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br>▸철학박사<br>▸​​상지대학교 조교수<br>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윤석열 당선자가 대통령에 취임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윤석열 당선자는 “공정과 상식”이라는 명제를 전면에 내세웠고, 이 명제가 유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런데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돼 당선자 신분이 된 후 새 정부를 꾸리는 과정에서 각종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이로 인해 윤석열 당선자가 후보 시절 내세웠던 ‘이게 윤석열 당선자가 후보 시절에 말한 공정과 상식이냐?’는 비아냥까지 나오고 있다.

문재인 정권에서 조국 전 법무부장관 딸의 의학전문대학원 부정 입학 의혹, LH 직원들의 부동산 투기 등은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민주당 정권이 5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인수위원회가 내세운 공직 후보자 자녀의 편입학 관련 아빠 찬스 의혹, 부동산 차익, 심지어 저가로 차를 구매하기 위한 위장전입과 범칙금 미납 의혹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서민들에게는 매섭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관대한 법의 이중 잣대, 권력을 이용한 편법과 불법의 현실이 드러나고 있다. 진영에 상관없이 각종 편·불법 의혹이 불거지는 상황에서 시민들의 정치인을 향한 불신은 더욱 커지고 있다. 그리고 이들과 연결돼 있는 법조계 인사, 언론인, 재벌 등에 대한 불신으로도 확대되고 있다. 정치인, 법조인, 언론인, 재벌 등은 현대 사회의 대표적인 기득권 세력이다. 물론 기득권 세력을 향한 시민들의 불신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는 문득 한국사에서 기득권의 흐름이 궁금해졌다.

근현대 사회와 이전 사회를 구분하는 점 중 하나는 신분이 아닌 능력이 사회적 지위를 좌우한다는 것이었다. 능력 중심의 사회 분위기는 신분 제도의 해체로 이어졌고, 신분제도 해체는 근현대 사회의 핵심적인 정체성 중 하나였다. 그런데 21세기 한국 사회는 신분 구분과 세습이 없는가? 기업에서 자식에게 경영권과 소유권을 상속하고, 대를 이어서 지역구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기업의 2세에게 경영자 수업을 시키고 유학을 보내며, 국회의원은 지역구 유권자들이 표를 준 결과인데 뭐가 문제냐고 반론할 수도 있다. 그런데 자식에게 엄청난 비용이 드는 사교육과 해외 유학을 시킬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어떨까? 한국 기득권의 상징인 서울대 입학생 중 비수도권 출신 학생의 비중이 점차 줄어들고 특수 목적 고등학교 출신 학생들이 늘어난다는 현상을 고려한다면 어떨까? 배가 고파서 빵을 훔치면 감옥에 가지만, 법조인, 특히 검찰이 범죄 혐의를 받으면 시간을 끌다가 무혐의 처분이 내려지는 상황. 이것이 현대 한국 사회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신분제도가 생겨서 고착됐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근대 이전으로 가보자. 통신과 교통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고,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을 때 신분제도는 매우 견고했다. 통신과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것은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은 정치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가질 수 있게 해줬다. 특히 국가의 법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았던 상황에서 지역의 토호들은 자기 지역 내에서 상당한 수준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중앙군과 다른 독자적인 사병(私兵)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중앙에서 경제력과 군사력이 필요할 때 지역의 세력들에게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 반영된 것이 초기국가시대부터 고려 대까지다. 초기국가시대, 즉, 고조선부터 부여, 옥저, 동예, 삼한 등이 존재했던 시기에 이들 국가들은 왕이 없거나, 왕이 있어도 그 힘이 강하지 않았다. 이들 세력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로 변하고 이들 국가를 주도했던 지역 세력이 다른 지역 세력을 흡수하면서 삼국시대가 시작되었다. 당시 지역을 대표하는 세력들은 중앙 정치에 참여했는데, 고구려의 욕살(褥薩), 신라의 화백(和白) 등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왕이 존재했고 끊임없이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일정 부분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9주5소경이라는 지역 통치 제도를 운영했고, 지역 토호 세력의 자치를 보장하는 동시에 이들을 감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역의 세력은 강대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해상 세력이었던 장보고(張保臯, ?~846)의 청해진(淸海鎭)이었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중앙의 정치에 참여했던 지방 세력은 그대로 중앙의 귀족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기득권은 지역에서 그랬던 것처럼 세습됐다. 이런 과정에서 중앙의 귀족보다 신분은 낮지만 실력은 좋은 새로운 세력들은 중앙에서 나라를 개혁하거나 기득권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기득권을 가진 귀족들의 견제로 실패하여 새로운 세력의 인사는 초야에 묻히거나 목숨을 잃었다. 최치원(崔致遠)이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 역사에서 적어도 고려시대까지는 지방에 기반을 두고 중앙에 진출하기 시작한 토호 세력들이 기득권을 가졌던 시대였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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