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조선이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인 태조 3년(1394) 11월 19일, 정안군 이방원(李芳遠, 훗날 태종)이 명(明)에 사신으로 간다. 한 왕조의 왕자가 외국에 가는 것은 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닌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서 고려 말 원(元)의 간섭이 심할 때 고려의 왕자들은 반드시 원에 가서 원의 공주와 혼인해야 했다. 고려가 원의 부마국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의 왕자가 원에 있는 동안 고려 왕자는 겉으로는 원의 사위지만, 실제로는 원에 볼모로 잡혀있었다. 그리고 고려에 돌아와서 왕이 되면, 부인인 원의 공주는 내정에 간섭하고, 고려에서 원에 거슬리는 행보를 벌이면 원에 보고하는 정보원 역할을 수행했다.

이방원이 명에 사신으로 간 것 역시 상황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왕자가 명에 입조(入朝)하는 것은 명의 요청 때문이었다. 표면적 이유는 조선에서 명에 보낸 문서에 명의 입장에서 불손해 보이는 문구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질적 이유는 요동 지역의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조선을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에서는 고려 말 추진되었던 요동 정벌 이야기가 다시 나오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또한 이방원이 명에 입조하기 전에 명은 “조선이 요동의 명나라 장수를 매수하고, 요동에 사는 여진족 수백 명을 조선으로 유인해서 들어오게 했다”라고 질책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조선에서 명에 보낸 문서의 문구를 꼬투리 잡고, 조선에서 보낸 사신을 다섯 차례 돌려보냈으며, 국교의 단절을 선언하는 등 그야말로 명이 조선 정벌에 뛰어들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이방원이 명에서 요구한 왕자로 간 것이었다. 이방원이 떠나기 전에 태조는 이방원에게 “네가 아니면 황제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할 사람이 없구나”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막중한, 그리고 매우 위험한 임무가 이방원에게 주어졌고,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가 아들인 이방원을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는 의미다.

이방원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이방원은 위화도회군 당시 이성계의 개경 식솔들을 지켜냈고, 정몽주(鄭夢周) 살해를 주도하면서 조선 건국의 마지막 걸림돌을 제거했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된 이후 이방원은 정안군이라는 군호는 받았지만, 왕자라는 이유로 개국공신에서 제외됐다. 거기에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임에도 불구하고, 세자 자리는 이복동생인 이방석(李芳碩)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선조들의 무덤을 관리하고 지방의 방어 상황을 살피는 등 그야말로 중앙 권력에서 철저하게 배제됐다. 여기에는 이방원의 정몽주 살해 주도에 대한 이성계의 분노, 조선 개국 이후 신하들의 왕실 견제 등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이에 이방원은 크게 낙심했다. 심지어 이방원이 명으로 떠나기 전, 태조가 이방원의 수척해진 모습을 걱정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였다.

이방원 개인도, 조선과 명의 외교 관계도 최악인 상황에서 이방원은 명으로 떠났다. 그리고 성과를 내고야 말았다. 이방원은 명 태조 주원장 앞에서 함부로 ‘조선 국왕’이라는 호칭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명으로부터 ‘조선’이라는 국호만 받았을 뿐, 이성계가 명으로부터 아직 왕으로 책봉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명의 입장을 잘 파악하고, 마찰을 일으키지 않을 외교적 언어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조선을 의심했던 주원장은 그 오해를 풀 수 있었다. 그리고 주원장은 신하들에게 이방원을 “우대하는 예를 갖춰 조선으로 안전하게 돌려보내라”라고 명했다. 그리고 이방원은 이 사행길에서, 훗날 명의 전성기를 이끈 영락제가 되는 주원장의 넷째 아들 주체(朱棣)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목숨을 건 사행길을 통해 이방원은 훗날 왕이 될 역량이 있음을 드러냈다. 이방원은 명 태조 주원장을 처음 만난 것이 아니었다. 6년 전인 1388년, 조선 건국 전에 이방원은 목은 이색을 따라서 명에 와서 주원장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리고 6년 후에 이방원은 조선의 왕자가 돼서 다시 명에 들어갔다. 그리고 매우 어려운 외교 문제를 해결하고, 훗날 명의 최고 권력자가 되는 미래 권력과 속된 말로 ‘안면을 틀 수 있는’ 기회까지 가졌다.

정치인이 외국에 가는 경우가 많다. 외교적 문제를 풀기 위해서 외국에 가는 경우도 있지만(문재인 정권 시절 임종석 비서실장의 UAE 방문이 대표적인 사례다.) 보통은 정치적 행보가 좌절됐을 경우 외국에 간다. 대통령 선거 후보가 되지 못했던 안철수와 이낙연,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 서울시장 경선에서 후보로 선출되지 못한 박영선 등 선거에서 패배한 사람이 외국에 가는 경우가 많다.

아쉽고 분노가 치미는 사례는 특정 정치세력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 때문에 피의자를 외국에 보내거나 도피를 방조하는 경우다. 박근혜 정권 당시 계엄령 검토 문건을 작성했던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윤석열 정권에서 해병대 채상병 사망 사건 은폐 축소 의혹으로 공수처에 의해 출국금지 상태였던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이 호주로 떠났다. 그것도 호주 대사 신분으로······. 대사가 무엇인가? 한 나라를 대표해서 외국에서 업무를 수행하는 국가의 대표다. 이것은 선거철이라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윤석열 정권과 여당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피의자를 도피시킨 것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나아가서 그야말로 국가적 망신이다.

누군가는 정치적 좌절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건 외교를 위해 외국으로 떠나서 나라를 구했다. 또 누군가는 정치적 패배의 고배를 마시면서 연구와 외부의 경험을 위해 외국으로 떠났다. 그런데 누군가는 선거로 매우 민감한 시기, 피의자에 출국금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출국금지가 해제되면서 국가를 대표하는 대사 신분으로 외국으로 떠났다. 참으로 ‘불공정’하고 ‘비상식’적인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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