현행법과의 간극을 줄이기 위한 노동계의 투쟁, 그리고 노사간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30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린 ILO 핵심협약 비준 노조법 개악안 폐기 촉구 기자회견 ⓒ한국노총
지난해 11월 30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린 ILO 핵심협약 비준 노조법 개악안 폐기 촉구 기자회견 <사진제공 = 한국노총>

험난했던 비준안 통과

ILO는 UN 산하 노동 전문기구로 자유롭고 평등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국제적 노동보장을 목표로 설립됐다.

ILO는 회원국들에게 △결사의 자유(제87호·98호) △강제노동금지(제29호·105호) △균등대우(제100호·111호) △아동노동금지(제138호·182호) 등 총 4개 분야, 8가지의 핵심협약 수행을 의무사항으로 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ILO 187개 회원국 중 146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 회원국 중 32개국이 8개의 협약을 모두 비준했다. 1991년 ILO 회원국으로 이름을 올린 우리나라 역시 8가지 핵심협약을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간 국내 사정을 이유로 △결사의 자유(제87호·98호) △강제노동금지(제29호·105호) 항목에 대한 비준은 미뤄왔다.

이에 대해 국내 노동계와 더불어 국제사회는 비판의 목소리를 내며, 나머지 4가지 핵심협약도 비준해야 한다고 압박해왔다.

지난 2019년 4월 EU 세실리아 말름스트룀 집행위원은 고용노동부 이재갑 장관과 산업통상자원부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에게 서한을 통해 핵심협약을 비준하지 않으면 분쟁해결 절차에 나설 수 있다는 강한 경고를 보내기도 했다.

EU는 “OECD 회원국이자 선진국인 한국은 국제무역의 주도국이며, 본보기다. ILO 핵심협약에 규정된 원칙에 대한 책임을 감내하고, 경제발전과 무역이 노동권을 존중하고 촉진하는 것과 함께 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 전했다.

이어 “무역관계는 반드시 상품과 서비스 거래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국제노동기준 등 의제와 관련된 가치와 약속과 연관돼 있다”며 “한국 정부의 ILO 핵심협약 비준을 요구한다. 만일 실질적인 조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다음 단계(전문가 패널)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그간 우리나라가 나머지 4개 핵심협약 비준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노동조합법·교원노조법·공무원노조법 등 국내법이 협약과 상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해 정기국회에서 이들 노동관계법 개정안이 문턱을 넘었고, 이로써 상충 문제가 해결됐다. 그리고 지난 2월 26일 결사의 자유(제87호·98호), 강제노동금지(제29호) 등 핵심협약 3건을 담은 비준서가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해당 비준서는 문재인 대통령의 재가를 거친 후 지난 20일 ILO 사무국에 기탁됐다. 기탁된 시점으로부터 1년 후부터 핵심협약은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행사하게 된다.

대선 공약이기도 했던 핵심협약 비준을 이뤄낸 문 대통령은 “1991년 ILO 가입 이후 꼭 30년 만에 이뤄낸 성과다”라며 “노동권 존중에 대한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을 한 단계 높여 국격과 국가신인도 제고에 기여할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더불어 “최근 유럽연합(EU) 등 국제사회의 노동권이 중요시되는 가운데 통상 분쟁의 소지를 감소시키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며 “노동권 존중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새로운 유형의 노동자들과 새로운 노동 현실 속의 새로운 노동관계로까지 확대돼 나가길 바란다”고 기대했다.

지난 21일 열린 민주노총 ILO핵심협약 비준에 관한 입장발표 기자회견 <사진제공 = 민주노총>

끝나지 않은 노사 이견

이번 비준은 ILO 가입 30년 만에 일궈낸 값진 성과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노동계의 우려는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정부는 그간 핵심협약 비준에 걸림돌이 됐던 노조법 개정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해 12월 9일 노동조합법, 공무원노조법, 교원노조법 등 이른바 ‘노조 3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넘었다.

노조 3법에 따르면 실업자와 해고자도 노조 가입이 가능하다. 다만 노조 임원과 대의원 자격은 사업장에 종사하는 조합원을 대상으로만 주어진다. 또 퇴직 공무원, 퇴직교원, 소방공무원, 교육공무원 등도 노조 가입이 가능하다.

기존의 노조 전임자 급여금지 규정도 삭제됐다. 다만 급여지급은 근로시간 면제(타임오프) 한도 내에서만 가능하다. 근로시간 면제(타임오프) 한도를 초과하는 단협은 무효로 인정된다.

이 밖에도 단위협약의 유효기간이 기존 2년에서 최장 3년으로 확대됐으며, 사용자의 점유를 배제해 조업을 방해하는 쟁의행위는 금지된다는 현행법 규정은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대해 양대 노총은 개정 노동법은 ILO 핵심협약 사이에 간극이 여전하다고 비판한다. 협소한 노동자 인정 범위 국가의 과도한 개입, 노조의 쟁의권에 대한 부당한 제약 등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지난 26일 열린 ‘ILO 핵심협약 비준 이후 효과적 이행을 위한 과제’ 국제토론회에서 한국노동조합총연맹 김동명 위원장은 “한국 정부가 ILO에 가입한지 30년 만에 성사된 핵심협약 비준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로 인해 대혼란과 위기에 놓인 한국의 노동계에 한가닥 희망을 줬다”며 “비록 1개 핵심협약이 남아있지만 노동계의 오랜 숙원이 어느 정도 해결됐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아직도 협약에 위배되는 법 조항이 많이 남아 있어 노조 입장에서는 많은 우려가 있다, 특히 근로자의 정의와 국내법에서 노조활동이 가능한 노동자의 범위가 여전히 협소하게 규정돼 있다”고 걱정을 드러냈다.

또 “그동안 한국노총이 여러 차례 지적해 온 △특수고용노동자 등에 대한 노조설립신고서 반려 △신고증 교부 지연 △해고자․ 구직자 등의 노조임원 피선거권 불인정 △근로시간 면제 한도에 대한 국가의 과도한 개입 △노조의 쟁의권에 대한 부당한 제약 및 처벌 등 협약에 위배되는 문제도 있다”고 지적했다.

김 위원장은 “코로나19 위기가 해고와 노동기본권 축소를 정당화하는 구실로 이용되지 않기 위해 향후 국제노동기준은 반드시 강화되고 철저하게 이행돼야 한다”며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포용적이며 지속 가능한 위기 대응책에 있어 항상 국제노동기준이 중심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양경수 위원장은 “지난 4월 20일 한국 정부가 ILO에 87호, 98호, 29호 협약의 비준서를 ILO 사무국에 기탁하면서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지난 30년간 한국 노동자들이 끈질기게 투쟁하고 국제 노동계가 지속적으로 연대해 낳은 성과다”라며 “앞으로 한국이 결사의 자유와 강제노동에 대한 국제 기준이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지고 통용되는 사회가 되겠다고 국제적인 선언을 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다만 핵심협약이 비준됐더라도 법 제도 현실은 여전히 협약과 많이 동떨어져 있다”며 “노조법 적용 대상을 고용관계·종속관계를 유무에 따라 제한하고, 비종사자는 노조에 가입됐더라도 온전한 활동은 불가능하도록 했다.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노조 만들어도 교섭이 불가능하고, 간접고용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조건을 책임지는 진짜 사용자들과 교섭을 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또 “노사가 자율적으로 맺은 단체협약을 정부가 시정명령을 통해 무효화하거나, 정부 정책의 변화를 노리거나, 정리해고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취지의 파업은 그 목적만으로도 불법파업으로 여겨진다”며 “이처럼 노조활동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한 현행 노조법이 협약 비준 이후에는 한국의 특수성이라는 이유로 더 지속돼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양 위원장은 “현행법을 전면 개정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ILO 핵심협약 이행은 어렵다”며 “민주노총은 정부가 막 비준한 87호, 98호 협약을 좌표 삼아 노조법이 완전히 국제 기준에 부합할 수 있도록 개정하기 위한 지난한 투쟁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경영계에서는 노동계와는 다른 의미로 노조법 보완을 구하고 있다. 이들은 핵심협약 비준 취지에는 동의하면서도, 현 개정 노조법은 현장에 적용됐을 때 부작용과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한국경영장총협회는 “정부의 입법예고안은 종사근로자 용어 반영 등과 같이 개정 노조법에 따라 하위법령에 기술적으로 개정돼야 하는 사항들만 들어있을 뿐, 개정 노조법이 산업현장의 혼란 없이 원만히 시행될 수 있도록 보완할 수 있는 내용은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를 위해 △사용자에 대한 일방적인 부당노동행위 형사처벌 제도 개선 △파업시 대체근로 허용 △사업장 점거 전면 금지 필요성 강조 등 보완방안을 시행령에 반영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ILO 핵심협약과 노조법을 둘러싸고 노동계-경영계 사이의 새로운 갈등 구도가 형성됐다. ILO 핵심협약 효력 행사까지 주어진 시간은 단 1년여, 노조법 재개정이라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노사간 동상이몽을 정부가 어떻게 풀어나가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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