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br>▸철학박사<br>▸​​상지대학교 조교수<br>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최근에 윤석열 당선자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이하, 인수위)가 추진하고 있는 청와대의 국방부 이전이 사람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지난 20일 윤석열 당선자는 청와대를 용산 국방부 청사로 이전하겠다고 발표했고, 이에 대해 많은 전문가와 국민들이 반발하고 있다. 특히, 윤석열 당선인에 대한 지지가 대통령 선거 당시 윤석열 당선자의 경쟁자였던 이재명 전 후보에 비해 훨씬 높았던 지역인 용산구 주민들조차 반대하고 있다.  국민 속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가겠다는 취지라는 말도 보안과 상명하복, 통제가 생명인 국방부 청사의 이미지와 배치된다.

특히 막대한 이전 비용으로 코로나로 고생하는 자영업자를 지원하는게 낫다는 주장, 집 하나 이사해도 준비에서 이사까지 몇 주가 걸리는데, 국방부 이전에 기한을 몇 주 주지도 않느냐는 주장, 국방부를 이전하면 합동참모본부, 국방부 예하부대 등 연쇄적인 이전이 필요하고, 이에 따라 국방 공백이 생기기에 이적행위라는 주장, 그렇지 않아도 교통 정체가 심한 곳인데 집무실까지 옮기면 교통 정체가 더 심해질 것이라는 주장 등 반론도 매우 합리적이다.

이러한 최근 상황에서 오랜만에 “왜”를 꺼내본다. 윤석열 당선자와 인수위원회는 왜 용산으로 청와대 집무실을 이전하고 싶어할까? 일단 앞에서 언급한 “국민 속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라는 말은 국방부의 이미지, 이전 시 겪을 엄청난 교통 체증을 고려한다면 기각돼야 할 이유다. 그렇다보니 각종 억측이 나온다. 윤석열 당선인이 “자신이 수감시킨 박근혜 대통령의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서”라거나, “풍수지리나 무속이 개입했다”는 추측, 광화문 광장 같은 대규모 집회 군중이 모이지 않는 곳을 선택했다는 추측, 심지어 이전 과정에서 투입되는 세금으로 누군가에게 금전적 이득을 주기 위해서라는 추측까지 등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를 돌아보자. 윤석열 당선자와 국민의힘이 추진하는 청와대 이전에 반발해 일부 언론이 광해군의 경덕궁(지금의 경희궁) 이전과 이후 인조반정으로 인한 광해군의 폐위를 언급1)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을 떠올렸다.

본 지면을 통해 이전에 몇 차례 언급한 적이 있지만, 흥선대원군의 섭정(攝政)은 상왕(上王)이 아닌 임금의 아버지가 직접 섭정한 최초의 사례라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 특히, 흥선대원군의 아들인 고종이 즉위하기 이전의 60여년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의 세도가들이 왕권보다 더 강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세도정치의 시대였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왕권을 인정하고 협력할 일부만 남기고 기존에 온갖 만행을 저지르던 세도가들을 축출했다. 세도가들의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붕당의 원인이자 세금 도둑 신세로 전락한 서원(書院)의 철폐, 변화된 시대를 반영하지 못한 법의 개정, 비변사의 폐지와 의정부 기능의 복구, 양반에 대한 세금 징수, 지방 관리의 부정부패 방지를 위한 사창 제도 실시, 사치 방지를 위한 의복 제도 개편 등 당대 만연했던 부정부패와 백성의 곤궁함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제도를 시행했다. 이러한 모습은 왕족들을 죽음으로 몰고, 각종 부정부패를 일삼아서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고, 흥선대원군이 대원군에 오르기 전에 그를 모욕했던 세도가들을 일소하고, 이것을 통해 백성들의 삶을 더 윤택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모욕을 받으면서도 참고 절치부심했던 흥선대원군의 인내와 끈기, 실천력이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든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경복궁 중건이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됐다. 그 후 중건하지 못하다가 고종이 즉위하면서 흥선대원군이 왕실의 권위를 높인다는 명목으로 중건했다. 그런데, 당시 상황은 경복궁 중건 같은 대형 사업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청(淸)과 일본에 유럽과 미국의 제국주의의 침략이 시작됐고, 세도정치의 부정부패에 대한 반발로 민란이 잇따를 정도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실 권위 향상을 명분 삼아 경복궁 중건을 밀어붙인 것이다. 경복궁 중건은 공사 중 화재로 늦어졌고, 비용 충당을 위한 당백전(當百錢) 발행으로 물가가 올라서 백성들의 삶은 더욱 곤궁해졌다. 이전에 언급했던 개혁 정책은 반발에 당면하거나 실효를 거두지 못한 상황에서 민생과 상관없이 왕실 권위만 생각한 경복궁 중건의 부담은 백성들에게 가해진 셈이다.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을 거울삼아 청와대의 용산 이전을 생각해보자. 휴대전화로 정보를 얻고 업무를 처리하는 시대에 물리적인 청와대 이전으로 국민들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생각은 핑계도 되지 못한다. 오히려 시민 함성의 상징인 광화문 광장을 피하고 국방부의 삼엄하고 무거운 건물로 들어가서 귀를 막고 국민들을 위협하겠다는 이미지가 더 강해보인다. 무엇보다도 코로나 바이러스의 유행으로 많은 시민들이 고통을 받고, 북한의 위협이 계속되고 있으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미국과 중국과의 갈등 등 국제 정세가 급변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청와대 이전이 그렇게 급한 일일까?

청와대를 옮길 수는 있다. 그러나 일의 선후를 따지고, 의혹을 해소하며, 국정 공백을 최소화 하면서 옮길 필요가 있다. 윤석열 당선자와 국민의힘, 그리고 윤석열 당선자를 지지했던 모든 사람들이 조선 왕조 왕실의 권위를 드높이겠다고 중건한 경복궁에 일제강점기인 1915년 10월 1일, 조선물산공진회 개막식에 일장기가 걸렸다는 사실을 잊지 않길 바란다. 수구세력에 나온 대통령 중 성공한 첫 사례가 윤석열 당선자가 되길 바란다.


1)  「청와대와 경희궁」, 『조선일보』, 2022년 03월 19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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