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br>▸철학박사<br>▸​​상지대학교 조교수<br>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시쳇말로 ‘역대급’으로 비가 내렸다. 1년 동안 내릴 비의 1/3이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로 인한 피해도 매우 컸다. 특히 충청남도, 충청북도, 세종특별자치시 등 중부지방에 그 피해가 집중됐다. 충청북도의 괴산댐은 물이 넘쳤고, 충청남도 공주에는 이재민이 공주대학교로 피신했다. 특히 충청북도 청주의 오송에서는 지하차도가 침수되면서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번 회차 칼럼이 게재되었을 때는 더 이상의 피해가 없길 바라고, 희생당하신 분의 명복을 빌며, 수해로 피해를 입으신 분들이 빨리 일상을 회복하시길 기원한다.

필자는 피해자를 향한 안타까움과 함께 위정자들을 향한 분노도 일어났다. 지난 12일 대통령 부인 김건희씨가 방문지인 리투아니아에서 명품 편집샵에 드나든 사실이 현지 언론에 의해 보도됐다. 이에 대해 민주당 송갑석 최고위원은 “김건희 여사가 (리투아니아에서) ‘명품 쇼핑’을 즐긴 그날은 전국 호우위기 경보가 2단계로 격상하고 수도권 267건, 부산 53건, 대구·경북 150건, 광주 100건이 넘는 피해신고가 접수된 날”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윤석열 대통령은 리투아니아 방문 후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깜짝 방문했다.

<한겨레>의 7월 17일자 보도에 따르면, 폭우 피해가 확산하는 상황에서 윤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전격 방문한 것과 관련해 ‘출발 전 취소를 검토하지 않았냐’고 기자들이 묻자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그 시간이 아니면 우크라이나를 방문할 기회는 다시 없을 것 같았고, 대통령이 당장 서울로 가도 그 상황을 크게 바꿀 수 없다. 수시로 (대통령이 피해 상황을) 보고받고 필요한 지시를 내리는 게 필요하겠다 해서, 하루에 한 번 이상 모니터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한 바 있다. 라고 전했다. 그리고 윤 대통령이 귀국 후 대통령으로서 보인 반응은 ‘과연 하루에 한 번 이상 모니터 한 것이 맞나?’라는 생각이 드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는 문득 조선시대에 위정자들이 홍수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궁금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폭우’라는 단어로 검색하면 약 160여개의 기록이 등장한다. “기록의 조선”답게 폭우가 내린 지역의 피해 상황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그만큼 꼼꼼한 상황 보고가 이루어졌다는 의미다. 이러한 보고에 대한 대응 결과가 모두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의 기록은 ‘구휼(救恤)’이나 ‘휼전(恤典 : 조정에서 이재민을 구휼하는 은전)’이라는 단어로 마무리된다.

흥미로운 것은 홍수가 일어났을 때 신하들의 왕을 향한 비판과 왕의 사과가 많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서 『효종실록』의 효종 5년(1654) 6월 17일자 기사에는 영돈령부사 이경석(李景奭)이 홍수로 큰 수해가 일어나자 “하늘이 우리 전하를 크게 깨우쳐 격동함이 또한 밝습니다. 이 크게 깨우쳐 격동함을 만나고서도 다시 크게 두려워하며 크게 고치는 조치를 하지 않으면, 하늘은 전하를 인애(仁愛)하는데 전하는 하늘의 뜻을 몸으로 행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하늘인들 어찌 번번이 경계해 고하겠습니까? 여기에 생각이 미치면 어떻게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라고 상차(上箚)했다. 이에 효종은 “경의 간절한 충성이 조금도 해이해지지 않아서 일에 따라 옳게 간하니, 가슴에 새겨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이후로 모든 토목 공사를 일체 정지하고 상방의 직조(織造)도 중지해 파하도록 할 것이며, 시행할 만한 일도 비국으로 하여금 의논해 시행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한심스럽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과격한 비판에 효종은 분노하거나 벌을 주는 대신 신하들의 간언을 모두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다. 이 외에도 『명종실록』, 『인조실록』, 『숙종실록』 등에서 홍수가 나자 왕이 자신의 부덕함으로 모든 잘못을 돌리고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사과하는 모습이 확인된다.

홍수에 대한 기민한 대처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태종실록』에서는 고성 지역에 홍수가 나자 태종이 물가에 있는 백성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으니 일일이 방문하여 이동시키라고 명했고, 세종 대에는 아예 수해의 가능성이 있는 곳에 사는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두라고 명했다.

비단 백성들의 안위를 살피는 것에 머물지 않았다. 성종 대에는 감옥에 갇혀 있는 죄인들이 수해를 입었을까 염려되니 자세히 알아보고 보고하라는 명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성종실록』 33권, 성종 4년(1473) 8월 1일 경신 4번째 기사) 중종 대에는 공신(功臣)들의 중삭연(仲朔宴)을 정지시켰고,(『중종실록』 54권, 중종 20년(1525) 7월 30일 2번째 기사) 숙종 대에는 영제(禜祭), 즉 비가 그치기를 바라는 의례를 치렀다. 특히, 조선시대의 의례는 좋은 날을 선택해서 치렀는데, 이 영제는 날짜를 선택하지 않고, 다음 날에 바로 시행했다. 또한 죄인의 석방이나 진연(進宴)의 중단도 확인된다.

수해가 한반도를 덮쳤고, 이제 본격적인 폭염과 태풍도 올 수 있다. 그런데 대통령은 해외 순방 성과를 알리기 급급하고, 대통령실은 대통령이 와도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투로 기자의 질문에 답했다. 그리고 수해에 이권 카르텔 운운하면서 재해마저 정쟁화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조선시대에도 수해 상황을 꼼꼼히 조사하고, 수해에 미리 대비하며, 수해가 발생하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 피해를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지금이 조선시대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필자뿐일까? 현 정권이 과거 정부에게 책임을 묻는 것을 좋아하니 한 마디 더 하자면, 판데믹 때도 이렇진 않았다.

마지막으로 1865년에 경상도, 전라도 지역에 수해가 발생하자 (자신의 무능과 부도덕으로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데 일조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고종이 발표한 반포문을 소개하며 이번 회차의 글을 마친다. 고종도 현 정부처럼 대응하진 않았다.

아, 나같이 덕 없는 사람이 어렵고 중대한 자리를 이어받았기에 밤낮으로 두려운 마음에 감히 편안할 때가 없었다. 행여 다스림이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고 은혜와 혜택이 아래에까지 미치지 못하여, 위로는 하늘의 돌보는 뜻에 보답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추대하는 마음에 부응하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밤낮으로 국사에 매진하여 생각이 온통 거기에 가 있었다.

올해 -(중략)- 다행히 여러 도(道)의 농사 형편이 추수를 기대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위안시켜 줄 듯 하였다. 그리하여 태풍과 폭우가 때없이 몰아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여, 영남(嶺南) 지방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 호남(湖南) 지방에서도 재해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다. 익사하거나 압사한 인명과 유실된 가옥이 수백에서 천을 헤아리며 선박과 염분(鹽盆) 등 민생에 없어서는 안 될 것들도 바람에 부서지고 물결에 쓸려가지 않은 것이 없다. 이러한 놀랍고도 참혹한 보고가 연이어 올라왔으니, 이 무슨 까닭이며 이 무슨 변고란 말인가?

이상한 기상이 나타난 데에는 반드시 초래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조용히 생각해 보건대 누구의 탓이겠는가? 실로 어리석고 덕이 부족한 내가 은밀히 보살펴주는 하늘의 인자함과 말없이 도와주는 조상들의 은혜가 이르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죄 없는 백성들이 이런 온갖 흉한 재앙을 겪게 되었어도 구해내지 못하게 된 것이다. -『고종실록』 2권, 고종 2년(1865) 8월 17일 기유 4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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