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한국의 천주교의 수용 과정은 다른 나라와 다른 독특한 특징이 나타난다. 한국 천주교에서는 이 특징을 천주교의 자율적 수용, 교리의 한국적 이용, 신앙의 자발적 실천1)으로 요약한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 천주교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람 중 하나가 바로 광암 이벽 광암(曠菴, 李檗, 1754-1758)이다.

이벽은 영조 30년(1754) 경주 이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경주 이씨 집안은 오성과 한음 중 오성부원군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1556-1618), 구한말 조선 최대의 부자였지만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을 펼쳤던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 1867-1932), 그리고 이회영의 동생이자 독립운동가, 임시정부 주요 요인이었으며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역임한 이시영(李始榮, 1869-1953) 등을 배출한 명문 집안이었다. 경주 이씨 집안이 조선 초부터 명문가 중 하나였다는 것은 그 집안의 인물들이 성리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했고, 성리학 경전 공부를 열심히 했을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집안의 인물인 이벽이 천주교를 받아들인 것이다.

당초 이벽의 집안은 무반(武班) 집안 출신이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문인이었으나 조부(祖父) 이달이 무과에 급제한 이후 무반 집안으로 유명해졌다. 이벽의 형 이격(李格)과 남동생 이석(李晳)은 무과에 합격해 황해병마절도사와 좌포장의 직책을 맡았다. 이벽 역시 신체가 건장해서 키가 8척에 이르고 힘도 장사였다고 전해진다. 이벽의 아버지는 이벽이 무반의 길을 가길 원했으나, 이벽은 문신의 길을 선택했고, 과거에 응시해 문신이 되지 않고 서생(書生)의 신분으로 생을 마쳤다. 어쩌면, 이벽의 학문적 호기심이 이벽이 평생 학문을 닦고, 천주교 신자가 되는데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른다.

이벽의 학문적 호기심은 그와 교유했던 사람들의 면면에서도 드러난다. 이벽은 정약현(丁若鉉)을 자형으로 맞이했는데, 이것을 계기로 정약현의 동생들과 어울리며 학문을 익혔다. 정약현의 동생들이 바로 『자산어보』로 유명한 정약전(丁若銓, 1758-1816)과 한국 역사의 최고의 학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었다. 또한, 영조 52년(1776)에는 또 한명의 대실학자인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 등과 함께 권철신(權哲身, 1736-1801)을 스승으로 받들고 ‘녹암계’의 일원이 됐다.

이러한 대학자들과의 교유를 통해 이벽의 학문적 호기심과 열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학문적 호기심과 열정은 당대의 사상적 배경이었던 성리학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당대의 분위기와 이벽의 가문, 그리고 교유했던 학자들의 면면에서 확인된다. 그런데, 이벽이 교유했던 학자들은 주로 실학자였다. 당대 실학자들은 성리학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오랫동안 기득권을 잡고 군림했던 성리학이 형이상학적인 논쟁에만 몰두해 사람들의 일상에 도움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실학자들은 성리학을 재검토하고 성리학을 보완할 수 있는 다른 학문에도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다. 조선 후기 천주교가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것도 이러한 맥락이었다. 물론, 당시 “종교”라는 개념이 없어서 우리가 지금 종교라고 부르는 것을 “○○학, ○○도”라고 불렀지만, 이것 역시 당대 사람들이 지금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것들을 학문적이고 도학적으로 접근했음을 의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학자들의 움직임은 천주교의 자발적 수용이라는 다른 국가의 사례에서 찾을 수 없는 결과로 이어졌다. 참고로, 천주교가 유럽·미국 이외의 지역, 즉 남아메리카, 필리핀, 인도, 아프리카 등에 전파될 때 모두 총칼을 앞세운 식민지 지배를 기반으로 천주교 전래가 이뤄졌다.

결국 이벽이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은 적어도 초반에는 학문적 호기심의 발로였을 것이다. 특히, 당대 사회에서 제대로 사상적 배경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던 성리학을 보완할 수 있는 다른 학문이 필요했고, 이벽은 “서학”이라는 이름의 천주교에서 그 답을 찾았을 것이다.


1) 남상범, 「이벽의 「성교요지」에 나타난 하느님 이해와 토착화 원리에 관한 연구」, 인천가톨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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