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br>▸철학박사<br>▸​​상지대학교 조교수<br>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최근 출산한 아동을 신고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지난 6월 21일 수원의 한 아파트 냉장고에서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신생아의 시신 2구가 발견된 것을 계기로, 정부가 출산기록은 있지만,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유령아동’이 실제 생존해 있는지 전수조사에 나선 것이 그 계기가 됐다. 감사원이 2015년부터 2022년까지 태어난 신생아 중 출생 기록은 있지만 출산신고는 되지 않은 아동 2236명 중 1%인 23명을 표본 조사한 결과 최소 3명은 숨졌고, 1명은 유기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다. 즉 아이를 낳고 신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버리거나 죽음에 이르게 만든 사례가 있음을 의미한다.

국가와 인종을 막론하고 아이의 탄생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정치적으로 아이의 출산을 통해 인구를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은 공동체의 세금 수입과 국방을 위해서, 경제적으로 산업혁명 직후까지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해서 매우 중요했다. 특히 농업의 경우 기계화 이전까지 인간의 노동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산업이었고, 기계화가 많이 이루어진 현대 사회에서도 농업 인구는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소위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더라도, 아이의 출산은 많은 인고(忍苦)와 여성의 생명을 건 출산의 과정을 거친 결과이며, 생명 자체의 소중함으로 인해 매우 숭고한 행위로 평가받는다. 그러므로 아이의 출산은 기쁨이요 축복이었으며, 각종 문화적·종교적 유산(遺産)을 만들어냈다.

조선시대에도 아이를 버리는 행위에 대한 엄벌과 버려진 아이에 대한 대책이 존재했다. 기본적으로 버려진 아이는 제생원(濟生院, 훗날 혜민서(惠民署)로 이름이 바뀌었다)에서 돌봤다. 특히 세조 12년(1466)에는 숭례문 밖에 아이를 버린 사람을 잡아 국문하기 위해서 의금부(義禁府), 사헌부(司憲府), 형조(刑曹)가 동원됐다. 심지어 이 버려진 아이가 혜민서에서 치료를 받다가 사망하자, 세조는 아이의 치료를 담당했던 혜민서의 관리를 잡아다가 국문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제도는 근대까지 이어져서, 고종 32년(1895)에 내무아문(內務衙門)에서 각도에 전달한 훈시(訓示) 13조에 “내버린 아이를 반드시 법을 마련하여 기를 것”이라고 명시돼 있다.

아이를 버리는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차이가 없어 보인다. 『효종실록(孝宗實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등장한다.

북변에는 도망간 백성을 잡아서 돌려보내는 법이 있으나, 마을이 반이나 비었으므로 남은 백성들이 부역을 견디지 못해 사내아이를 낳으면 심지어는 젖을 주지 않고 버린다고 하니, 아,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자애로운 정은 어리석은 자나 지혜로운 자나 똑같은 것인데 사랑을 끊어서 버리고 돌아보지 않으니, 이 어찌 백성들의 본마음이겠는가. 이는 필시 절박한 근심이 몸에 다가와 보호할 수 없어서 이런 변이 있었을 것이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 은혜를 아래에까지 입히지 못하여 우리 백성들을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여기까지 말하다 보니 마음을 가눌 수 없다.

돌아보건대 함경도는 가장 멀고 육진에 이르러서는 더욱 떨어진 지역이므로 왕의 교화가 적절히 펼쳐지지 못하며 귀와 눈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수령들이 꺼림없이 탐학하고 마음대로 긁어모으기 때문에 백성들이 생활을 유지하지 못해 자손을 보존할 수 없어서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이니, 아픈 마음을 금할 수 있겠는가.

이 일을 들은 뒤부터 내 마음이 참담하여 음식이 넘어가지 않는다. 경들은 차마 견딜 수 없는 나의 마음을 본받아 떳떳한 하늘의 도리와 참된 이성으로 간곡히 타일러 기어코 교화를 밝히되, 만일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법을 엄히 세워 다스리라. 그리고 괴로움을 물어 마음을 다하여 강구하되, 백성들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일과 오랜 폐단으로 가장 백성의 피해가 되는 것과 악습을 없애고 보호할 수 있는 계책에 대해 일일이 보고하라. 먼 곳에 사는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자식을 낳아 기르도록 하는 도를 이루게 하는 것이 어찌 지방 관리와 조정 신하들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효종실록』, 제20권, 효종 9년(1658) 8월 19일 갑신 2번째 기사

위의 기록을 보면, 과도한 세금과 부역을 이기지 못하고 북방으로 도망친 백성들이, 도망친 북방 역시 조정의 감시가 미치지 못하는 지역임을 이용해 탐관오리들의 수탈을 받자, 이것을 견디지 못하여 낳은 아이들을 버리는 사례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효종은 이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겨서 아이를 버리는 원인 자체를 근절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할 것을 명했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아이를 낳고도 출생신고를 하지 않고, 심지어 아이를 버리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과거와 같이 가난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도덕적 지탄을 받기 싫어서 일 수도 있다. 그리고 성적인 폭력의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보다 훨씬 더 꼰대스럽다고 평가받는 조선시대에도 아이를 버리는 행위는 용서받지 못했고, 버려진 아이는 국가의 책임이었다. 인구 감소를 우려하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출생신고조차 되지 않고 죽임을 당하는 아이가 있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하고 슬픈 현실이다. 그리고 국가가 책무를 다하겠다는 선언은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반가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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