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의 시선을 통해 비춰진 구룡마을 주민들의 모습은 둘 중 하나다. 맹목적으로 재개발을 요구하는 욕심쟁이거나, 누군가의 도움을 절박하게 기다리는 불운한 빈민이거나. 그것이 마을의 일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바깥에서는 애써 보려 하지 않는다. 구룡마을은 산업화 경쟁에서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밀려난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모여든 곳이고, 그것은 우리가 함께 만든 도시화의 그림자라는 것을 외면한다. 

미디어에서도 구룡마을은 강남의 마지막 남은 노른자위 땅으로 그려진다. 아파트 불패 신화에 대한 기대는 이곳에도 투영되고 있다. 정부는 서울의 집값을 잡기 위해 세금, 대출, 공급대책 등 다양하고 강력한 규제를 내놨지만 거래절벽이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강남 3구의 지난 3년간 아파트 평균 매매가는 3.3㎡ 당 2000만원 이상 상승했다. 현재 구룡마을 맞은편 40평 아파트의 매매가 역시 40억원을 호가한다. 

산과 공원을 끼고 있는 구룡마을에 아파트가 들어선다면 어떻게 될까, 투기꾼들은 꿈에 부풀어 구룡산과 그 옆의 대모산을 바라본다. 구룡마을에 살아본 적도 없던 누군가는 폐허의 거리를 걸으며 돈 냄새를 맡았다. 지금도 몇몇 외부 사람들은 마을 협의체에 찾아와 쓰러져 가는 판자촌의 매매가를 묻는다. 

또는 정치인이나 연예인이나 기업들이, 때가 되면 찾아와 생색을 내는 공간으로 구룡마을은 이용된다. 추운 겨울에도 따가운 햇빛 아래 땀을 흘리는 기부자들, 마을 곳곳 빼곡히 쌓여가는 검은 연탄들, 순박한 반가움에 악수로 맞아주는 주민들. 이들이 얻어가는 이미지는 주민들의 지친 삶의 모습을 프레임 안에 담아가는 것으로 등가교환 된다. 

구룡마을 개발은 지난 2016년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가 확정한 개발계획 수립안을 중심으로 시행사인 서울주택도시공사(SH)에서 추진 중이다. 계획대로라면 지난해에 임대 1107가구를 포함한 2692세대 규모의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어야 했다. 하지만 주민협의체들의 반대로 개발 추진은 표류했고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확산으로 합의를 위한 회의마저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개발이 미뤄지며 주민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막연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투데이신문>은 개발 추진과 함께 투기와 탐욕의 멍에를 함께 안아야 했던, 그러나 구룡마을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고 수십년간 서로 울고 웃으며 살아왔던 주민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 마을을 찾았다. 양극단 어딘가에 자리한 마을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구룡마을은 어떻게 투기의 대상이 됐고 한국사회 부동산 욕망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이곳에 투영됐는지를 확인하고자 했다. 

마을 전경과 구룡산 ⓒ투데이신문
마을 전경과 구룡산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박주환 기자】 구룡마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마을의 명칭은 구룡산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06m 높이의 구룡산은 강남구 개포동을 비롯해 서초구 내곡동, 염곡동에 위치해 있으며 청계산, 관악산 등으로 산줄기가 이어져 있다.  

마을의 전설에 따르면 구룡산은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한 흔적이라고 한다. 아주 먼 옛날 한 여성이 열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목격했고 이에 놀라 소리를 지르니 그 중 한 마리가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렇게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면서 아홉 개의 계곡을 남겨 구룡산이 생겼고 하늘로 오르지 못한 용이 죽은 자리는 양재천이 됐다.

이밖에 과거 구룡마을은 행정구역상 경기도 광주 지역에 속해 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강남구 역시 과거에는 경기 광주군 산하 지역이었으며 1963년 서울시 성동구에 편입됐다. 1975년에 이르러 강남구의 분구가 이뤄졌는데 구룡마을은 이 때 강남에 합류했다.   

구룡마을이 본격적인 판자촌의 모습을 갖추기 전, 마을에 지어진 집들은 불과 몇십 가구에 불과했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시기 마을에는 가장 오래된 집으로 알려진 목장집을 비롯해 4지구 지역에 몇몇 가옥들이 부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마을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전인 1981년 구룡마을의 항공사진 ⓒ강남구청
마을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전인 1981년 구룡마을의 항공사진 ⓒ강남구청

마을로 사람들이 대거 유입하기 시작한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서다. 당시 정부는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를 위해 대대적인 도시 미관 사업을 추진했다. 사업의 목표는 전 세계에 수도 서울의 선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라는 표어는 한국사회가 꿈꿨던 국제화에 대한 열망을 상징했다. 

사업이 진행되며 뽕나무 숲이었던 잠실은 올림픽타운으로 탈바꿈 됐고 종합경기장, 아파트단지, 상업시설 등이 조성됐다. 한강에도 시민공원이 만들어지면서 휴식과 여가의 공간으로 변화했다. 이 시기 간선도로 및 교량설치도 이어졌으며 국제대회를 앞두고 서울 지하철 2·3·4호선도 잇달아 운행을 시작했다. 

하지만 도시 미관 사업에는 서울 도심 내 불량주택지구개발도 포함돼 있었다. 이에 따라 서울 지역 곳곳의 판자촌 거주민들은 이주대책 없이 한순간에 거리로 내몰리는 처지가 됐다. 판자촌으로 대표되는 서울의 빈민촌은 1960~19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낙오된 사람들의 피난처이자 재기를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해왔으나 이 같은 기능은 무시된 채 대대적인 철거가 강행됐다. 

다행히 강남의 외곽에 있던 구룡마을은 철거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철거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구룡마을로 살 곳을 찾아 들어오기 시작했다. 실제 마을에서는 이 시기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는 주민들이나, 또는 올림픽을 기점으로 마을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는 증언을 여러 차례 들을 수 있었다. 

한 주민은 “88올림픽 이후로 여기가 살아남으니까 외부에서 막 들어오기 시작했다. 6지구 쪽에 밭이 쭉 있었는데 하루 저녁 새에 그곳이 집으로 다 채워지기도 했다”라며 “집 장사 하는 사람들이 합판을 들고 오고 보온 덮개를 씌운 후에 몇 개 방으로 쪼개서 팔았다. 정말 순식간에 늘어났다”라고 당시의 상황을 증언했다.   

그는 이어 “구청에서도 날마다 철거반들이 돌아다녔다. 하지만 하룻밤 사이에 집이 몇십개씩 생기고 밤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고 있으니 철거를 못했다”라며 “구청 직원이 상주를 해도 집 짓는 속도를 당해내지 못했다. 나도 여기 와서 그런 모습은 처음봤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수년이 지나면서 구룡마을에는 2000여 가구가 넘는 세대가 들어섰다. 당시 거주인구는 적게는 수천명에서 많게는 1만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후 구룡마을 주민들은 자체적인 마을 관리를 위해 지역을 몇개의 지구로 나눴다. 구역은 양재대로 가장자리에 붙은 곳을 제1지구로 시작해 오른쪽 아래 방향으로 부채꼴 모양의 타원형을 그리며 8지구까지 이어진다. 

외부 철거민들이 대거 유입하면서 마을이 조성된 1991년의 모습 ⓒ강남구청
외부 철거민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마을이 조성된 1991년의 모습 ⓒ강남구청

구룡마을이 조성된 이후 개발 얘기가 처음 거론됐던 건 1990년대 초반이었다. 당시 이 일대의 땅은 한보그룹과 개인투자자로 이름을 떨쳤던 일명 ‘광화문 곰’이 소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보그룹은 직접 이 땅의 개발에 나서려 했으나 이른바 수서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수서비리 사건은 1991년에 발생한 ‘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 사건’을 말한다. 1989년 노태우 정부는 주택 200만호 건설을 추진하면서 서울 강남구 수서동, 일원동 일대를 택지개발 지구로 지정했다. 당초 이 부지는 주공아파트가 건설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20여개 단체에 택지공급이 이뤄지면서 특혜 의혹이 불거졌고 한보그룹과 정치권이 연루된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이후 구룡마을에 대한 개발 목소리는 수년간 잠잠해졌고, 1996년 경 건설사 중원이 등장하면서 토지주를 중심으로 한 민영개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당시 중원의 J회장은 1000억원 상당의 토지를 매입한 후 1200여 세대의 주민들에게 입주권을 주겠다고 제안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로 의견을 맞춰오던 중원과 주민자치회는 1999년 합의약정서를 체결하는데 이른다. 주민자치회는 약정서에 따라 자경대를 꾸리고 마을을 정비하는 한편, 투자 및 투기를 노리고 마을에 들어오는 외부인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대규모 재개발을 기대하며 돈 냄새를 맡은 투기꾼들은 마을 형성 초기부터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마을에 직접 거주하지는 않고 대신 살 사람을 구해 개발 후 이익을 얻고자 했다. 이 때문에 주민자치회는 주민증이라는 것을 발급해 마을의 전출입을 관리하고 투기꾼들의 거주를 막고자 했지만, 훗날 이 주민증이 개발 후 입주권을 상징하며 수천만원에 거래돼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구룡마을 주민자치회 관계자는 “이미 1988년 즈음 가구 수가 크게 늘어나면서 마을에 투기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투기를 목적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대부분 직접 살지는 않고 다른 사람을 대신 거주하게 했다”라며 “그러다 보니 세입자들이 주인에게 얘기하지 않고 자기 이름으로 주민등록을 해버리는 경우도 있고, 한 집을 두세명에게 팔아서 서로 싸우는 경우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투기꾼들의 유입도 많았고 세대수가 워낙 늘어나다 보니 개발이 어렵다는 얘기가 나왔던 것으로 안다”라며 “그래서 저희가 빈집을 폐쇄할 수 있는 권한은 없지만, 24시간 잠도 안 자고 입에 풀칠만 하고 밤낮으로 교대하면서 빈집에 사람이 못 들어가게 막았다. 당시에는 민간개발이 이뤄질 것 같았고 그런 꿈에 부풀기도 했다”고 말했다. 

구룡마을 개발 추진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개발사 중원이 2003년 군인공제회로부터 650억원의 투자를 유치하는데 성공, 개발 부지의 절반 가까이를 사들였다. 이후 강남구청에 수차례 도시개발구역지정 제안서를 제출한 끝에 2009년 강남구의회가 민영개발안을 가결하는데까지 진척이 이뤄졌다. 

하지만 2010년 강남구 신연희 구청장이 취임하면서 국면이 전환됐다. 신 구청장은 SH를 통한 공영개발이 타당하다는 서울시의 의견을 수용했고 한 발 더 나아가 시가 제안한 환지 혼용방식에도 제동을 걸고 나섰다. 환지방식이란 토지주에게 보상금 대신 개발구역 내 조성된 땅을 주는 보상법을 말하는데, 강남구는 토지 보상을 통해 개발부지를 모두 수용한 후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와 관련 신 구청장은 2013년 3월 긴급기자회견을 열기도 했으며 4월께 다시 입장문을 내고 “일부 환지방식을 추가해 토지주들이 원하던 민영개발 방식으로 변경한 결정은 당초 서울시가 발표한 공영개발 취지에 맞지 않으므로 반대한다”라며 “구룡마을 정비에 환지방식을 적용할 경우, 투기가 극심한 시기와 개발이 한창 논의될 시점에 대규모 토지를 매수한 토지주 등에게 개발이익이 귀속됨은 물론, 양도소득세 미부과로 최소한의 개발이익 환수마저 불가능하게 된다”고 꼬집었다. 

구룡마을 개발 계획 조감도 ⓒ서울시청
구룡마을 개발 계획 조감도 ⓒ서울시청

토지 수용방식을 두고 갈등을 이어오던 두 지자체는 마을 내 대형화재를 기점으로 합의에 나섰다. 시가 100% 토지 수용 후 개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지자체간 합의가 이뤄지자 개발 추진은 급물살을 탔고 2016년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가 ‘개포 구룡마을 도시개발구역 지정 및 개발계획 수립안’을 수정 및 가결했다. 

구룡마을 개발계획에 따르면 강남구 개포동 567-1 일대 26만6304㎡ 규모의 부지에는 임대아파트 1107가구를 포함한 총 2692가구의 대규모 단지가 들어선다. 양재대로변에는 최고 35층의 아파트가 건설되고 산과 인접한 지역에는 저층 건물이 지어진다. 임대로 배정된 1107가구는 구룡마을에 거주하는 주민들로 채워지며 나머지 세대는 분양으로 전환될 예정이다. 

일부 토지주들은 이에 반발해 도시개발구역 지정제안서 반려처분취소청구 행정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했고, 현재 공식적으로 공영개발이 확정된 상황이다. 다만 토지 수용가격이 시세에 비해 현저히 낮은 가격에 논의되면서 토지주과의 갈등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밖에도 취재 중 만난 다수의 주민들은 임대아파트 입주 후, 임대료 및 관리비 부담을 호소하는 한편, 장기적인 주거권 보장을 위해 ‘임대 후 분양’ 방식을 요구하기도 했다. 실제 마을에서 만난 주민들은 은퇴할 나이를 이미 훌쩍 넘겨 직장이 없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며 몇몇은 공공근로를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고 전하기도 했다.  

주민자치회 관계자는 “개발사 중원의 J회장과 여전히 교류는 있다. 하지만 공영개발로 결정이 난 상황에서 땅을 갖고 있다고 해도 뭘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라며 “다만 임대 후 분양을 허가해준다면 좋겠다. 마을 주민들을 설득시킬 자신도 있다. SH에서 검토해보겠다고 한 것으로 아는데 코로나 때문에 난리가 나서 아직까지 모임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서울시는 임대 후 분양 등 거주민들이 주장하는 내용이 “법리적으로 타당하지 않고 현행법상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어, 개발 방식을 둘러싼 지자체와 주민들 간의 갈등은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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