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br>▸철학박사<br>▸​​상지대학교 조교수<br>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윤석열 정부의 강제징용 보상 방안에 대한 많은 비판이 일어나고 있다. 야당은 물론이고 역사학계, 시민단체 등 사회 각계각층에서 이번 윤석열 정부의 외교를 ‘굴욕외교’로 평가하고 있다. 길을 걷다보면 ‘민생에 집중하겠다’, ‘괴담유포’라는 여당의 플래카드와 ‘피해국가 기업이 왜 배상을 합니까?’, 올해의 60갑자를 이용한 ‘계묘국치’라는 야당의 플랭카드가 전쟁을 벌이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펼치는 주장의 핵심은 ‘과거 때문에 미래를 막을 순 없다’는 것이었다. 경제와 안보가 불안한 상황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일본과 관계를 복원해야 한다는 논리다. 그런데 일본과의 관계와 관련하여 비슷한 논리는 이전에도 있었다. 바로 박정희 정권 당시 있었던 ‘한-일 양국의 국교관계에 관한 조약’, 이른바 ‘한일조약’이다.

한일조약은 1965년에 체결된 외교 조약이다. 1945년 해방 이후 한국과 일본은 오랫동안 외교관계를 복원하지 않았다. 실제 관련 교섭은 1951년부터 시작되었지만, 14년 동안 교섭이 마무리되지 않았다. 이렇게 오랫동안 외교관계 복원을 위한 교섭이 정체되는 것은 세계 역사상 드문 일이었다. 이것은 36년간의 일제강점기에 관한 상처가 그만큼 컸고, 그만큼 일본이 사죄와 배상에 미온적이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1964년 3월 박정희 정권은 한일외교정상화 방침을 밝혔다. 그리고 여기에 반발해 일어난 시민들의 항쟁이 바로 ‘6.3항쟁’이다. 박정희 정권이 한일외교정상화 방침을 밝히자 3월 9일, 야당 소속의 정치인과 각계 인사들이 서울 종로예식장에 모여서 구국선언을 발표하고 투쟁위원회를 발족했으며, 여기에 대학생, 종교인, 보훈단체, 그리고 시민들이 참여하면서 해방 20년 만에 최대 반일 시위가 시작됐다.

6월 3일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했고, 시위 진압을 위해 군을 투입하고자 미국에 양해를 요청했다. 미국은 이것을 받아들였는데, 한일조약 체결에 미국의 중재, 혹은 압력이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베트남 전쟁이 가시화 되는 등 사회주의 국가와의 냉전이 가속화하는 상황에서 한일관계 정상화는 중국과 소련에 맞서기 위한 중요한 포석 중 하나였다.

1964년 3월 24일, 서울에서 5000여명의 대학생들이 한일수교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 한편, 같은 날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8만여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여기에는 대학생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참여했다. 이에 정부는 대학생들이 시위를 위해 모이는 것을 막기 위해 휴교령을 내렸다. 시위를 주도하거나 참여한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은 구속되고 감옥에 갇혔고, 많은 시민과 대학생들이 연행됐다. 박정희 정권의 대응을 감안하면, 당시 박정희 정권은 시민들의 목소리를 전혀 듣지 않았다.

물론 박정희는 한일 국교 정상화의 필요성을 호소하고 “혐일이 아닌 극일, 즉 일본을 이기자”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담화문은 대화가 아닌 일방적인 발표다. 거기에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은 트럭 1000대를 징발해 시위주동자를 무인도에 격리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해치우자는 제안까지 했다.

그렇게 시민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강행 체결된 한일조약은 안보와 경제에 도움이 되었을까? 북한의 위협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핑계는 전범국가이자 패전국인 일본의 재무장 시도의 빌미로 작용했고, 북한은 여전히 핵을 만들고 있다. 박정희를 추앙하고 북한에 호전적인 수구 세력이 정권을 잡았을 때 천안함이 침몰했고, 연평도는 북한의 포격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아직도 휴전·분단 상태다.

1960년대에 비해 경제적으로 한국은 크게 성장했다. 그런데 그 경제 성장의 가장 큰 수혜는 대기업이 얻었다. 그러나 대기업 중심의 성장은 한국 경제에 부정적 영향도 많이 끼쳤다. IMF 당시 기업들이 쓰러지자 한국 전체가 휘청거렸고, 정경유착, 노동조합 탄압, 비자금 조성 등 한일조약의 수혜를 입은 기업들의 부정부패는 헤아릴 수 없다.

오히려 이익은 일본이 얻었다. 일본이 한국에 내놓은 금액은 한국보다 훨씬 식민지 기간이 짧고 피해를 덜 입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턱없이 적었고, 그나마도 상당수는 차관, 즉 돈을 빌려주는 형태였다. 심지어 일본 정부는 일본 국내에 이 돈을 ‘한국의 독립축하금’이라고 홍보했다. 한일조약 이후 일본은 한국의 지하철 공사에 참여하는 등 각종 기간시설 확충에 참여하는 수혜를 입었다. 또한 한일조약 체결을 위한 교섭 과정에서 일제 강점기 배상을 모호하게 처리함으로 인해 일본은 위안부, 강제징용피해자에 대한 배상은커녕 역사적 사실조차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제강점기에 피해를 입은 위안부 피해자, 강제징용 피해자는 아무런 보상도 명예회복도 누리지 못하고 있다.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날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유명한 휘호 중 하나가 ‘견리사의(見利思義)’다. 이익을 보게 되면 의로움을 생각하라는 뜻이다. 이미 이로움을 좇다가 의로움을 저버리면 치러야할 대가가 큼을 한일조약을 통해 확인했다. 역사가 가르쳐주는 교훈을 모르면 배우면 된다. 그러나 역사가 가르쳐주는 교훈을 외면하면 같은 고통, 아니 더 큰 고통을 겪게 된다.

마지막으로, 헌법전문에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적혀있다. 윤석열 정부의 이번 일본과의 외교는 헌법 전문에 적힌 정신을 위반한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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