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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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솔뫼의 소설집 『미래 산책 연습』(문학동네 2021)은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이 사건의 역사적 면면을 치밀하게 탐구하거나 재현하기보다는 그저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산책한다. 화자는 이제는 부산 근대역사관이 된 미문화원 건물에 들어가 내부를 거닐어보고, 그 건물을 창가에서 볼 수 있는 오래된 아파트들의 내부에 들어가기 위해 부동산 매물을 구경한다. 그러다가 얼떨결에 구하게 된 집의 소유주 최명환은 젊었을 적 김은숙과 같은 성당에 다녔었던 일이나 사건 당일 근처에서 근무하던 중 불이 타는 냄새를 맡았던 기억 등을 들려준다.

부산 구도심의 생활인이 되어 80년대 민주화 투쟁의 지난한 역사 속 한 장면을 동네 빵집에서 흘러나오는 빵 냄새처럼, 낡은 목욕탕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일상으로 맞아들이는 무심함이 이 책의 매력이다. 화자는 그러한 사건이 있었던 듯 없었던 듯, 그 일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생활함으로써 지난 역사를 증명해야 할 의무로부터 부산을, 부산의 시민들을 해방시킨다. 나아가 그러한 사건이 벌어졌어야 할 역사의 비극적 필연성을 물에 탄 물감처럼 흐리고 반투명하게 희석하여 조용히 흘려보낸다. 이처럼 다른 세계, 다른 시간을 상상하는 가운데 “새로운 세계를 스스로 믿고 살아내어 미래를 현재로 끌어당”기는 연습이 반복된다.

상처를 간직한 채로 풍요와 쇠락을 반복하는 이 오래된 도시를 살아내는 것의 의미를 되짚는 가운데 김수우 시인의 시집 『뿌리주의자』(창비 2021)를 함께 읽는다. 항구와 어시장, 점집과 슈퍼마켓 등이 어지러이 뒤섞인 부산의 풍경 속에서 시인은 태초의 감각부터 생활의 고단함, 혁명의 장구함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위의 이미지들을 포착하여 부지런히 길어 올린다. 바다에서 어획하여 어시장에 지천으로 널려 있을 심해의 생물들로부터 심원한 우주의 섭리를 엿보는 구절들은 단단하면서도 흥미롭게 다가온다. 빨간 대야 위에 엎어진 문어는 “신의 단호한 눈물방울”로서 수억 년의 세월에 걸쳐 멸종을 견디며 “험준한 고독으로 푸른 먹물을 길러낸” 존재이다(「문어」). 건조대에 매달린 가오리는 “뼈와 날개를 가진 바다를 증거”하기 위해 “심연의 계산법”을 온몸으로 외치며 “쩐 내 나는 묵시록”이 되어가는 중이다(「가오리」).

우주의 이력을 닮은 심해의 기억을 간직한 생물들이 지상에서 엽서 한 장의 부피로 말라가는 시간은 신선한 현재를 빛바랜 과거로 변모시키는 마술적인 시간이다. 여성의 노동이었을 그 일은 “용왕을 섬기던 엄마가 쌓는 유일한 경배”이자 삶의 거친 세목들을 초월한 끝에 “투명한 살점과 가시를 드러내는 영원”을 조우하는 일이기도 하다(「소금 엽서」). 바다는 인간이 닿을 수 있게 지상에 내려앉은 우주와 같아 무망한 인간사로부터 세상의 원리를 추상해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인간은 그런 바다의 능력을 굿이나 점과 같은 비의(秘儀)적인 의식을 통해 빌어다 쓰며 “삶이 파도”로 솟구치게 하고, “눈물은 물고기가 되어 바다로” 되돌아가게 한다(「제의(祭儀)」). 바다를, 우주를 벗하며 산다는 것은 현실과 그 너머를 물결처럼 오가며 흔들리는 일, “죽음도 삶도 모두 춤”인 듯, “죽은 자도 산 자도 출렁이는 빗방울”인 듯 흔들리는 일이다(「흔들의자」).

흔들림을 숙명처럼 여기며 살아온 이들에게 “‘옥황장군’ ‘용궁대신’ ‘서보살’ 점바치 골목 간판들”은 언제든지 펼쳐들 수 있는 한 줄 경전이었을 것이고 “누군가의 가난, 누군가의 혁명”을 거름으로 삼아 다시금 살아나갈 밑천이 되었을 것이다. “힘들면 순간을 그 압축을 보고 더 힘들면 영원을 그 팽창을 보”는 법을 가르쳐주었을 것이다(「아침」). 시인은 도시의 생활 속에 마주치는 세인들의 범속한 철학을 종요롭게 여기며 시로 간직하고자 한다.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삼켜내는 바다처럼 누군가의 슬픔이든 고됨이든 가리지 않고 시로 기억하려 한다. 그러한 태도는 “미끄럼을 따라 빽빽한 지붕들이 심심하게 이어”진 산복도로 어느 비탈에서 주워든 실 한올에도 무수한 삶들이 촘촘히 매달려 아득하게 얽혀 있음을 읽어내게 한다. “삶은 방향일 뿐이야 무게도 길이도 아니야//날개도 중력도 없이 다만 부드러운 방향만 보여주는”(「한올의 실」).

생활과 일상의 잡다함으로부터 만물의 셈법을 건너다보는 시인의 꾸준함은 자신이 뿌리내린 곳을 증명하는 동시에 초월한다. “내 사랑을 시적 장치로 삼지 않고/변명과 핑계를 암탉처럼 기르지 않고/합리를 사악한 헌금처럼 뿌리지 말”자는 그의 다짐이, “병든 혁명과 싸우는 데 어떤 이론도 소용없고/찌든 냄비를 닦는 데 낯선 방정식은 필요 없”다는 그의 단언이 묵직하게 와닿는 까닭이다(「뿌리주의자」). 자신이 뿌리내린 바로 그곳이야말로 세상의 이치와 우주의 원리가 약동하는 곳임을, 그렇기에 더욱 굽어살펴야 하는 곳임을 깨우치게 하는 이 시집의 덕목은 박솔뫼의 소설집을 다시금 펼쳐보게 한다. 『미래 산책 연습』의 화자는 최명환의 집 소파에 앉아 “당장 처리하고 신경써야 할 생활의 여러 문제들은 떠오르지 않고 한 사람의 시민으로 혹은 인류의 일원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신비로운 체험 속에 “현재를 살고 있는 나는 지금 어떤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가를 생각”하며 “나 자신을 멀리서 바라보며 인식하게 되는 드문 상태”에 놓였다 풀려난다. 생활의 치열함으로만 굴러가는 이 세계로부터 다른 세계를 건너다보는 연습을 두 권의 책이 다른 듯 같은 표정으로 우리에게 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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