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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선에서 만난 사람들, 네 번째 이야기

첫인상과 다른 역사 분위기
산에 올라가 꿈을 찾던 소녀
관찰하는 것이 아닌, ‘보는 것’

1호선은 우리나라 첫 번째 개통 열차이며, 2022년 현재, 98개의 역으로 이뤄져 있다. 수도권 대중교통의 중축을 이루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대표 노선이라고 자부할 수 있지만, 언젠가부터 1호선은 미간을 찌푸리는 존재가 됐다.

1호선이 이런 이미지를 갖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서울, 경기도, 인천, 충청남도까지 사용하는 노선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라고 표현이 됐지만, 승객들은 1호선에서 눈에 띄는 사람들을 ‘1호선 빌런’이라고 명명한다. 

<투데이신문>은 1호선에 일어나는 일들의 원인을 찾기 위해 역사로 찾아가 승객들과 이야기를 나눠 봤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1호선 빌런’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과 두려움을 가지고 출발한 여정은 생각보다 금방 본인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낯선 사람의 경계로 대화를 시작했지만 자상한 말투로 그들의 일생을 나열해 줬다. 몇 번의 대화로 ‘1호선’을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된 것이다. 우리가 오르고 내리며 함께 이동했던 혼란스러운 1호선은 알고보면 누군가의 놀이터였고, 안식처가 되기도 했다.

본보는 1호선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시선이 조금은 편협하지 않았는지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가산디지털단지역에서 만난 김화자 시인 ⓒ투데이신문
가산디지털단지역에서 만난 김화자 시인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서정인 기자】 지난해 11월 10일, 오늘의 인터뷰 장소는 가산디지털단지역이다. IT기업 또는 콘텐츠 기업이 많이 자리 잡고 있어, 새로운 직종의 인물과 인터뷰 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역에 도착했다. 매번 1호선에 몸을 싣고 가산디지털단지역에 도착하면, 많은 승객이 오르고 내렸던 기억이 있어 인터뷰 진행에 수월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항상 이런 기대는 실망도 큰 법인지, 역시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출퇴근 시간을 제외한 역사는 꽤 한적하고, 환승객의 분주한 이동뿐이었다. 기자는 붐비는 시간대에 방문한 가산디지털단지역을 단면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조금의 실망감은 있었지만, 이대로 돌아갈 순 없었기에 천천히 역사 안을 둘러보았다. 가산디지털단지역의 구조는 1호선은 지상, 7호선은 지하에 위치해 환승 거리가 상당히 긴 편이다. 환승 거리에는 손수레에 떡을 싣고 쑥떡을 판매하는 상인, 동대문에서 가짜 금시계를 가져와 바닥에 진열하고 판매하는 상인 등 대화 시도에 용이했지만, 네 번째 인터뷰 상대는 의외의 인물이었다.

“참 예쁘고 따뜻하게 입었다.”

분홍색 니트와 갈색 코트를 입은 기자에게 예쁜 옷을 입었다며 원단을 쓰다듬은 인터뷰 대상자는 붉은빛이 도는 머리카락과 연분홍색 패딩을 입고 있었다. 같은 색의 옷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기자는 그에게 있어 눈에 띄는 대상이었다. 먼저 말을 건네받은 경우가 처음이라,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대화를 이어갔다.

그는 저녁 약속이 잡혀 있어, 환승 거리에 앉아 사촌 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옷 색깔부터 통했는지, 우리는 금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역에 도착해 헤매고 있다는 사촌언니의 전화가 왔지만, 오히려 기자와 이야기를 더 나눌 수 있어 다행이라며, 사촌 언니에게 천천히 오라고 당부했다.

“선생님도 정말 예쁘게 입으셨네요. 화사해 보여요”

“이런 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따뜻한가 봐요(웃음)”

기자의 손을 꽉 잡아주는, 김화자 시인의 손. 붉게 봉숭아 물을 들였다. ⓒ투데이신문
기자의 손을 꽉 잡아주는, 김화자 시인의 손. 붉게 봉숭아 물을 들였다. ⓒ투데이신문

어느새 그는 기자의 손을 꼭 잡고, 남아있는 냉기를 녹여줬다. 기자의 손을 감싼 투박한 손가락엔 붉은 봉숭아 꽃물이 들여져 있었다. 그런 정성이 오랜만이라 직접 봉숭아꽃을 빻아 손톱에 물을 들인 건지 물어봤지만, 요즘 문구점에 가면 가루만 동봉해 판매한다고 그것도 모르냐며 우스움을 사기도 했다. 걱정되고 낯선, 가산디지털역의 첫인상과 다르게 따뜻한 말동무를 찾았다는 기쁨만 가득했다. 기자는 신분을 밝히고, 그에게 인터뷰에 응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기자님이 쓰는 기사의 주제가 뭐예요?”

“사람이요.”

“사람의 이야기를 쓰는구나, 저는 시를 써요. 저는 시인이에요.”

이름은 김화자. 나이는 69세. 그는 자신을 시인이라고 소개했다. 보기엔 아줌마 같아도 살다 보니 어떤 것도 그냥 스치듯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가졌다. 사람이라는 주제로 글을 쓴다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공감하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대화 상대를 찾고 있는 기자를 대견하게 바라봤다.

한참 호기심이 생겨 그에게 건네고 싶은 질문이 쌓여갈 때쯤, 그의 사촌 언니가 도착했다. 그들은 기자에게 아직 식전이라면 동행하자고 물어봤지만, 오랜만에 만난 그들의 만남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자리를 떴다.

가산디지털단지역 ⓒ투데이신문
가산디지털단지역 ⓒ투데이신문

그리고 그해 12월 2일, 우리는 가산디지털단지역에서 재회했다. 그곳에서 듣지 못했던 그의 이야기를 마저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딸 부잣집, 다섯 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유독 호기심이 많아 틈만나면 뒷산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항상 꿈을 꾸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이 뭘까, 그렇게 생각이 많던 그는 서울에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14살 소녀는 서울에 시집간 언니를 찾기 위해, 고향 집을 떠났다.

가족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자며 설득하고, 혼내도 봤지만 그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서울에 어떻게든 남겠다는 마음으로 시장에서 판매하는 토마토를 다량 구매하고 되팔아 돈을 벌었다. 장사에 소질이 있던 그는 돈을 벌다 보니 공부를 위해 서울에 올라온 사실을 잊어버렸다.

공부를 다시 해야겠다고 깨달았을 때 군인들이 공부를 가르쳐 준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보려 했지만, 언니들과 형부의 만류에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책과 필기구를 얻었다. 그 뒤로 파노라마같이 지나가는 것들을 눈에 담고 쓰기 시작했다. 공부는 많이 못 했지만 무언가를 계속 기록했다.

이후 채소 장사, 물장사, 명동에서 옷 가게, 피자가게, 문구점 등 안 해본 장사가 없었다. 그렇게 열심히 살면서 면목동에 집을 마련하고 부모님을 고향에서 모셔 왔다. 그렇게 행복이 지속될 줄 알았지만 세상은 그에게 냉정했다. 재단사였던 남편을 만나 행복하게 살 줄 알았지만, 어머니의 풍, 교통사고로 인한 남편의 식물인간 판정 등 삶에 지친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 산으로 올라갔다. 산에 올라가 꿈을 꿨던 한 소녀가 모든 것을 포기하려 산으로 올라간 것이다.

높은 산에 올라가 세상에 몸을 던지려 했지만, 우연히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휘어진 나무, 이름 없는 꽃, 사람에게 밟힌 잔디 등 상처받은 것을 발견하게 됐다. 아무도 모르는 그들의 아픔을 보게 된 것이다. 그 아픔을 목격한 뒤 그들을 달래기 위해 세상을 기록했다. 그렇게 시를 썼다.

“외로우면 쓰죠. 외롭고 힘들 때 쓰는 거예요.”

외롭고 힘들 때마다 주변을 관찰하게 되니 시야가 넓어졌다. 아픔이 많은 것들을 보고 있으면 그들을 달래줘야겠다는 생각부터 든다. “이 상처는 언제 났을까, 힘들었구나, 네 상처를 어떻게 메워줄까?” 이런 생각으로 시를 쓰다 보면, 그들을 바라본 시선이 글로 남게 된다. 그렇게 시로 마음을 표현하니, 모르고 있던 아름다운 세상을 발견하게 됐다.

김화자 시인이 보내준 시집 표지와 '첫눈' 시 ⓒ투데이신문
김화자 시인이 보내준 시집 표지와 '첫눈' 시 ⓒ투데이신문

 

첫눈

김화자 시인

밤사이 별나라 내 고향 꿈속에서

아침 눈을 떠보니

하얀 손님이 찾아왔어요.

 

말없이 순박한 모습으로

온 세상을 하얗게 수놓았네요.

나뭇가지에도 하얗게 옷 입히고

작은 풀잎들도 하얗게

화장을 시켜 놓았네요.

 

밤사이 불빛도 없는 뒤뜰 감나무

홍시도 포장을 하고 참새 떼 두리번

단맛 맛보는 까치도

하얀 포장 뜯으려 분주합니다.

 

언제나 찬바람 타고 오는

단골손님이 되었네요.

아름다운 결정체 속에 얼굴 비춰보면

모두가 첫눈에 반하여 사랑하지.

가산디지털단지역에서 만난 김화자 시인 ⓒ투데이신문
가산디지털단지역에서 만난 김화자 시인 ⓒ투데이신문

디지털 기업의 종사자가 많아 직장인이 많을 거라 예상했던 가산디지털단지역은 한산했고, 인터뷰 시도를 해야 하는 기자는 오히려 질문을 받았다. 붉은 머리칼에 연분홍 패딩을 입은 대화상대의 직업은 시인이었고, 잠깐의 대화였지만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이 커 재회를 약속했다.

예측은 어긋났고, 우연은 인연이 됐다. 근래 1호선으로 출근하며, 꽤나 다양한 사람을 상대했던 기자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려는 처음 기획과 다르게 만남을 계획하고 있었다. 승객들이 어디에 모여 있는지 관찰하고, 대화가 시작된 승객과 어떻게든 인터뷰를 이어가기 위해, 흥미로운 주제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기자에게 대화를 시도한 그는 아무 목적 없이, 대화 상대를 찾았다는 기쁨만 얻어갔다. 그는 사람을 관찰하는 것이 아닌, 사람을 보고 있었다.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 마음속에 무엇이 담겨 있을까, 무엇을 담고 어디를 향해 가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해요. 계속 보고 있으면 사람들 속에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다는 게 보이더라고요. 그걸 기록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어요”

그의 말을 따라 오늘은 그냥 지하철을 타보려 한다. 관찰하는 것이 아닌 사람을 보며 그 사람들 안에 무엇이 있는지 자연스럽게 발견하고 싶다. 김화자 시인이 기자에게 말을 건넨 것처럼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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