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br>▸철학박사<br>▸​​상지대학교 조교수<br>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최근 기시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1박 2일 동안 한국에 다녀갔다. 경색된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회복하려는 현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고, 여기에 일본 측이 화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경색된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현 정부의 의지가 너무 강력한 나머지 대통령의 입에서 헌법에 위배될 수 있는 각종 발언이 나왔다. 윤석열 대통령이 <워싱턴포스트(Washington Post)>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100년 전에 일어난 일 때문에 뭔가 절대 불가능하다거나, 그들(일본인)이 100년 전 역사 때문에 (용서를 구하며)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것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 또한 윤석열 대통령의 일본 기업에의 강제 징용 피해자에 대한 제3자 변재 제안 역시 대법원의 판결을 무력화하는 것으로 삼권분립을 표방한 헌법 정신에 배치된다.

이렇게 위헌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윤석열 대통령과 현 정부가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고, 여당과 수구언론이 이것을 강력하게 지원하고 있다. 특히 여당 국회의원의 경우 총선을 1년 앞둔 상황에서 자신들에게 올 비난과 그로 인한 낙선의 위험을 감내하면서까지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표면적으로 윤석열 정부, 여당, 수구언론이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요구하는 이유는 북한의 핵위협 때문이다. 그런데 북한이 핵무기로 한국을 공격하면 북한 역시 핵으로 인한 피해를 입게 된다. 또한 한국이 북한의 핵공격을 사전에 차단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한 국방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이렇게까지 무리하면서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을 추구하는 것은 저들이 정말 역사의식 없는 매국노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그만큼 강력한 압력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 강력한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미국 뿐이다. 이 시점에서 필자는 본 지면을 통해 가쓰라-테프트 밀약(Taft–Katsura agreement, 桂・タフト協定)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가쓰라-테프트 밀약은 1905년 일본 총리 가쓰다 다로(桂太郎, 1848-1913)와 당시 미국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Jr., 1858-1919) 대통령의 특사인 미국 전쟁부(United States Department of War)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1857-1930)가 도쿄에서 맺은 은밀한 협정이었다. 주요 내용은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배 하는 것을 확인하는 내용이었다. 논란의 소지는 많지만, 일본에서 “協定”이라고 쓰고, “agreement” 역시 협정이란 뜻이 있음을 감안하면 꽤 공식적인 국가 사이의 약속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밀약 덕분에 일본은 러시아를 누르고 조선의 식민지화를 빠르게 수행할 수 있었고, 미국 역시 러시아를 견제하고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을 수 있었다. 덤으로 당시 대통령 루즈벨트는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러일전쟁을 중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다.

문제는 당시 조선과 미국의 관계였다. 1882년 조선은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을 맺었다. 조선이 아시아 밖의 나라와 맺은 최초의 외교 조약이었다. 그런데 이 조약의 제1조는 조선과 미국 중 한 나라가 외교적 위험에 빠지면 다른 나라가 위험에 빠진 나라를 돕는다는 내용이었다. 근대적 외교관계를 모르던 조선 조정은 이후 열강들의 침략을 당할 때 미국과 맺은 이 조약을 금과옥조로 여겼다. 그러나 미국이 맺은 상당수의 조약에서 위의 조항은 관용어처럼 들어가 있었다. 오히려 미국은 겉으로는 저 조항을 앞세워 조선이 자신들의 친구인 것처럼 외교술을 펼쳤지만, 실제로는 조선에서 각종 이권을 따냈고, 결국 자신들의 필리핀을 향한 야욕으로 인해 저 조항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외교에서 엄연한 힘의 논리가 지배하며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긴다는 것도, 미국이 북한의 남침으로부터 한국을 구해준 혈맹이라는 것도 모두 사실이다. 그런데 이 두 사실이 결합하면 미국이 한국전쟁 당시 한국을 도와준 것 역시 순수한 우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이익에 대한 철저한 계산의 결과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미국이 현재의 한일관계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면, 이것 역시도 한국의 북핵 위기를 막기 위함이 아닌 미국의 이익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쓰라-테프트 밀약 때 미국이 러시아를 견제하고 싶었던 것처럼, 지금 미국이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외교적 의도에서 비롯됐을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일본과의 관계 개선과 북핵 위기를 비롯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도를 찾을 때 철저하게 우리의 이익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3.1절 기념사에서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했다”고 발언해 큰 공분을 일으켰다. 가쓰라-테프트 밀약과 당시 조선의 미국을 향한 시각을 생각한다면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의 외교적 행위가 비난받아 마땅할 순 있지만, 이것이 국권을 빼앗긴 가장 큰 원인은 아니었고, 미국이 조선을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이 조선의 국권을 강제로 빼앗을 이유도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윤석열 정부는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고 있는가. 힘의 논리와 자국의 이익이 외교의 최우선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가. 우리의 역사는 제대로 알고 있는가. 이것을 묻고 싶다.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