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이전의 지면1)을 통해 율곡 이이가 불교에 심취했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이이는 어머니인 사임당 신씨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 새어머니와의 갈등, 그리고 자신의 철학적 문제인 기(氣)를 기르고 마음에 의해 몸을 자유자재로 주재(主宰)하려는 뜻으로 금강산으로의 출가를 감행했다. 그 기간은 단 1년. 그리고 이이는 다시 유학자로 돌아왔다.

이이가 불교에 심취했던 나이는 이이가 19세가 되었을 때고, 환속(還俗)한 나이는 20세다. “환속”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망설여질 정도로, 이이의 승려 생활은 확실하지 않다. 법명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고, 불교 경전을 습득하는 속도가 매우 빨라서 다른 승려들이 놀랐다는 말도 전해진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이가 한때 불교에 심취했었다는 사실을 매우 부끄러워했고, 이것 때문에 매우 고초를 겪었다는 것이다.

이이가 불교에 심취하여 금강산에 들어갔다가, 외조모가 살고 있던 강릉으로 돌아온 직후 자신의 학문과 수양의 지표를 밝힌 “자경문(自警文)”을 작성했다. 자경문은 말 그대로 스스로 조심하고 살필 것을 적어서 다짐하는 글이다. 이이가 쓴 자경문에는 성인(聖人)을 표준으로 삼고, 혼자 있을 때 경계하며, 『맹자(孟子)』에 등장하는 ‘한 가지 옳지 못한 일을 행하고, 한 사람의 죄 없는 이를 죽이고서 천하를 얻는대도 하지 않는다.’는 구절을 간직하겠다는 결심이 담겨있다. 성인, 혼자 있을 때 경계한다는 신독(愼獨), 『맹자』의 구절을 간직하겠다는 결심 등은 모두 유학과 직접 관련이 있다.

또한, “자경문”의 세 번째 구절에 ‘오래도록 놓아 버렸던 마음을 하루아침에 거두어서 힘을 얻는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느냐.’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자신이 불교에 심취해서 한동안 유학을 멀리했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자경문”의 또 다른 뜻이 승려가 되기 위해 처음 출가하여 사미가 된 후 배우는 책 중 하나인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의 약자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처음 승려가 된 사람이 경계할 것을 수록하고 있다. 불교에 심취했다가 성리학으로 돌아온 이이가 처음 쓴 글이 “자경문”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이이가 한 때 불교에 심취했었다는 경력은 이후 이이의 발목을 잡았다. 이이가 성균관 유생이던 시절, 이이는 노골적으로 따돌림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신입 벼슬아치들이 당하는 일종의 신고식은 면신례도 매우 심하게 당해서, 이이는 바로 벼슬자리에서 물러나고 이를 비판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사건들을 이이가 불교에 심취했었던 경력과 연결하고 있다.

불교에 심취했던 이이의 과거가 발목을 잡은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관직에서 스스로 사의를 표명했던 사건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이(李珥)를 홍문관 교리로 삼았다. 이이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어린 나이로 도(道)를 찾다가 학문하는 방향을 몰라 여러 유학 이론을 넘나들며 일정한 길을 잡지 못하였고, 또 태어난 시기가 좋지 않았던지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는 망령되이 슬픔을 잊고자 불교 경전을 탐독하다가 본심이 어두워져 드디어 깊은 산으로 달려가서 거의 1년이 되도록 불교에 종사하였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하늘의 신령함을 힘입어 하루아침에 잘못을 깨닫고는 시무룩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와 죽도록 부끄럽고 분함을 느꼈습니다. 불교의 도에 중독된 자 중에 신과 같이 깊이 중독된 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 때에 이 세상에 버림을 받은 것으로 여겨 농사짓고 글이나 읽으면서 여생을 보내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신의 아비가 신에게 조그마한 재주 있는 것을 애석히 여겨 명예를 찾도록 굳이 권하는 바람에 그 때부터 과거보는 사람이 되어 계속 과거에 응해 왔습니다. 신의 구구한 뜻은 그저 몇몇의 녹봉으로 굶주림과 추위나 면하자는 것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관작이 오고 또 성상의 은총이 잘못 이렇게 내려질 줄 어찌 기약이나 했겠습니까? 낭서(郞署)의 직을 역임하고 빛나는 화성(華省-인품을 갖춘 사람이 갈 수 있는 관직)까지 출입하게 되어 신 자신이 당초의 마음을 돌아볼 때 날씨가 춥지 않아도 전율을 느낍니다. 바라건대 신의 직을 해직하도록 명하시고 시골로 내치시어 학문에 전력하면서 옛날 잘못을 닦아 없애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예부터 호걸의 선비는 불교에게 빠지는 일을 면치 못하였다. 옛날 불교를 좋아했던 작은 실수로 논사(論思)의 중한 임무를 가벼이 그만둘 수는 없다. 또 허물을 뉘우쳐 스스로 새 길을 택하는 그 뜻이 가상하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2)

위의 글에서 이이는 스스로 한 때 불교에 심취했음을 고백하고 이로 인해 홍문관 교리의 관직을 맡을 수 없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이이가 그만큼 스스로의 과거를 부끄러워하고 있음을 뜻하지만, 동시에 주변의 눈총도 있었음을 방증한다. 그리고, 이후 이이는 자신의 성리학자로서의 모습을 정치의 현장에서 마음껏 펼쳤고, 특히 성리학이 이단으로 규정한 것에 대해 강하게 부정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1)이종우, 「율곡 이이, 승려가 되다」, 『투데이신문』, 2021.09.17.일자 참조.

2)『선조수정실록』, 2권, 선조 1년 5월 1일 경술 5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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