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br>▸철학박사<br>▸​​상지대학교 조교수<br>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올해는 6.10민주항쟁 35주년이었다.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씨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살해됐던 10.26사건, 그 이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12.12군사쿠데타, 이에 저항한 시민들을 학살한 5.18광주민주화운동 등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이 모두 6.10민주항쟁의 근본적 원인이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의 독재였다. 각종 노동탄압, 공안조작, 삼청교육대 등의 공포정치로 정권을 유지하던 신군부 독재정권은 권인숙 성고문 사건 등 각종 인권유린을 일으키더니,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이었던 박종철 열사를 고문으로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리고 당시 신군부 정권은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했으나,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던 학생과 종교계에 의해 그 진상이 드러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민주화와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개헌 요구가 빗발쳤으나, 전두환은 개헌을 하지 않겠다는 “호헌선언”을 했다. 그리고 이 호헌선언에 반발한 대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지던 가운데 1987년 6월 9일 이한열 열사가 시위 도중 경찰의 직격탄에 머리를 맞고 사망하는 사건이 생겼다. 이후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는 대학생과 지식인 중심에서 상당수의 시민이 참여하는 전국민적 저항이 됐다. 그리고 결국 신군부독재정권은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여서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하기에 이르렀다.

이번 회차 칼럼의 제목을 본 독자 가운데 ‘6.10민주항쟁과 종강이 무슨 상관이지?’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수 있다. 6월은 각 대학교가 1학기를 마치고 종강을 맞이하는 시점이다. 학생들은 종강과 동시에 방학을 맞이하지만, 가르치는 사람들은 종강 이후에도 성적처리와 성적 이의신청을 받느라 정신이 없다. 그리고 학생들의 답안지를 채점하면서 소위 엘리트라고 일컬어졌던 대학생의 위상이 역사의 흐름과 함께 많이 변했음을 느낄 수 있다.

6.10민주항쟁을 비롯해서 박정희에서 노태우, 그리고 노태우와 야합해 대통령이 된 김영삼 정권까지, 이들이 집권했던 기간인 1970-1990년대 초반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계층은 소위 “지식인”, 대학생이나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었다. 해외여행도 마음대로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통제됐던 당시 사회에서 대학생은 수업 현장과 각종 동아리, 학회 활동을 통해 비교적 최근의 국제 정세와 사회풍조, 최신의 학술 이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한국 사회를 부정하다고 느낄 수 있는 이론적 바탕을 가질 수 있었다는 의미다. 또한 소위 “피끓는 청년학생”이다보니 부정한 한국 사회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할 수 있었다. 아울러 세계사에서 대학이 처음 생겼을 때 대학은 일정 수준의 치외법권을 보장받고 자치를 인정받는 공간이었다. 이러한 모습이 이어져서 한국 사회에서도 대학에 공권력이 진입하거나 대학생이 공권력에 의해 처벌을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대학생도 학생”이라는 생각 때문에 교수와 학부모가 보호자의 역할을 하고 선처를 요청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1970-1990년대 대학생은 흔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사회적으로 존중받는 집단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학구열과 학벌 중시 풍조가 강한 한국 사회에서 대학 입학과 입학한 대학의 “간판”은 자신이 현재 속한 계층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대학생이 흔하지 않은 상황에서 대학 입학은 일정 수준의 직장에 취업할 수 있는 “마법의 열쇠”였다. 1990년대 중반까지 회사에서는 각 대학에 원서를 보내서 대졸 취업자를 유치하려고 노력했고, 1990년대 초반까지 대졸자들은 대기업 몇 군데에 합격한 뒤 어느 회사를 다닐지 고를 수 있을 상황이었다. 한국 경제가 날로 성장했던 상황에서 인구 증가는 한풀 꺾였지만 여전히 많았던 학령인구와 그로 인한 치열한 입시경쟁, 상대적으로 적은 대학생의 수가 그 원인이었다. 입시경쟁을 뚫고 대학에 진학해서 고등교육을 받는 사람들이 수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사회에서 특권층으로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2022년 1학기. 종강할 때가 되면 성적 처리를 기다리고 있는 쌓여있는 답안지가 나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든다. 빨간 볼펜을 들고 답안지를 검토하면 한숨이 나올 때가 있다. 백지나 틀린 답은 공부를 하지 않은 결과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자기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주어와 서술어도 맞추지 못하고, 따옴표와 마침표조차 쓰지 않은 답안지를 보면 막막함과 걱정이 앞선다.

학령인구 감소로 돈과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그러다보니 기초 학력이 부족한 사람도 대학생이 될 수 있는 세상이 됐다. 그러나 더욱 견고해진 학벌주의 속에서 수도권 대학에 진학하려는 새로운 형태의 입시지옥이 여전히 펼쳐지고 있다. 오히려 돈의 힘으로 많은 정보를 가진 기득권의 수험생은 좋은 대학에 갈 기회가 많아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수도권 대학 진학이 힘들어지는 “진학의 양극화”가 일어나고 있다. 게다가 대학 졸업이 취업의 보증수표가 되지도 않고, “평생직장”의 개념도 없어져서 질좋은 직장도 줄어들었다.

과거 입시지옥을 뚫고 특권층의 삶을 누렸던 대학생은 이제 자기 자식을 대학에 보내는 학부모가 됐다. 그리고 과거의 대학생 중 일부는 교수가 돼서 새로운 대학생의 답안지를 채점하고 있다. ‘내가 그렇게 강의한 적이 없는데······.’라는 무력감, 미래가 불투명한 학생들을 향한 연민, 나도 소위 “꼰대”가 됐다는 자조, 날로 어려워지는 대학의 미래에 따른 불안감 속에서 6.10민주항쟁의 정신과 대학생의 진정한 의미를 다잡아보는 마음 복잡한 학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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