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이번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두드러지는 모습 중 하나는 거대 양당이 모두 분열된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여당의 경우 이재명 후보가 “매타버스”라는 이름으로 매주 버스를 타고 지역을 방문하는 등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호남지역에 방문했을 때 경선의 경쟁자였던 이낙연 전 대표가 지원을 오지 않았다는 것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국민의힘은 더 심했다. 김종인의 선거대책위원장 인선을 놓고 당내에서 갈등을 벌이더니, 이준석 당 대표자가 소위 “패싱” 당했다는 것에 항의하며 연락을 끊고 부산, 순천, 울산 등으로 돌다가 울산에서 극적으로 화해했다.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드러나는 양당의 내분 양상을 보면서, 과거 당내 분란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려주는 사례가 생각났다. 바로 제2공화국 민주당의 구파와 신파 사이의 갈등이다.

1954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폐지한다”는 내용으로 헌법을 고치는 제5차 헌법개정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그리고 역시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사사오입”이라는 계산법으로, 부결됐던 개헌안이 통과로 뒤바뀌었다. 이 사건에 반발한 야당과 여당인 자유당에서 탈당한 국회의원들을 중심으로 민주 질서 수호와 내각제 개헌을 기치로 민주당이 탄생했다.

그런데 민주당은 창당 때부터 내분의 씨앗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의석수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최대 야당이었던 한민당 출신의 인사들과 자유당에서 탈당했거나 그 외의 야당 출신의 인사들로 나누어진 것이다. 그래서 당시 민주당이 처음 창당했을 때 한민당 출신의 의원들이 주가 됐고, 의석수는 단 33석이었다. 참고로, 당시 자유당이 120석, 무소속이 40석이었다. 한민당 출신 의원들은 우국지사형으로 분류됐고, 좌익에서 전향했거나 독재에 부역했거나 부패 혐의가 짙은 자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반도 중남부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반면 한민당 이외의 자유당에서 탈당했거나 한민당 이외의 야당, 무소속 의원들은 일제강점기부터 관료를 했던 사람들로 현실에 대한 인식이 뛰어났고,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들은 민주당 창당 후 구파와 신파로 나뉘어졌다.

타도의 대상이 명확할 때 구파와 신파는 단결했다. 이승만 독재정권과 자유당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명분이 있을 때 경선 과정에서 큰 무리가 없었다. 대표적인 예가 1956년 제3대 정부통령선거에 나설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이었다. 이때는 대통령 후보로 구파의 신익희, 부통령 후보로 신파의 장면이 나섰는데, 부통령 후보 선출 과정에서 구파의 조병옥이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비록 신익희는 유세 중 급사해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부통령은 장면이 당선됐다. 또한 1958년의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은 78석을 확보해 이전 선거 의석수인 33석에 비해 2배 이상 의석수가 증가하는 성과를 보였다.

그런데, 민주당의 지지가 늘어날수록 구파와 신파 사이의 갈등이 커졌다.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선출을 놓고 구파와 신파가 갈등하면서 구파는 신파를 견제하고, 신파는 더욱 단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1960년 정부통령 선거 후보 지명전에서 괴문서가 지구당에 살포되고, 일부 지구당에서 구파와 신파 사이의 폭력사건이 일어나는 등 갈등이 표면화됐다. 우여곡절 끝에 대통령 후보에 조병옥, 부통령 후보에 장면이 선출됐고, 이어진 대표최고위원 선거에서는 장면이 대표최고위원에 당선됐다. 그러나, 조병옥 역시 급사하고,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려는 이승만, 자유당, 정부의 부정선거가 발생했다. 이것이 바로 3·15 부정선거였다.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국민들의 봉기가 일어났고, 결국 이승만이 하야하는 민주혁명이 일어났으니, 이것이 4·19혁명이었다.

4·19 혁명으로 민주당은 더욱 국민의 지지를 얻게 됐다. 그러나, 민주당의 구파와 신파는 정부통령 재선거 우선과 내각책임제 개헌 우선 여부를 놓고 대립을 벌이더니, 내각책임제 개헌 후 있었던 총선에서 같은 당임에도 불구하고 각각 선거 지휘부를 차리고 다른 당처럼 선거 유세를 벌였다. 그 결과 민주당의 의석은 219석 중 172석으로 압도적이었지만, 구파와 신파는 각각 자신의 파벌이 승리라는 입장을 보였고, 별도의 교섭단체 구성에 이르게 됐다. 내각책임제에서 의석수는 내각 장악의 필수 요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파 출신 장면 총리는 파벌을 아우르는 내각 구성을 약속했으나, 나중에 교섭단체 구성을 먼저 취소할 것을 요구하면서 무위에 이르렀다. 그 결과, 구파와 신파는 결국 갈라지게 됐고, 제2공화국은 10개월만에 5·16 군사쿠데타로 무너졌다.

제2공화국 시절 민주당의 구파와 신파 갈등을 보면 국민들의 성원을 얻을수록 당의 내분이 격화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과 혼돈의 양상은 5·16 군사쿠데타라는 역사의 오점으로 이어졌다. 얼마 전까지 윤석열 후보가 오차범위 밖에서 1위를 달렸을 때 분열이 격화됐다는 점과 일치한다. 민주당도 예외는 아니다. 촛불혁명으로 박근혜가 탄핵당하고, 문재인 대통령 당선 후 180석에 가까운 거대 야당이 되면서 민심을 제대로 받들지 못했고, 경선 과정에서 갈등을 보였다. 결국, 이번 대선은 어떤 당이 내부 갈등을 빨리 없애고, 국민의 염원을 잘 받드느냐가 승리의 기준이라는 것을 과거의 역사가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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