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화 지음 | 392쪽 |140×210 | 휴머니스트 | 2만1000원

ⓒ휴머니스트
ⓒ휴머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지현 기자】 ‘반성문 2부, 탄원서 2부, 근절서약서 1부, 심리교육수료증(3일), 상담사의견서(3일), 소감문…’ 이는 한 감형 컨설팅 업체가 만든 55만원짜리 패키지 상품 구성으로 온라인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다.

이같이 성범죄 가해자를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인 ‘성범죄 가해자 지원산업’의 등장으로 가해자는 법적·감정적 혜택을 누리고 있다.

도서 <시장으로 간 성폭력>은 이러한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성폭력 피해자·여성단체 활동가·변호사와의 심층 인터뷰와 현장 연구를 통해 성범죄 가해자 지원산업이 어떻게 등장하고 확장했는지부터 이로 인해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그 속에서 성폭력 담론이 어떻게 재구성됐는지 살펴본다.

저자는 가해자가 유리한 결과를 얻기 위해 전문가에게 법적 정보와 서비스를 구매하는 행위가 시장원리에 맞는 ‘합리적 행위’로 용인되고 있는 현실을 고발한다. 이렇다보니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대응하기 위해 국가 법률지원제도만이 아니라 자신의 자원과 역량을 투입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결국 성범죄 재판은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 과정이 아닌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경쟁하고 자본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투쟁의 과정으로 전락했다고 지적한다.

지난 몇 년간 한국의 미투운동에서 목도한 것과 같이 더 이상 피해자들은 성폭력 피해를 수치스럽거나 숨겨야 할 것으로만 인식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말하고, 요구할 때 그 과정을 통해 힘을 얻었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았는데, 피해자들은 싸우는 주체로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고 있으며, 적극적으로 자신과 지지자의 재판을 모니터링하면서 법적 공간을 투쟁의 공간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피해자들은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데, 현재 피해자에 대한 법적 권리 보장의 내용들은 피해자의 보호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체계가 부족한 편이다. 따라서 일본, 독일 등 일부 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는 피해자참가제도 등을 검토하여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직접 질문하고 가해자의 책임을 추궁할 수 있게 함으로써 말하는 주체의 위치로 피해자를 이동시킬 필요가 있다.

- 〈Chapter 5 ‘성폭력 정치’의 재구성을 위한 제안〉 중에서(341쪽)

 

책은 성범죄 가해자가 법시장의 합리적 소비자로 이동하면서 피해자의 위치가 달라진 점에도 주목한다. 저자는 가해자 전담법인의 전략이 성범죄 판례들을 오염시키고 법적 판단 기준을 바꾸는 동안 가해자의 억울함에 과잉 공감하면서 피해자를 의심하는 태도로 흐르고 있다고 지적하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새로운 피해자 담론이 강화됐다고 우려한다. 그럼에도 피해자가 주체가 되기 위해 법정에서, 사회에서 피해자의 목소리에 충분히 귀를 기울일 것을 제안한다.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