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소재 아파트서 10년차 경비노동자 스스로 목숨 끊어
관리책임자 갑질 때문에 힘들다고 밝혀…반장직서 강등도
동료·노동단체, 가해자 엄중 처벌 및 고용형태 개선 요구
직장갑질119 “폭언부터 부당지시 횡행…대책 마련해야”

지난 2021년 10월 서울 시내 한 아파트에서 경비원이 업무를 보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지난 2021년 10월 서울 시내 한 아파트에서 경비원이 업무를 보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투데이신문 박효령 기자】 #“관리소장이 ‘저렇게 키도 작고 못생긴 사람을 왜 직원으로 채용했냐. 당장 바꿔라’라고 폭언을 했다”(경비대원 A씨)

#“입주민이 ‘너 공부 잘해라. 못하면 저 아저씨처럼 된다’고 대놓고 비하발언을 했다”(경비대원 B씨)

#“엘리베이터에 똥을 싸놓고는 똥 안치운다고 뭐라고 한다. 경비원은 무조건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라고 사과하는 수 밖에 없다.”(경비대원 C씨)

최근 서울 강남 소재 모 아파트 경비원이 주민 갑질에 고통을 호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한 가운데, 경비노동자의 열악한 근무형태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17일 수사경찰서에 따르면 지난 14일 오전 7시 40분경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위치한 한 아파트 경비원인 70대 박모씨가 단지 내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박씨는 오전 7시 16분경 ‘관리책임자의 갑질 때문에 힘들다’는 내용의 문자를 동료들에게 전송한 것으로 조사됐다.

앞서 10여년간 해당 아파트에서 근무해 온 박씨는 지난해 말 부임한 관리소장의 갑질로 힘들어했고, 사망 일주일 전에는 경비반장에서 일반 경비노동자로 강등된 것으로 파악됐다.

이에 경찰은 구체적인 경위를 조사 중이며 고용노동부에서도 관련 업체들에 대한 사업장 근로감독을 진행할 계획이다.

아파트노동자 서울공동사업단, 전국민주일반노조 서울본부가 17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한 아파트 정문 앞에서 아파트 경비노동자 추모 기자회견을 열고 갑질근절, 초단기 근로계약 근절,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아파트노동자 서울공동사업단, 전국민주일반노조 서울본부가 17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한 아파트 정문 앞에서 아파트 경비노동자 추모 기자회견을 열고 갑질근절, 초단기 근로계약 근절,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거리로 나선 경비노동자들

박씨가 숨진 뒤 동료 경비원들은 아파트 관리 책임자의 부당한 업무 지시와 갑질 등의 내용을 담은 전단을 단지 내 붙이며 폭로했다. 지난 16일에는 관리소장의 퇴진을 촉구하는 규탄대회를 진행하기도 했다.

노동단체들도 즉각 반발에 나섰다. 민주노총 전국민주일반노조 서울본부와 아파트노동자 서울공동사업단 등은 17일 박씨가 사망한 아파트 앞에서 ‘고(故) 대치동 아파트 경비노동자 추모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이번 기자회견에는 사망한 박씨의 동료 경비원들도 참여했다.

이날 단체들은 다시는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고용노동부와 서울시가 철저히 사건을 조사할 것을 촉구했다.

이들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고, 동료를 잃은 노동자들이 불안에 떨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철저한 조처를 부탁한다”며 “여러분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 노동자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도 똑같은 사람인데 경비복만 입으면 인간 취급을 못 받는다. 경비 일을 한다고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야 하냐”고 호소했다.

또한 단체들은 아파트 노동자들이 초단기 계약을 맺기 때문에 관리자들이 근로계약 해지를 무기 삼아 갑질을 하고 있다며 고용형태 개선을 요구했다.

이들은 “고인은 용역업체를 통한 간접고용에 3개월짜리 초단기 계약을 맺은 바 있다”며 “계약에는 24시간 격일제 근무, 9시간 30분의 무급 휴게시간이 명시돼 있었고, 급여는 최저임금이었다”며 “이 같은 부당한 조치를 동의서 등 각종 서류를 통해 본인이 책임지도록 강요받았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무당국인 고용노동부와 서울시가 철저한 조사를 통해 가해자를 처벌할 것을 촉구한다”며 “법률 위반행위가 있었는지, 부당한 대우에 관해 맞는 조치가 이뤄졌는지 철저하게 밝혀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지난 2021년 10월 서울 시내 한 아파트에서 경비원이 업무를 보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지난 2021년 10월 서울 시내 한 아파트에서 경비원이 업무를 보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모욕·폭언에도 시달리는 경비노동자

실제로 많은 경비노동자들이 소장 등 관리 담당자뿐만이 아니라 입주민들에게도 폭언 및 멸시를 받는 것으로 드러났다.

직장갑질119가 지난 15일 발표한 ‘2023 경비노동자 갑질보고서’에 따르면 심층 면접에 참여한 공동주택 종사 노동자 9명은 입주민 갑질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괴롭힘 내용은 △고성·모욕·외모 멸시하는 표현 △천한 업무라고 폄훼하는 경우 △업무상 적정범위를 벗어난 부당한 업무지시와 간섭 등이다. 이를 두고 직장갑질119는 업무 수행 과정에서 발생한 입주민과의 갈등에서 괴롭힘이 시작됐다고 분석했다.

9명 중 6명은 최근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강남 아파트의 70대 경비노동자와 마찬가지로 기존 업무 외 부당한 지시를 받는 등 ‘원청 갑질’을 겪은 적 있다고 응답했다.

경비노동자 D씨는 “관리소장 지시로 갑자기 정화조 청소를 한 적 있다”며 “당시 분뇨가 발목까지 차오르는 곳에서 작업하고 나오는 바람에 독이 올라 2주 넘게 약을 발랐다”고 고백했다.

노동자 9명 중 4명은 입주민과 갈등이 발생해 해고를 종용당하거나 강제적으로 근무지를 변경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다른 2명은 실제 동료가 입주민의 민원으로 인해 근로관계가 종료됐다고 답변했다.

이들은 해고의 두려움으로 인해 무대응하거나 해결할 능력이 없어 대응을 포기한 것으로 조사됐다.

또한 원청인 입주자대표회의가 용역비를 지급하지 않아 공동주택 노동자에게 임금이 지급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이외에도 용역업체가 강제로 바뀌는 등 노동권이 저하거나 퇴직금 및 연차휴가 등 권리가 박탈된 사례도 있었다.

[사진제공=게티이미지뱅크]
[사진제공=게티이미지뱅크]

유명무실 ‘갑질방지법’

일명 ‘경비원 갑질방지법’으로 불리는 공동주택관리법 시행령 개정안이 제정된지 1년 반이 흘렀음에도, 최근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경비원에 대한 갑질 사건이 잇따르자 해당 법이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갑질방지법은 지난 2020년 서울 종로구 우이동 소재 모 아파트 경비원 최희석씨가 입주민 갑질로 사망한 것을 계기로 마련돼 이듬해 10월부터 시행됐다. 개정안에는 공동주택 경비원의 업무 범위를 설정하고, 입주자대표회의 임원(회장·감사) 선출방법을 개선하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지난 9일 같은 아파트에서 청소노동자로 일하던 70대 김모씨도 청소 용역업체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고 다음날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해 12월에는 서울시에 위치한 한 아파트에서 50대 입주민이 도끼로 경비실 창문과 집기를 부수는 등 난동을 부려 경찰에 입건됐다. 관리사무소가 폐가구를 3~4주간 방치하는 등 일을 제대로 안 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처럼 대부분 경비원들은 단기 계약으로 인한 고용불안으로 인해 갑질 등 문제를 선뜻 제기할 수 없고, 관리소장과 경비원의 소속이 달라 근로기준법상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되지 않아 법적으로 보호되지 않아 갑질 등에 그대로 노출돼 있는 실정이다.

직장갑질119는 경비노동자들이 입주민·용역회사 갑질에 노출되는 근본적인 이유로 ‘간접 고용 구조’와 ‘초단기 근로계약기간’을 지목했다.

이들 단체는 “조사 대상 노동자 9명 모두 1년 미만의 단기 근로계약을 반복해서 체결하는 고용 형태”라며 “경비회사에 고용된 경비노동자의 계약기간은 더욱 짧았다. 5명 중 4명은 3개월 단위로, 1명은 1개월 단위로 계약을 체결한 실정이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한국노동연구원이 지난 2020년 발행한 보고서에 따르면 경비원 94%가 1년 이하의 단기 계약을 맺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비원의 약 80%는 위탁관리업체 소속이었다.

직장갑질119는 공동주택 노동자를 갑질로부터 보호하는 방안으로 △실효성 있는 공동주택 노동자 보호 체계 마련 △직접 서비스를 제공받는 입주민 및 입주자 대표회의에 대한 책임 강화 △직접 고용 구조로의 전환을 제시했다.

임득균 노무사는 “갑질을 행한 입주민, 관리소장에게 처해지는 처벌이 너무 약하고, 3개월 초단기 계약 구조와 용역회사에 고용되어 있는 다단계 고용구조로 인한 고용 불안 때문에 노동자들은 갑질에도 참고 일해야 한다”며 “갑질 방지 및 처벌 규정을 강화하고 고용불안을 해소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현행 공동주택관리법으로는 입주민이나 원청업체 관리소장으로부터 아파트 노동자를 보호할 수 없다”며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적용대상을 입주민, 원청회사 등 특수관계인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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