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비틀쥬스> 무대 ⓒCJ ENM  

‘과연 이게 가능할까?’

상상 속 공간이 현실에 완벽하게 구현됐을 때 느껴지는 감정이란 벅찰 만큼 특별하다. 게다가 ‘저세상 세계관’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온 듯한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본 순간, 더할 나위 없이 짜릿한 기분에 저절로 어깨가 들썩인다. 머릿속에 떠오른 물음표를 단번에 느낌표로 바꿔 준 작품, 바로 뮤지컬 <비틀쥬스> 이야기다.

뮤지컬 <비틀쥬스>가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관객들과 만났다. 오는 8월 8일까지 이어질 예정인데, 당초 계획보다 조금 늦게 막을 올리게 돼 아쉽게도 공연 기간이 길지 않다. 브로드웨이 최신작 중 하나인 이 뮤지컬이 한국에서 세계 최초로 글로벌 프로덕션 라이선스 초연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마자 많은 뮤지컬 팬들의 마음은 한껏 기대로 부풀었다. 해외여행이 어려워진 시기에 국내에서 브로드웨이 무대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적잖은 위로가 됐다. 아마도 이런 때에 한국 무대를 택한 배경에는 그만큼 한국 뮤지컬 시장의 놀라운 잠재력과 그를 뒷받침할 만큼 체계적인 관리 감독, 그리고 수준 높은 관객들의 역할도 컸으리라 예상된다. 작품은 2010년 공연화 결정 이후 워너 브라더스가 제작을 맡아 2018년 워싱턴 D.C.에서 트라이아웃을 거친 뒤 2019년 4월 브로드웨이 윈터 가든 시어터에 입성했는데, 독특하면서도 참신한 무대 덕분에 관객 반응 역시 뜨거웠다고 전해진다.

뮤지컬 <비틀쥬스>는 미스터리 판타지 장르를 스크린에 녹여내 수많은 마니아층을 거느려 온 팀 버튼 감독의 동명 영화(1988년 작)를 원작으로 한다. 꽤 오래전에 만들어진 영화다 보니 비슷한 장르의 요즘 영화와 비교했을 때 영상 완성도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만 팀 버튼 감독 영화를 좋아하는 팬들에게는 마치 고전처럼 여겨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뮤지컬은 원작과는 꽤 다른 전개를 펼친다. 작품이 가진 정체성을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확실히 뮤지컬에 더 잘 어울리도록 맞춤옷을 입었는데, 큰 틀에서 보면 비슷하나 스토리를 조금 더 극적으로 매끄럽게 가다듬었다. 더불어 주인공 비틀쥬스를 포함한 일부 캐릭터에 구체적인 서사를 부여하는 한편, 주요 인물이 차지하는 비중과 성격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주었다. 또 불필요한 부분은 과감히 생략한 대신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강조하며 판타지 동화나 가족극 같은 느낌도 가져왔다. 덕분에 원작과 같이 오싹하거나 기괴한 분위기 대신에 유쾌하고 따뜻한 감성이 주를 이룬다.

뮤지컬 <비틀쥬스> 공연 사진 ⓒCJ ENM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 들어선 모든 관객은 곧바로 비틀쥬스가 펼칠 화려한 쇼의 초대 손님이 된다. 기묘하면서도 몽환적인 음악이 공연장을 가득 채운 가운데 비틀쥬스의 의상으로부터 착안한 줄무늬와 딱정벌레가 그려진 모습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 비워둔 좌석은 유령 배려석으로 탈바꿈했다. 화려한 불빛으로 둘러싸인 무대 조명이 쉴새 없이 돌아가며 관객들을 비추고, 당장이라도 빨려들 듯한 소용돌이가 시선을 사로잡으면 비로소 본격적인 쇼타임이 시작된다. 기대가 환희로 바뀌는 순간이다.

첫 장면부터 강렬하게 등장한 비틀쥬스는 공연 내내 관객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려 한다. 살아생전 애정 결핍에 시달리다 결국 죽어서도 사랑에 목말랐던 캐릭터답다. 살아있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3번 불러주어야 인간의 눈에 띌 수 있어, 98억 년이나 되는 긴 세월 동안 이승과 저승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며 존재감 없이 투명했던 삶을 청산하기만 바랐던 그다. 본디 악마 같은 성격을 지닌 터라,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처리하는 데도 망설임 없는 비틀쥬스지만 어쩐지 밉거나 혐오스럽기보단 보듬어주고 싶은 인물로 등장한다. 그랬던 그가 신입 망자(亡者)가 된 아담과 바바라 부부를 찾아오고, 부부의 집에 새로 이사 온 리디아 가족을 만나 펼쳐진 에피소드는 150분간 롤러코스터를 탄 듯 빠른 속도로 전개되며 특별한 재미를 경험케 했다.

곳곳에 의도적으로 배치한 유머도 객석의 웃음을 유발하는 데 비교적 성공한 모습이다. 이제 더는 코로나 검사를 받고 싶지 않은 비틀쥬스와 전세자금을 모두 비트코인에 몰아넣은 투자자 이야기까지 정말, 이 시국 뮤지컬답다. 너무 무겁거나 낯설지 않으면서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만큼 재치 넘치는 위트에 풍자를 살짝 버무린 덕분에 관객들은 잠시나마 웃음을 터트릴 기회를 얻는다.

여기에 작사와 작곡을 맡은 에디 퍼펙트의 감각적인 음악, 공들인 무대장치와 눈부신 조명 세례, 화려한 특수 효과 간의 조화가 비틀쥬스만의 장점을 부각한다.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자이언트 퍼펫이나 살아 움직이는 듯한 무대 디자인은 눈으로 보는 재미까지 더해준다.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이 모두를 하나의 무대 위에 올리기 위해 애쓴 뮤지컬 크리에이티브 팀의 빛나는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비틀쥬스役 유준상 ⓒCJ ENM

하지만 이 모든 요소를 완벽하게 구현해 내는 데에는 최상의 무대를 선보이고자 끊임없이 노력한 배우들의 공이 가장 컸다. 이번 뮤지컬 <비틀쥬스> 초연은 뮤지컬 배우 유준상과 정성화가 타이틀 롤을 맡아 각각 색다른 매력을 선보인다. 유준상의 비틀쥬스가 조금은 엉뚱하면서도 신사다운 느낌이라면, 정성화가 그린 비틀쥬스는 장난기 가득한 악동에 가깝다. 같은 캐릭터임에도 이렇게 비슷한 듯 확실히 다른 매력을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은 결코 놓칠 수 없는 재미다.

작품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열여섯 소녀 리디아 역 홍나현과 장민제도 매회 놀라운 기량으로 박수를 이끌었다. 어린 나이에 사랑하는 엄마를 잃은 뒤 아빠와의 대화조차 단절된 일상 속에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성숙함과 동시에 사춘기 소녀다운 어리광을 모두 보여줘야 하는 인물이라 표현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도 두 사람 모두 리디아 그 자체로 보일 만큼 자연스러웠다. 특히 뮤지컬 <비틀쥬스>의 배경이 되는 ‘집’은 작품 속에서 아주 특별한 의미를 담는데, 내내 집을 떠나길 바랐던 소녀가 일련의 사건을 통해 새로이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두르게 되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 한동안 서로에게 진심을 꺼내 보이지 못했던 리디아와 찰스가 드디어 솔직한 이야기를 건넬 때, 가슴 속 어딘가에서부터 울컥 솟구친 감동은 아마 많은 이들이 똑같이 느꼈으리라 예상해본다.

▲ 최윤영 평론가·아나운서·공연 칼럼니스트
-네이버 오디오클립 ‘최윤영의 Musical Pre:view 공연을 말하다’ 크리에이터
-클래식, 콘서트 등 문화예술공연 전문 MC
- 미디어 트레이닝 및 인터뷰,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전문 강사
- 인천국제공항 아나운서, 경인방송 FM 리포터

델리아 역과 미스 아르헨티나 유령 역을 맡은 신영숙의 무대 역시 완벽했다. 쉴 틈 없이 이어지는 대사와 속도감이 느껴지는 노랫말도 베테랑인 그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유 넘치는 연기와 춤, 믿고 듣는 노래, 코믹한 제스처까지 그동안 꽤 많은 무대를 봐 왔지만, 이번 작품을 통해 배우가 가진 매력을 또 한 번 새롭게 발견한 기분이 들어 놀랍고도 즐거웠다.

‘죽여주는 공연’이라 장담했던 비틀쥬스의 자신감에는 역시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음향이나 일부 장면의 연결 등에 다소 아쉬움이 남는 지점도 있지만 그런 아쉬움을 충분히 상쇄시킬 만한 뮤지컬이다. 재미난 볼거리뿐만 아니라 상실과 소통 부재로부터 야기된 가족의 붕괴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있는 인간이기에 느낄 수 있었던 여러 감정을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얻은 감동 또한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무더위에 지친 요즘,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에 유쾌한 위로가 필요하다면 더 늦기 전에 어서 이 유령의 집에 방문해 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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