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찬란한 소수의 빛깔 그린 박그림 작가
전통불화 속의 퀴어적 특징 짚어 현대적 변주
아름다움 너머 존재하는 정체성 찾기에 집중
“불가의 말로 평등(平等)의 가치 전하고 싶어”

△ 박그림 작가

【투데이신문 김효인 기자】 예쁘다는 말을 종종 듣던 평범한 소년이 있었다. 그러나 성장 과정에서 험악해진 얼굴은 그를 자기혐오에 빠지게 했다. 어느 날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는 남자들을 동경하게 된 소년은 자신의 그림으로나마 그들의 아름다움을 가져보고 싶었다. 아름다움으로 가는 길이 험한 만큼 고운 비단에 수십 번씩 맑은 색을 올려 정성스레 그림을 그려 냈다. 시간이 흐른 지금, 여전히 소년은 미(美)를 사랑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님을 깨달았다. 이제 그는 스스로를 찾기로 결심하고 조금은 먼 여정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국내 최초의 ‘성소수자 불교미술가’인 1987년생 박그림 작가의 이야기다. 퀴어에 대해 이야기하는 화가인 그는 회화의 주류로 인정받는 서양화가 아닌 동양화, 그중에서도 불교미술을 전공했다. 특히 아카데미 시스템에 속하기 전에는 스승에게 복종해 가르침을 받는 도제식 미술교육을 받았기에 그야말로 ‘비주류’ 작가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소수자로서 작가는 위계적 차별과 갈등, 끊임없는 자기혐오를 경험해왔다. 도제식 교육을 폄하하는 아카데미 세계에서 마주한 당혹감을 시작으로, 성소수자로서의 정체성 혼란과 해소되지 않는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 현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로서 불교미술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고민까지 더해졌다.

2015년 영덕 옥천사의 ‘연화불단화’ 조성 등 전통 탱화들을 주로 그려왔던 그는 30대가 되면서 작가로서 전환점을 맞게 된다. 서울에 터를 잡고 현대 예술가로서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기로 결심한 것. 작품의 진정성을 부여하려는 이때의 마음가짐은 스스로 성소수자임을 밝히고 ‘박그림’으로 이름을 정식 개명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2018년 법련사 불일미술관에서 연 첫 개인전 ‘화랑도(花郞徒)-꽃처럼 아름다운 사내들’ 이후로 현대미술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그는 같은 해 ‘앱솔루트 아티스트 어워즈’의 우승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후 2019년 뉴욕 두산갤러리에서 열린 그룹전 ‘깃발들(Flags)’, 2020년 2인전 ‘남성모양: 김화현 박그림’전에 참여하는 등 꾸준히 활동해 왔다.

배우 유아인이 그의 작품을 소장한 점 또한 눈길을 끈다. MBC 예능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 유아인 편에서는 자택에 걸린 ‘심호도-낙류’ 작품이 소개됐다.

박그림 작가는 유아트스페이스에서 오는 29일까지 열리는 두 번째 개인전 ‘참; 가장무도회(CHAM; The masquerade)’에서 전작보다 한층 확장된 시선으로 존재와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투데이신문>은 지난 12일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한 유아트스페이스 갤러리에서 박그림 작가를 만나 그가 추구하는 가치와 작품세계에 대해 들어봤다.

박그림 작가 ⓒ투데이신문
박그림 작가 ⓒ투데이신문

“퀴어와 자전적 이야기 넘어 양식적 접근 시도”

Q.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린다.

주로 고려불화 기법과 퀴어적 요소를 결합해 불교미술을 재창안하는 데 주목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소셜미디어를 기반으로 한 게이들의 나르시시즘에 대해 그려왔다. 무한경쟁 사회에서 외모는 일종의 경쟁력이 됐고, 미적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는 도태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의 반복은 자신이 아닌 타인의 기준을 동경함으로써 본연의 나는 ‘미달’로 강등되는 일종의 자기혐오를 부른다. 나 또한 이를 경험한 성소수자이기에 한 개인의 시선과 함께 작가로서 사회맥락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두 가지 접근을 통한 작업을 하고 있다.

Q. 비단에 그리는 등 소재와 기법이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한데.

그림의 주된 기법은 고려불화 기법인데, 이는 왕의 어진을 그리는 초상기법이기도 하다. 비단을 소재로 섬세하게 표현하며 부드러운 곡선을 사용하고 연하게 채색을 쌓아 올린다. 이는 내가 주목하고 있는 남성의 아름다움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기에도 좋은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작은 세필인 ‘면상필’로 일일이 선을 긋는 육리문법(肉理文法) 기법을 사용한다. 얼굴 근육 조직과 살결을 따라 일일이 선과 점을 그림으로써 피부의 질감을 실감 나게 그려내는 기법이다.

화랑도 작품들.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chu~♡’(38.5x53cm, 비단에 담채, 2015), ‘넌 먼저 집에 가’(53x41cm, 비단에 담채, 2017), ‘DIRTY?BEAUTY?’(90x65cm, 비단에 담채, 2018), ‘비너스 스타 파워’(53x41cm, 비단에 담채, 2018), ‘소년의 가면’(132x62cm, 비단에 담채. 2018), ‘오 나의 턱시도가면’(41x32cm, 비단에 담채, 2017) ⓒ박그림 작가
화랑도 작품들.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chu~♡’(38.5x53cm, 비단에 담채, 2015), ‘넌 먼저 집에 가’(53x41cm, 비단에 담채, 2017), ‘DIRTY?BEAUTY?’(90x65cm, 비단에 담채, 2018), ‘비너스 스타 파워’(53x41cm, 비단에 담채, 2018), ‘소년의 가면’(132x62cm, 비단에 담채, 2018), ‘오 나의 턱시도가면’(41x32cm, 비단에 담채, 2017) 

Q. 상대적으로 비주류인 불교미술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있는지.

고등학교 졸업 직후 동국대학교 불교미술학과에 합격했었지만 집안 사정으로 인해 진학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그림을 놓고 싶지 않아 디자인 전문학교에 진학하기도 했고, 조각가셨던 고등학교 은사님께 조각 작업을 사사하기도 했지만 그조차 군 문제로 여의치 않게 중단됐다. 불교미술에 대한 열망은 더 커진 상태에서 이름을 밝힐 수 없는 한 스승님께 몇 년간 도제식 교육을 받았다. 이후 인연이 닿아 26세 늦은 나이로 다시 동국대학교 불교미술학과에 진학하게 됐다.  

Q. 현재 작업을 불교미술의 현대화로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워낙 비주류이다 보니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작업하는 부분도 없지 않다. 불교미술이 워낙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는 것으로만 치부되고 있고 그로 인해 작업으로서 인정받기 어려운 지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우리 미술의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는 고려불화를 여러 형태와 방식으로서 전유하고 이어가고 싶은 것이 목표다.  

MSQ73, 9.5x39cm, 비단에 채색, 2021

Q. 전통 불교미술을 계승하는 작가들과 가장 다른 부분은 무엇이라고 보는지.

그분들은 불교의 사상이나 교리를 담은 경전에 입각해 세습된 도상을 가지고 충실한 작업을 해나가는 것이고, 불교미술 작가로서 전통 불교회화를 사랑하고 전유하고자 하는 마음은 모두 같다고 본다. 하지만 나의 경우 기존 작품보다는 좀 더 새롭게 말하려는 부분에서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굳이 따지자면 퀴어나 사회적인 현상을 접목해서 현시대에 맞는 문제들을 불교미술과 연계해 새로운 방식으로 재창안하는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Q. 성소수자로 알려졌는데 이를 알리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

내가 스스로 적극적으로 알린 적은 없지만 작가로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 같다. 숨기지 않은 이유는 궁극적으로 내가 하고 있는 작업에 대한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동국대학교 재학 당시 기민정 작가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스스로 솔직하지 않으면 작업에 한계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업 자체가 퀴어라는 소수자들을 그린 그림이기도 하고, 또 그 이상의 아름다움을 진심을 담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참; 가장무도회(CHAM; The masquerade)’ 전시 전경

“평등 꿈꾸는 등호 메시지로 사회 속 성소수자 표현”  

Q.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는데 앞선 전시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첫 번째 개인전인 ‘화랑도’에서는 타인에 대한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동시에 자전적인 이야기를 전했다면, 이제는 내가 느끼고 깨달았던 점을 중심으로 좀 더 미술사적으로 집중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또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안에 대해 동시대적으로 접근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의도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게 배치나 구성에 좀 더 신경을 썼다.

Q. 작품 방향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진 것인지.

화랑도 초기작은 표현이 단순한 데다 인물마다 개성이 강해 특정 작품에만 관심이 쏠리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평등의 가치를 말하고, 퀴어 인물을 그리고 있는 입장에서는 형평성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는 상단에는 퀴어 인물의 눈 부분을 그린 그림을, 하단에는 그들의 취향이 반영된 여러 패턴 작업을 넣어 통일성을 추구했다. 눈동자 색도 모두 같은 색으로 정하고 그림들도 패턴화해 누구 한 사람 튀거나 부각되는 것 없이 그렸다. 화랑도에서는 인물 테두리에 선을 두어 퀴어 인물과 사회와의 단절된 모습을 표현했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아예 해체해서 인물과 사회를 분리했다. 특히 작품 전체적으로 봤을 때 등호 형태를 부여해 퀴어 인물과 사회의 평등을 나타내려 했다. 그러나 등호 또한 결국 분리된 상태이기에, 퀴어 인물이 느끼는 소외감과 배제된 현실 등을 전하려 했다.

비호, 110x27cm, 비단에 채색, 2021
비호, 110x27cm, 비단에 채색, 2021

Q. 주로 작품 배경으로 등장하던 호랑이를 단독 작품으로 그렸는데. 

호랑이는 나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다. 불교미술 속에서 호랑이는 주로 부처나 보살보다는 부수적인 역할을 한다. 주인공이 아닌 사이드 캐릭터 같은 존재라는 점에서 호랑이가 나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나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마음에 호랑이를 가장 크게 그린 ‘비호’ 작품을 선보였다. 아울러 불교에서는 깨달음의 과정을 소를 길들이는 과정에 비유한 ‘심우도(尋牛圖)’라는 그림이 있다. 이에 영감을 받은 ‘심호도(尋虎圖)’ 연작을 이어 준비 중인데 그에 대한 예고편 정도라고 보시면 좋을 것 같다.

Q. 그간 꾸준히 활동해 왔는데 이번 개인전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은 어떤지. 

첫 전시 화랑도에서는 일반 대중들의 반응이 엇갈리는 지점이 있었다. 물론 좋아해 주시는 분들도 많았지만 전시 장소가 절이었던 만큼 왜 절에서 이런 외설스러운 그림을 그리냐는 반응 등 부정적인 시선도 일부 있었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는 남녀노소 관계없이 고루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 같아 감회가 새로웠다. 일례로 강남구청에서 아트워킹이라고 해서 갤러리 도슨트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매진이 됐고, 연령대 또한 노인부터 아주 어린 꼬마들까지 질문도 많이 하고 관심을 많이 받았다. 항상 전시 전에는 퀴어에 대한 혐오적인 시선에 대해 고민했는데 이 같은 우려가 다소 해소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MSQ48708, 9.5x39cm, 비단에 채색, 2021

“자기혐오로 시작한 작업, 이제는 정체성 찾기로”  

Q. ‘그림’이라는 이름이 특이한데 어떤 뜻이 담겼는지 궁금하다.

개인적으로 이분법적인 상황 한가운데 놓인 적이 많았다. 게이이면서 일반사회에 섞여 있었으며, 미술계에서 비주류로 분류되는 불교미술과 현대미술 사이에서도 간극을 경험했다. 그런 가운데 도제식 교육과 아카데미 시스템에서의 충돌도 이어졌다. 결국 사회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어려운 가정형편 등 여러 상황으로 인해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이에 이제는 작품활동을 꾸준히 이어나가고 싶은 절실함을 가지고 이름을 정식으로 개명하게 됐다. 

Q. 지금껏 해온 작업 중 특별히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는지. 
‘심호도-간택’ 작품이다. 2018년은 가장 변화도 컸고 힘든 시기였는데 그때 나온 작품이 간택이다. 작업할 당시에는 어려움이 많고 고통스런 기억이 있는데 작품을 본 사람들에게서는 오히려 따뜻한 느낌을 많이 받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기법이나 인물의 의상 등에서 고려불화의 색채가 많이 드러나는 작품이며 민화풍으로 그려진 호랑이, 무지개 빛의 사라천 등이 특징이다.  

심호도- 간택 70cmx92cm 웹
심호도- 간택, 70x92cm, 비단에 채색, 2018 

Q.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작가와 그 이유가 있다면. 
엘지비티큐(LGBTQ)를 주제로 작업을 해온 전나환 작가다. 성소수자 전반을 뜻하는 이 단어에는 레즈비언(lesbian·여성 동성애자), 게이(gay·남성 동성애자), 바이섹슈얼(bisexual·양성애자), 트랜스젠더(transgender·성전환자), 퀴어(queer·성소수자 전반) 혹은 퀘스쳐닝(questioning·성 정체성에 관해 갈등하는 사람) 등이 포함된다. 전나환 작가는 지난 2015년 두 번째 개인전에서 외눈박이 거인을 성소수자에 빗댄 그림으로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공개했다. 앞서 성소수자와 평등에 대한 주제를 작업으로 이야기했기에 많은 용기와 영감을 받았다. 평소 존경하던 작가인데 올 10월에 퀴어 작가 단체전을 함께 하기로 해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Q. 작업을 할 때 가장 원동력이 되는 것은 무엇인지.
언제나 힘들면서도 결코 놓지 못하는 것이 작업인 것 같다. 주로 퀴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작업하다 보니 작품을 좋아해 주는 이들이 조금씩 늘고 있다. 뉴욕 전시를 할 때 나는 가지 않고 작품만 보냈었는데, 뉴욕의 어느 대학생들이 그 전시회를 보고 인스타로 다이렉트메시지(DM)을 보낸 적이 있다. 작품이 너무 좋았고 이런 류의 작업을 계속 이어가 달라는 요청이었다. 작지만 응원의 메시지를 받고, 어떤 방식이든 작품에 대한 피드백을 받는 것이 작가에게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다. 

심호도-낙류 230x130cm 비단에담채 2019 웹<br>
심호도-낙류, 230x130cm, 비단에 채색, 2019 

Q.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의 시선으로 힘들었던 적이 있는지.
퀴어에 대한 혐오는 사회적인 문제지만 내 스스로에 대한 자기혐오 또한 존재했다. 어릴 적부터 성격이 여자 같다거나 외모가 뛰어나지 못하다는 이유 등으로 일반사회에서의 차별과 갈등이 있었고, 퀴어 커뮤니티 내에서조차 비슷한 이유로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했었다. 지금은 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고, 아름다움도 좋지만 그 이전에 나의 정체성 찾기에 집중해야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꾸준한 작업을 통해 극복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Q.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이나 목표가 있다면.
자기혐오로 촉발된 작업이었지만 이제는 아름다움에 대한 시선과 본질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다. 감사하게도 올해 7월 옵스큐라 단체전과 10월 뮤지엄헤드 단체전 등 여러 전시가 계획돼 있어 이를 잘 마치는 것이 단기적인 목표다. 장기적 목표는 현대미술을 추구하는 불교미술 작가로서 지향할 바를 찾아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불교에서의 평등은 만법의 근본이나 세상 만물의 본성은 차별 없이 고르고 한결같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 가치를 새롭고 의미있게 전하고 싶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