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사이즈 맞춘 싱크대, 고정관념의 결과
부엌에 갇힌 여성…가사노동 남성의 2.5배
성평등 인식 발전했지만 현실은 못 따라가
‘남성 의무’ 강요도 고통…젠더인식 개선돼야

우리 사회에는 남성과 여성, 즉 성별에 따라붙는 고정관념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최근에는 젠더 감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마케팅에 나섰다가 기업의 평판과 이미지가 무너지는 사례가 잦아 젠더 이슈에 귀를 기울이는 사회 분위기가 어느 정도 조성된 상황이다.

그러나 여전히 산업 전반에서는 성별에 대한 차별적 인식과 그로 인한 피해 사례가 산적해 있다. 이처럼 남녀 간 전반적인 불평등과 격차 등은 현대사회의 숙제처럼 남아있다. 이제 소비자‧기업‧정부 등 모든 경제 주체가 젠더와 관련된 문제의식을 갖고,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할 때다. 

이에 <투데이신문>은 산업 전반에 깔려있는 젠더 차별에 대해 심층적으로 파악하고 조명함으로써 근본적인 사회 구조적인 문제는 무엇이고 성평등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길은 무엇인지 탐색해보았다. 

[사진제공=게티이미지뱅크]
[사진제공=게티이미지뱅크]

【투데이신문 김효인 조유빈 기자】 

“부엌에서는 언제나 술 괴는 냄새가 나요

한 여자의 젊음이 삭아가는 냄새

한 여자의 설음이 찌개를 끓이고

한 여자의 애모가 간을 맞추는 냄새

문정희 시인이 1991년 발표한 ‘작은 부엌의 노래’ 중 한 구절이다. 음식을 만드는 일은 인간의 생존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인 만큼 역사상 가장 오래 반복적으로 이뤄진 노동이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가사노동은 오롯이 여성의 몫이라는 인식이 이어져 온 것도 사실이다. 

가족의 식사를 준비하고 집안을 돌본다는 여성의 의무는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당연시돼 왔다. 이는 비단 까마득한 과거에 머무르는 얘기가 아니다. 현대에 접어들어 편리한 가전제품들이 도입됐지만, 일상에서 가사노동을 도맡아 수행하는 여성 비율은 여전히 높은 실정이다.

결국 총 노동 시간은 엇비슷한 가운데 기술의 발달로 인해 더 완벽한 요리 및 위생 상태에 대한 기대치만 높아졌다는 얘기다. 

세계경제포럼에서 각국의 성평등 수준을 비교·발표하는 성격차지수(Gender Gap Index) 순위에서 올해 한국은 146개국 중 99위를 기록했다. 세계 10대 경제대국에 속하는 한국이 이 같이 저조한 순위를 기록한 점은 많은 바를 시사한다.

역사적으로 여성에게 가사노동에 대한 책임감이 전가됐다면 남성에게는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모습과 임금노동에 대한 강요, 즉 가장으로서의 의무가 부여돼 왔다. 이런 각자의 성역할이 잘못된 고정관념으로 굳어져 이어진다면 양성 모두에게 차별적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셈이다.

상단부터 주 사용자를 주부로 정의한 각종 가전제품 광고, 여성을 내세운 부엌 광고 [사진제공=블로그 카르페디엠]
상단부터 주 사용자를 주부로 정의한 각종 가전제품 광고, 여성을 내세운 부엌 광고 [사진제공=블로그 카르페디엠]

여성이 부엌의 주인?…기술 발전에도 ‘부엌 해방’은 요원

생물학적 특성에 따라 분류되는 성(sex)과는 달리 젠더(gender)의 경우 남성이나 여성과 관련된 사회·문화적이고 심리적인 특성이 반영된다. 이는 곧 사회 통념상 남성과 여성에 대한 이상적인 기준이 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부엌에 대한 성별 고정관념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고추가 떨어진다’는 어르신의 불호령이다. 수십 년 전만 해도 만연했던 가부장제 하에서 가사노동은 전적으로 여성의 몫임을 각인시키는 발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면서 남녀에 구애받지 않고 부엌일을 하는 가정이 늘었다. 스타 셰프의 유튜브를 보며 놀이를 하듯 요리를 즐기는 문화가 생기면서 가전 제품도 더욱 편리하게 발달하고 부엌의 위상도 달라졌다.

한쪽 구석에서 외롭게 설거지를 해야 했던 과거와 달리 요즘은 거실을 바라보며 가족과 소통할 수 있는 오픈형 주방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에서도 부엌에 대한 인식 변화를 알 수 있다.

요리하는 남성을 내세운 프라이팬 광고 ⓒ투데이신문
요리하는 남성을 내세운 프라이팬 광고 ⓒ투데이신문

그러나 이런 부엌과 가전제품의 변화가 곧 여성 가사노동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일까.

현실적으로는 부부 모두 일을 하는 ‘맞벌이’가 보편화된 가운데서도 가사 분담에 대한 성별 격차는 여전히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달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22년 통계로 보는 남녀의 삶’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맞벌이 부부는 559만3000명으로, 전체 부부 10쌍 중 5쌍인 절반에 해당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휴먼클라우드 플랫폼 뉴워커와 두잇서베이가 2022년 6월 2일부터 10일까지 9일간 공동으로 진행한 ‘맞벌이 부부의 가사분담’ 설문조사에서 집안일을 주로 분담하는 쪽이 누구인지 문의한 결과, 남성 응답자들은 △배우자(65.0%)를 가장 많이 꼽았으며 여성 응답자들은 △본인(84.0%)을 꼽았다.

지난 5월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21 양성평등 실태조사’ 결과에서도 여성 가사 노동 시간은 남성보다 2.5배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주목할 부분은 ‘자녀 교육과 육아 등에 대한 책임은 여성에게 있다’는 인식이 2016년 53.8%에서 지난해 17.4%로 줄었다는 점이다.

이는 즉 성평등 인식은 예전보다 개선된 반면, 정작 여성이 가정에서 일하는 시간은 남성보다 월등히 높다는 점에서 오히려 현실이 인식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생활 속에서 여전히 가부장적 인식이 고착화된 사례도 포착된다.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학회 모니터링 연구팀 이소현 박사가 최근 조명한 미디어 속 성역할 양상을 보면 성 고정관념 재생산 등 전반적인 성인지 감수성 부족이 확인됐다. 

드라마나 예능에서 여성의 가사노동 부담에 대한 의견이 당연시되거나 가부장제의 전통적 여성상을 종용하는 사례, 특히 가정 내에서 흔히 여성의 공간은 부엌이나 거실인 반면 남성의 공간은 독립된 서재나 분리된 방으로 묘사되는 점 등에서다. 

전형적인 주부의 모습을 묘사한 식용유 광고 [사진제공=블로그 카르페디엠]
전형적인 주부의 모습을 묘사한 식용유 광고 [사진제공=블로그 카르페디엠]

국립여성사전시관에서 지난 6월까지 열린 ‘세상을 짓다-조리서로 읽는 여성의 역사’에서도 부엌 속 여성에 대한 기록과 연구의 흔적이 드러난다.

과거 주로 여성의 일로 여겨진 ‘음식 짓는 일’의 의미와 가치를 재조명한 해당 전시는 비단 조리법의 역사 뿐 아니라 현 시점에서의 가사 분담 격차와 함께 정작 전문 직업 요리사 분야에서는 배제되는 여성의 유리천장 이야기까지 다뤘다.

전시를 맡은 국립여성사전시관 이동은 학예연구사는 “해방 이후 가전제품과 주방의 구조 발전 등 변화 요소로 인해 가사노동의 환경이 개선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면서도 “하지만 외려 가전제품의 편리함과 효율성으로 가사노동 강도가 줄면서 그만큼 완성도에 대한 기대치가 상승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결국 현재의 가사분담 격차를 살펴보면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여성이 부엌에서 해방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게다가 여성을 요리의 주체로 보는 사회적 인식과는 반대로 정작 전문요리사 분야에서는 배제되는 유리천장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전문 요리 업계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 존재한다는 점은 텍사스 주립대 사회학과 교수 데버러 A. 해리스와 패티 주프리가 집필한 저서 ‘여성 셰프 분투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저자는 책에서 “초기 셰프들은 자신의 업무와 가정에서 여성이 하는 요리 사이에 거리를 두기 위해 일부러 미식의 장 내 영향력 있는 단체에서 여성을 배척했다. 이로 인해 남성 셰프는 지위와 정당성, 보상을 얻었으며 셰프는 남성적 활동이라는 생각이 자리잡게 됐다”고 설명한다.

실제 조리학과를 졸업한 30대 여성 조모씨는 “다이닝이나 레스토랑에서는 여성이라는 자체가 너무 불리한 조건”이라며 “여성의 결혼과 출산 문제로 인해 애초에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도 어렵고 운 좋게 일을 시작하더라도 체력과 근성에 대해 지적하는 온갖 편견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성이 주로 쓰니까”…‘모던 키친’에 드리운 편향된 인식

이처럼 가사노동이 여성 쪽으로 치우친 사회적 인식은 자연스럽게 산업 경제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런 문제는 부엌의 대표적인 가구인 싱크대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여성에게 맞춘, 남성에게는 작게 느껴지는 높이, 즉 사이즈에서의 차이다. 

이를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여성 친화적이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면 부엌의 주 사용자가 여성이라는 암묵적인 동의로도 볼 수 있다.

실제 시중에서 흔히 만나볼 수 있는 싱크대는 최소 80cm에서 최대 87cm 수준으로 확인된다. 또 한국가구시험연구원에서 인증한 가정용 싱크대의 표준 높이는 85cm다. 전통적으로 부엌을 자주 사용한다고 인식되는 여성의 과거 평균 키인 155cm 수준에 맞춰 설계된 결과다.

올해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기술표준원이 발표한 제8차 인체치수조사에서 한국인의 평균 키는 남성 172.5cm, 여성 159.6cm로 나타났다. 여성의 평균 키는 자랐지만 싱크대 높이는 바뀌지 않았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이렇듯 과거 여성 키에 맞춘 싱크대는 신장이 170cm가 넘는 남성은 물론, 평균 이상의 키를 가진 여성에게도 편안하지 않은 구조다.

평균 여성 신장 사이즈에만 맞춰 신장 167cm 기자에게는 매우 낮은 싱크대 높이&nbsp;ⓒ투데이신문
평균 여성 신장 사이즈에만 맞춰 신장 167cm 기자에게는 매우 낮은 싱크대 높이 ⓒ투데이신문

실제 신장 167cm의 기자가 부엌 가구를 선보이고 있는 한샘과 리바트 매장에 방문해 싱크대를 체험해 본 결과 확연히 낮게 느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원에 거주하는 36세 남성 전모씨는 “가사일 중 설거지를 전담하는데 싱크대 높이가 낮아 정말 불편하다”며 “부엌일을 하기 전에는 싱크대 높이에 대한 별 생각이 없었는데 매일 몸을 굽히고 일하는 것이 지속되니 허리 통증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부엌 가구의 높이가 낮은 것은 아직까지 남녀 신체와 관련한 데이터가 부족한 탓일까.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기술표준원의 산하 기관인 사이즈 코리아(Size korea)에서는 1979년을 시작으로 5년마다 국민의 신체 사이즈들(키, 몸무게 등)의 통계를 내고 있다. 

사이즈 코리아가 제공하는 패턴 분포표를 보면 단순히 신장과 체중을 넘어 팔 길이 부터 어깨 너비, 손목 너비 등 여러 인체의 사이즈를 확인할 수 있다.

또 성별과 연령대별 표준체형은 물론 크고 작은 삼각, 사각, 역삼각 체형과 그 구성비 수치를 제공하고, 3차원 형상 이미지를 통해 다양한 인체 모델을 직관적으로 제시한다.

세대와 성별에 따른 사이즈 및 체형 데이터를 제공하는 사이즈 코리아 [사진제공=사이즈 코리아]
세대와 성별에 따른 사이즈 및 체형 데이터를 제공하는 사이즈 코리아 [사진제공=사이즈 코리아]

사이즈 코리아는 이같은 구체적인 데이터를 산출해 기업 등 다양한 분야에 제공한다. 이는 적어도 기업 입장에서 인체 표준 사이즈에 대한 데이터가 부족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결국 평균적으로 낮은 싱크대 높이는 주 고객층이 중년 여성이라는 점에 기인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와 관련 한샘과 현대리바트, 에넥스 등 대형 부엌가구 브랜드에서는 싱크대 높이를 조절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현대리바트 매장 직원은 “아무래도 50~60대 어머님들이 많이 사용하시다 보니 거기에 맞춰 제품을 제작한 것 같다”며 “사이즈가 불편하다면 간편하게 발통을 통해 조절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한샘 직원은 “중년 여성분들 중 키가 작은 분들이 많기에 기본으로 제공되는 사이즈의 경우 여성 표준 키에 맞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키가 큰 남성분들도 요즘 싱크대에 관심이 많은 만큼 원한다면 얼마든지 조절이 가능하다”고 답변했다. 에넥스 직원도 “싱크대 높이가 불편한 고객이 있다면 설계를 통해 높이 조절을 할 수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는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옵션에 해당한다. 실제 기자가 모 브랜드 부엌에 대한 실제 견적을 받아 보니 싱크대 높이 선택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이 표준 사이즈의 기준으로 설계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여성에 대한 차별 대우는 부엌 밖에서 더욱 빈번하게 발생한다. 여성은 기계를 다룰 줄 모른다는 편견으로 인해 자동화 시설이 갖춰진 공장에서도 은근한 차별을 받는다던지, 사무용 제품이 주로 남성 표준체형에 맞춰져 있다는 점 등이다.

경북 경주에서 공장에 다니고 있는 50대 여성 이모 씨는 “요즘에는 자동화가 이뤄져 기계만 다루면 되는 작업일지라도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우선적으로 업무 배분이 이뤄지는 일이 많다”며 “사실 예전에는 공구 사이즈들이 남성에게만 맞춰져 있어서 힘이 필요해서 여성이 배제됐다지만 오히려 요즘은 담당자들의 여전한 편견으로 인해 여성에 대한 기회가 많이 사라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안산에 거주하는 40대 여성 김모씨는 “비교적 사이즈에 구애를 받지 않는 다른 가구와 달리 의자는 너무 불편할 때가 많다”며 “실제 사무실에서 사용하는 의자의 목 높이가 뒤통수에 있어 여성은 앉지 말라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언급했다.

시중에서 여성의 몸에 꼭 맞는 의자도 있었지만 목받침 부분이 불편한 의자도 발견됐다 ⓒ투데이신문
시중에서 여성의 몸에 꼭 맞는 의자도 있었지만 목받침 부분이 불편한 의자도 발견됐다 ⓒ투데이신문

기자가 시중에서 다양한 사무용 의자의 사이즈들을 살펴보니 목 위치의 높이 등을 맞춰 조절하는 제품도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에게는 터무니없이 높은 제품들이 발견됐다. 이런 제품의 경우 남성의 표준 체형에 맞춘 것으로 보였다. 실제 164cm인 기자가 의자에 앉아 목 받침을 최하 높이로 조절해 봤지만 뒤통수 언저리에 머무를 뿐 목을 받쳐주지는 않았다.

인체 사이즈는 다양한데 왜 일부 업체에서는 여전히 남성 표준 체형에 맞춰진 의자만을 생산할까. 업계 관계자는 결국 ‘비용의 문제’라고 답했다.

여러 파츠(부속)를 제각기 조합해 다양한 사이즈의 의자를 맞춤 생산하고 있는 업체인 ‘사이즈오브’ 관계자는 “기존의 의자 업계에서 다양한 사이즈의 의자를 내놓지 못하는 것은 결국 비용의 문제”라며 “의자를 만드는 공정에 독자적인 설계를 적용하는 것 자체가 비용이 들기에  기존 외국인 체형에 맞춘 의자 설계도를 그대로 사용하거나 가지고 있는 설계도를 그냥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부속을 다양화해서 조합한 맞춤 제품의 경우 기업이 리스크를 각오해야 한다는 문제도 있다. 대량 생산한 제품들은 몇천 개씩 공장에 적재해두고 한꺼번에 물량이 나갈 수 있지만 맞춤은 그렇지 못하니 이윤 면에서 불리하다”며 “신발을 예로 들면 사이즈 세분화를 하는 데 있어서 사이즈 별로 다른 부품이 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의자는 등받이 크기부터 목받침 등 세부적으로 각각의 금형이 별도로 존재하게 된다. 이는 고스란히 투자 비용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신장에 따라 다양한 맞춤 사이즈의 의자를 제공하는 업체 체험관 [사진제공=사이즈오브]
신장에 따라 다양한 맞춤 사이즈의 의자를 제공하는 업체 체험관 [사진제공=사이즈오브]

실제 이 같은 현상에 대해 한 전문가는 기업에서 더 이상 규모의 경제학보다는 적극적인 젠더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숙명여대 경영학부 서용구 교수는 “과거에는 규모의 경제 논리에 따라 기업도 소비자들이 많이 찾는 제품을 대량 생산할수록 생산 원가가 줄어든다는 점에 매료될 수 있었다”며 “그러나 현재는 소량·맞춤 생산이 각광받는 시대인 만큼 기업의 이윤 추구 방향도 그에 맞게 달라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패션업계만 봐도 예전 옷 사이즈가 단순히 남녀로 나뉘어 S, M, L 정도로 한정됐다면 지금은 맞춤 사이즈를 넘어 성별을 구분짓지 않는 젠더리스로 가는 추세”라며 “특히 여성도 나가서 일하고 남성도 집안일을 하는 것이 당연해진 요즘은 산업 또한 사무용품은 여성 친화로, 주방가전이나 가구는 남성친화적으로 발달해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또 ‘집안일은 여성이 잘 한다’는 편견 이상으로 ‘다른 일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인식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탓이라고 진단도 나왔다.

한국여성노동자회 배진경 대표는 “전통적인 성차별적 고정관념은 여성 노동의 범주를 돌봄과 보조 영역으로 제한하면서 폄하한다”며 “여성의 노동이 당연시되고 저평가되면서 결국 성차별 인식의 악순환이 이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아이 낳는 것 말고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시장 노동은 모두 남성이 잘 하는데 결국 가사 노동은 여성의 몫으로 돌아온다”며 “셰프, 디자이너, 세탁소에서 빨래하고 다림질하는 분들 다들 남자다. 그런데 여성이 돌봄 노동 외에 건설업 등 일당 많은 데 가려고 하면 화장실도 안 돼 있는 등 작업 환경 자체가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집안일은 여성의 몫이라고 규정하는 반면 그 밖의 노동에 대해서는 여전히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뿌리 깊은 인식이 자리 잡고 있는 실정”이라고 덧붙였다.

남성도 불편한 성차별…젠더 인식 바뀌어야

여성 사회 진출이 늘어남과 동시에 맞벌이 가정이 절반 수준으로 올라오자 남성의 가사노동이 자연스레 요구됐다. 비록 외벌이 가정이라고 해도 남성이 가사를 돕는 것이 보편적인 사회 분위기가 되면서 단지 임금노동을 한다는 이유로 가사노동에서 벗어나기는 어렵게 됐다.

안양에 거주하는 40대 남성 김모씨는 “솔직히 어릴 적 아버지는 바깥일을 한다는 이유로 어머니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가사노동과 육아 등은 늘 어머니의 몫이었다”며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고 일하는 여성이 가사노동까지 오롯이 짊어지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모두 안다. 특히 맞벌이라면 밖에서 일하는 점은 같기에 가사노동 또한 반반씩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가사노동은 ‘그림자 노동’으로 불리며 노동시장에서 지워져 왔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이반 일리치(Ivan Illich)는 1981년 저서 ‘그림자 노동(Shadow Work)’을 통해 노동의 형태를 크게 자급자족 노동, 임금 노동, 그림자 노동의 세 가지로 구분했다. 

그에 따르면 생산적인 임금 노동에 비해 그림자 노동은 오로지 임금 노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노동으로, 일을 하고도 그 대가를 받지 못하며 생산에 기여하지 못하는 노동으로 치부된다. 임금 노동자의 재충전을 위한 가사노동과 사회구성원을 기르는 육아가 그림자 노동의 대표적인 예로 제시됐다.

현대에 들어서도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폄하돼 온 가사노동의 가치는 최근에서야 빛을 보기 시작했다.

68년간 노동자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던 가사노동자들은 지난해가 돼서야 국회를 통과한 ‘가사근로자의 고용 개선 등에 관한 법률’(이하 가사근로자법)로 인해 지난 6월부터 법적인 근로자가 됐다. 통계청은 지난해 6월 ‘2019년 가계 생산 위성 계정’을 통해 61가지 항목의 가사노동을 금전적 가치로 환산해 발표했다. 2019년 기준 1년에 490조9000억원이며 1인 평균 949만 원이다. 성별로 살펴보면 남성과 여성이 각각 한달 46만원, 115만 원이다.

남녀가 함께 설거지하는 모습 [사진제공=게티이미지뱅크]
남녀가 함께 설거지하는 모습 [사진제공=게티이미지뱅크]

생각을 전환해보자. 성평등이 오직 여성만을 위한 것일까. 2010년 노르웨이의 홀터(Holter) 박사의 연구(2010)에 따르면 유럽 성평등 국가에 사는 남성은 그렇지 못한 국가에 사는 남성보다 행복할 확률이 2배가량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성평등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소득수준과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IMF 라가르드총재는 지난 2017년 서울에서 열린 콘퍼런스에서 “여성경제활동참여율을 제고하는 정책과 함께 한국 노동시장 성별 격차를 메움으로써 국내총생산(GDP)을 10% 늘릴 수 있다”고 언급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일과생애연구본부 김난주 연구위원은 “오늘날 기업 마케팅을 보면 젠더 의식을 가지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이 보인다. 신혼 가전 광고 같은 것 보면 절대 여성에게만 하게 하지 않고 함께 요리하고 청소한다”며 “십수 년 전만 해도 여자들이 나와 사랑받아서 행복하다는 식의 연출을 했던 점을 고려해보면 많은 변화가 있고 보기 편안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 겉보기에는 성평등 의식이 확산된 것으로 보이지만 결정적인 성 인지 차이에 대한 문제는 여전하다. 젠더 의식 변화가 더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얘기”라며 “특히 사각지대에 소외된 계층이나 임금 차이 문제 등에 대해서는 다양한 정책 개발을 통한 개선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정부에서도 성평등을 위한 다양한 행보에 나서고 있다. 여가부는 2019년부터 청년주도로 성평등 관점에서 미래를 그리는 청년성평등 문화 추진단 사업을 비롯해 다양한 성평등 의제를 발굴하며 지역사회에 확산하는 사업을 진행 중이다.

또한 처음으로 여성 관련 국제기구를 설립하는 등 성평등을 위한 행보에 나서고 있다. 지난 8월 국내 최초 유엔여성기구(UN Women) 산하기관인 ‘유엔여성기구 성평등센터’(성평등센터)가 열렸다. 센터는 여성의 역량 강화를 위해 성별 통계 구축 등 성평등 정책·제도 개발 및 교육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성차별에 대한 소모성 논쟁은 무의미하다. 관습적인 사회 인식에 갇힌다면 여성의 낮은 고용률과 성별 직종 분리, 임금 격차, 가사노동 부담으로 이어지는 고리를 끊을 수 없다. 이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재하는 성별에 따른 차별을 어떻게 바라보고 바로잡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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