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더리퍼 서범석 배우. ⓒ(주)글로벌컨텐츠

악명 높은 희대의 살인마 ‘잭 더 리퍼’. 잔혹한 범행 수법과 엽기적인 사체 훼손 행각으로 19세기 말 영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그가 뮤지컬 속 주인공이 되어 무대에 섰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연쇄 살인범은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혼란했던 당대 사회를 더 큰 혼란에 빠트리며 사건을 끝내 미궁으로 남겨두었다. 무대 위에 오른 그의 행적을 좇다 보면 우리는 과연 어떤 진실과 마주하게 될까.

뮤지컬 ‘잭 더 리퍼’가 개막 소식을 전했다. 지난 12월 3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한전아트센터에서 막을 올린 공연은 오는 2022년 2월 6일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특히 이번 시즌 무대는 공연 전문 글로벌 플랫폼 ‘메타씨어터’를 통한 라이브 스트리밍 서비스가 같이 제공돼 눈길을 끈다. 덕분에 코로나19로 인해 공연장을 찾기 어려워진 해외 관객들도 편하게 뮤지컬을 감상할 수 있게 됐다.

작품은 체코 뮤지컬 원작 라이선스 뮤지컬로 한국에서는 2009년에 초연됐다. 다만 한국 무대에 오르기 전 90% 가까이 재창작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한국 관객들의 정서적 측면을 고려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 사건을 토대로 제작된 뮤지컬인만큼 예상치 못한 위협과 공포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오리지널 프로덕션 공연을 거의 그대로 상연해야 하는 영미권 뮤지컬과 달리 수정과 변형이 자유로운 체코 뮤지컬의 이점이 여기에서 두드러졌다. 그렇다고 살인마를 향한 동정이나 이해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이를 위해 사건에 관한 정보를 더욱 자세히 파헤쳤고, 당시 관련 사건을 앞다퉈 보도했던 비정상적 언론의 행태를 보며 느낀 바를 담았다. 그 결과 관객의 입장을 고려해 조금 더 인간미가 느껴지면서도 완전히 새로워진 한국판 ‘잭 더 리퍼’가 탄생했다.

2021년 여섯 번째 시즌을 맞이한 뮤지컬 ‘잭 더 리퍼’는 지난 10주년 기념 공연 연출을 맡았던 신성우가 다시 연출을 맡아 기대를 모은다. 신성우 연출은 ‘잭 더 리퍼’ 초연부터 살인마 잭 역을 맡아 열연해 온 배우이기도 하다. 이번에도 그는 연출 겸 배우로서 관객들과 특별한 만남을 이어간다.

신구 조화가 돋보이는 캐스팅 역시 눈에 띈다. 뮤지컬 ‘잭 더 리퍼’는 글로벌 스타 캐스팅으로도 유명한 작품이다. 먼저 불의의 사고로 목숨이 위태로워진 연인을 구하기 위해 살인마 잭과 위험한 거래를 하게 되는 외과 의사 다니엘 역에 엄기준, 이홍기, 남우현, MJ, 인성이 캐스팅됐다. 모두를 공포에 떨게 할 만큼 잔혹한 살인마 잭으로는 신성우, 김법래, 강태을, 김바울이 열연한다. 또 무심한 듯 열정적인 강력계 수사관 앤더슨 역에 이건명과 조성윤이, 그런 그와 손잡고 특종 기사를 잡으려 애쓰는 속물 기자 먼로로 서범석과 장대웅이 함께 하면서 극적인 어울림을 이룬다. 여기에 다니엘의 마음을 사로잡은 글로리아 역에 린지, 김수, 정수지가 캐스팅됐고, 백주연과 소냐가 앤더슨의 전 연인 폴리 역을 맡았다.

잭더리퍼 김바울 배우. ⓒ(주)글로벌컨텐츠

작품은 시간 순서가 뒤섞인 극중극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계속 시점이 바뀌고 전후 관계를 연결할 수 있을 만한 단서들이 나오기 때문에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물론 실제 사건에 얽힌 배경지식을 미리 알아두고 관람하면 조금 더 쉽고 빠르게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1888년 런던 화이트 채플을 피로 물들인 ‘잭 더 리퍼’ 살인 사건은 추측만 무성한 채 미제로 남겨졌다. 신원을 알 수 없는 그는 오로지 매춘부들만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으며 2개월을 갓 넘긴 기간 동안 최소 5명에 이르는 여성들을 끔찍하게 살해했다. 당시 수사 기술은 현대의 과학 수사 기법에 한참 미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직 연쇄 살인이라는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범인을 특정하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다. 사건 현장의 단서를 토대로 보아 그가 칼을 매우 잘 다룰 줄 아는 사람이며, 의학이나 해부학에 능통했거나 어떠한 연유로 매춘부에게 상당한 적대감을 가진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할 뿐이었다. 심지어 그가 로열패밀리에 속한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나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치 범인을 찾기 위해 우왕좌왕하던 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한 언론사로 다음 살인을 예고하는 편지가 날아든다. ‘Dear Boss‘로 시작한 편지 하단에 적힌 발신인의 이름은 바로 ‘잭 더 리퍼’였다. 그때부터 문제의 살인마는 ‘잭 더 리퍼’로 불리기 시작했으며 그 뒤로 추가 살인이 이어졌음에도 끝내 검거에 실패했고, 그가 누군지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 사건이 종결됐다. 범행 동기 역시 추측될 뿐이다. 뮤지컬은 이런 충격 실화를 바탕으로 상상력을 더해 재구성한 결과물이다.

공포와 스릴로 가득 찬 가상의 이야기는 가슴 한편을 따스하게 적실 만한 로맨스와 적당한 유머, 배우들의 열연과 어우러져 더욱 강력한 무대를 만든다.

먼저 다니엘 역을 맡은 남우현은 오직 사랑을 위해서라면 편견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인물로 등장해 새로운 매력을 뿜어낸다. 특히 살인마 잭과 돌이킬 수 없는 거래를 하는 과정에서 극심한 갈등을 겪고 고통스러워하던 모습이 그의 인간적 면모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 최윤영 평론가·아나운서·공연 칼럼니스트
-네이버 오디오클립 ‘최윤영의 Musical Pre:view 공연을 말하다’
-클래식, 콘서트 등 문화예술공연 전문 MC
-미디어 트레이닝 및 인터뷰,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전문 강사
-인천국제공항 아나운서, 경인방송 FM 리포터

살인마 잭을 연기한 김바울의 무대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번 ‘잭 더 리퍼’는 뮤지컬 배우로서 첫발을 내디딘 그의 데뷔작이다. JTBC 경연 프로그램 ‘팬텀싱어 3’로 결성된 그룹 ‘라비던스’의 리더이자 성악가 출신인 그는 ‘인간 첼로’란 별명답게 묵직하면서도 시원한 가창력을 선보였다. 결정적인 순간에 어둠 속에서 지팡이를 휘두르며 나타나 이중 회전무대를 여유롭게 넘나드는 모습은 자연스레 ‘뮤지컬 배우’ 김바울의 다음 행보를 기대하게 했다.

글로리아 역 김수는 이전에 맡았던 배역과 전혀 다른 이미지로 변신해 놀라움을 안겼다. 그는 올해 뮤지컬 ‘팬텀’에서 크리스틴 다에 역을 맡아 성공적인 데뷔를 마친 신예 뮤지컬 배우다. 이번 작품에서는 사랑 때문에 행복했으나 결국 그로 인해 불행해진 인물의 감정을 온몸으로 표현해 몰입감을 높였다. 특유의 맑고 깨끗한 목소리가 비극적인 상황과 대비되며 감상의 효과를 극대화한다.

여기에 베테랑 배우 서범석, 조성윤, 백주연이 함께 무대에 올라 신선하면서도 안정적인 ‘잭 더 리퍼’를 완성했다.

이렇게 전대미문의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탄생한 뮤지컬 ‘잭 더 리퍼’는 예술을 매개로 있었던 현실을 새롭게 재현하는 과정을 통해 관객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한다. 또 인간의 잠재된 본성과 근원적 공포를 탐구하며 내면에 깊숙이 숨겨진 약점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도록 일깨우기도 한다. 치밀하게 구성된 입체적 전개를 통해 끊임없이 추리하는 과정 끝에 놀라운 반전과 마주하는 구도 역시 재미있다. 인물들이 가진 사연에 집중해보면 전체적인 서사의 흐름과 감정 변화, 행동 동기를 이해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

클래식한 매력으로 존재감을 재확인한 뮤지컬 ‘잭 더 리퍼’. 낭만과 서정에 물든 비극은 무대와 만나 새롭게 빛났다. 극 중 범인이 분명 있는데도 미제 사건으로 종결된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흩어졌던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 두근대는 희열을 느껴보는 경험이 무척 흥미롭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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