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철학박사▸​​상지대학교 조교수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산사(山寺)에서의 생활을 뒤로 하고 다시 세속으로 돌아온 후, 이이는 다른 성리학자와 다름없이 성리학에서 이단(異端)으로 간주한 다른 사상과 종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이이의 행보 자체는 굉장히 합리적이고 현실적이었다.

이이는 관직에 오른 이후 승승장구했다. 이전에 본 지면에서 언급했듯이, 이이는 구도장원공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뛰어난 두뇌와 학문 습득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나란히 지폐 도면을 장식하고 있는 이이와 이황(李滉, 1501-1570)을 비교하면, 두 사람의 행보는 사뭇 다름을 알 수 있다. 이황은 단양군수, 풍기군수 등 외직을 거쳤고, 성균관 대제학 등 후학을 양성하는 직위에 있다가 초야에 뭍혔다. 그러나, 이이는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좌랑, 이조판서의 직위까지 오르는 등 현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것은 이이가 현실 정치에 대한 적극적인 발언을 했다는 점과 연결된다. 실제로 이이는 향후 외침에 대비하고,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요구하는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조선 개국 후 200여년 동안 여진족과 왜구의 국지적인 도발과 약탈을 제외하고 큰 국란이 없었던 상황에서, 이이의 십만양병설은 기득권의 반대로 좌절됐다. 그 후 조선은 임진왜란이라는 누란의 위기를 겪었다.

또한, 이이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붕당(朋黨)에도 부정적이었다. 당시는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지기 시작한 시기였다. 사림들은 인사권을 좌우하는 이조좌랑 직위를 누가 제수 받아야하는지를 놓고 갈라지기 시작했지만, 실제 대립의 내용에는 성리학의 사상과 교리에 대한 논쟁도 많았다. 이이는 붕당이 갈라지는 것에 대해 부정하면서 특정 붕당의 편을 들지 않았다.

흥미로운 점은 붕당의 성립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이이를 서인들이 종주로 삼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이의 성리학 이단에 대한 보수적인 입장과 연결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1574(선조 7년)에 있었던 선조의 황랍(黃蠟) 도입 사건에 대한 간언이었다. 이 때 이이는 대사간으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선조는 왕실에서 사용할 황랍 500근을 들이라고 명했다. 황랍은 초, 약재의 중요한 재료인 동시에 금동으로 불상을 제조할 때 주형틀을 만드는 재료로도 사용됐다. 또한 초는 조명의 역할도 담당하지만, 각 종교의 의례에도 사용됐다. 이것 때문에 선조의 황랍 도입에 대해 유신들과 양반들은 왕실에서 불상을 제조하거나 불교 의례를 위한 것이라고 의심했다. 이에 이이를 필두로 한 사간원의 간원들은 이단인 불교의 불상 제조나 의례 설행을 위한 것인지 의심된다고 극력 간언했다. 그리고, 선조는 이 간언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론했다. 이 과정에서 이이의 간언에 대해, 선조는 중국 양(梁)의 무제(武帝)가 반란으로 죽기 전에 꿀물 한 잔을 달라고 했으나, 반란군의 대장이었던 후경이 이것을 거부했던 사건을 언급하면서 불쾌함을 표현했고, 황랍이 불교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 사람을 대라고 요구했다. 이이 역시 이 사건 이후 대사간에서 사직하는 등 선조와 유신 사이에 극단적인 대립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선조가 초를 만들기 위해 초를 궁 안에 도입했다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러나, 이 사건은 서인들 사이에서 성리학자가 이단을 배격하는 모습과 간원의 모범적인 사례로 지속적으로 상기됐다. 이이의 비문을 썼던 이정구, “오성과 한음” 중 오성으로 일컬어졌던 백사 이항복, 그리고 서인에서 갈라져 나온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 등 서인들은 저서나 비문 등에서 이 사건을 지속적으로 언급했다. 동시에, 붕당의 성립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이이는 서인의 종주로 추앙됐다. 이황이라는 거목이 버티고 있었던 동인과 달리, 서인은 종주로 내세울만한 특별한 대학자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이의 사상적 깊이와 현실 정치에서의 모습은 서인들의 존경을 받았고, 이이는 서인의 종주의 위치에 올랐다.

흥미로운 점은 이후 서인들의 모습이었다. 이단에 대해 강하게 배척했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매우 합리적이었던 이이와 달리, 서인의 노론 세력은 매우 보수적인 모습을 보였다. 특히, 서인 가운데 나타났던 세도가들의 세도정치는 조선의 몰락을 이끈 주요한 원인으로 지탄받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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