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틀맨스 가이드 레이디 히아신스 해외로 - 유연석, 이규형 외 ⓒ쇼노트<br>
레이디 히아신스 해외로 - 유연석, 이규형 외 ⓒ쇼노트

여기, 인생을 바꿀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서글프다 못해 지루한 가난에서 벗어나 귀족이 되어 새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 말이다. 단, 반드시 서열 정리를 해야 한다. 그것도 내 앞에 줄지어 선 가문의 후계자를 여덟 명이나 제거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쯤 되면 대부분 포기할 텐데, 놀랍게도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의 주인공 몬티 나바로는 과감하게 직진하기로 결심한다. 힘겨웠던 과거를 뒤로하고 콧대 높은 다이스퀴스 가문에 도전장을 내민 그가 과연 가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 궁금하지 않은가.

답답한 일상에 단비가 돼 줄 블랙 코미디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 사랑과 살인편’이 2021년 11월 13일 서울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개막했다. 이번에 세 번째 시즌을 맞이한 공연은 오만석, 정성화, 정문성, 이규형, 유연석, 이석훈, 고은성, 이상이, 이정화, 유리아, 김아선 등이 함께하며 오는 2월 20일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1909년 영국을 배경으로 한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는 묵직한 소재를 재기발랄하게 풀어내 화제를 모았다. 2013년 월터 커 극장에서 정식 초연을 올리며 브로드웨이 무대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킨 작품은 무려 10년에 걸친 개발 과정을 거친 뮤지컬답게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매우 뜨거운 반응을 이끌었다고 전해진다. 블랙 코미디 장르에 오페레타 형식이 가미된 뮤지컬이 흔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온 데다, 연극적인 재미와 작품성이 더해진 결과였다. 이를 증명하듯 2014년에는 토니 어워즈와 드라마 데스크 어워즈, 외부 비평가상, 드라마 리그 어워즈까지 총 4개 시상식에서 괄목할만한 수상 실적을 올리며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프롤로그 관객을 위한 경고 ⓒ쇼노트

한국 공연에 따른 반응 역시 긍정적이었다. 2018년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개막한 ‘젠틀맨스 가이드’ 초연은 초반부터 입소문을 타며 이례적인 흥행 기록을 세웠다. 이어 2020년 재연 때는 무대 상연과 동시에 일부 회차를 온라인으로 중계하기도 했다. 비록 갑작스러운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해 예정보다 일찍 막을 내려야 했으나 작품을 향한 관객들의 사랑은 변함없이 열렬했다.

이렇게 여러모로 주목할 만한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는 로이 호니만의 소설 '이스라엘 랭크: 범죄자의 자서전(1907)'과 영화 '친절한 마음과 화관(1949)'를 토대로 제작됐다. 제목에 쓰인 그대로 주인공 몬티가 사랑과 권위를 모두 얻기 위해 ‘신사답게’ 목적을 이루는 과정이 마치 일종의 지침서이자 회고록처럼 담겼다.

넉넉지 못한 살림과 낮은 신분 때문에 어렵게 살아온 청년 몬티 나바로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 어느 날 갑작스레 찾아온 미스 슁글로부터 출생의 비밀에 얽힌 이야기를 듣게 된다. 놀랍게도 본디 그의 어머니는 고귀한 다이스퀴스 가문의 핏줄로 집안에서 반대하던 뮤지컬배우 출신 아버지와 결혼하면서 가문으로부터 내쳐졌는데, 사실상 몬티가 다이스퀴스 가문의 숨겨진 여덟 번째 후계자라는 사실이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기쁜 소식에 곧장 사랑하는 연인 시벨라를 찾아가지만, 시벨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로 몬티의 기대를 꺾는다. 하지만 선물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몬티 나바로가 몬티 다이스퀴스 경으로 거듭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면서 이야기는 요절복통 기상천외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 최윤영 평론가·아나운서·공연 칼럼니스트
-네이버 오디오클립 ‘최윤영의 Musical Pre:view 공연을 말하다’
-클래식, 콘서트 등 문화예술공연 전문 MC
-미디어 트레이닝 및 인터뷰,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전문 강사
-인천국제공항 아나운서, 경인방송 FM 리포터

작품은 보통 살인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을 때 예상되는 분위기나 전개를 완전히 벗어난다. 결과적으로 몬티는 최소한 살인 방조에 해당할 만한 죄목을 가진 범죄자나 다름없지만, 관객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성공을 응원하게 된다. 물론 현실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이런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어쩌면 풍요와 결핍이 공존하는 자본주의 현실 속에서 몬티가 겪었을 부당한 처우에 공감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내심에 품은 욕망과 삶을 반전하고자 하는 의지를 거침없이 실현하는 몬티를 보며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계획과 우연 그 어디쯤에서 신나게 줄을 타는 주인공의 모습이 교활하다 느껴지기보다 마치 유쾌한 오락처럼 다가와 더욱 신선하다. 뻔뻔한 얼굴로 “왜 가난하고 그러냐”고 묻는 다이스퀴스 가문의 일인자 애덜버트 다이스퀴스 경도 얄밉기보다는 귀여울 정도다.

출연진 조합에 따라 색다른 시너지가 발휘된다는 점 또한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의 매력이다. 주연배우 페어별로 이전에 같이 참여했던 작품이 있으면 해당 작품과 관련된 애드리브가 불꽃처럼 터져 나온다. 특히 다이스퀴스 역 배우는 무려 9명의 인물을 연기하기 때문에 쉴 새 없이 의상과 헤어를 변경해야 하는데, 찰나의 순간 완벽하게 또 다른 다이스퀴스로 변신하는 모습이 무척 놀랍다. 배우들 역시 즐기면서 공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만큼 호흡도 상당히 좋다. 틈날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쉴새 없이 쏟아지는 애드리브는 내내 미소 띤 얼굴로 무대를 향하게 한다.

여기에 손꼽을 정도로 뛰어난 앙상블의 무대, 4M 높이 위에 마련된 오케스트라 피트의 경쾌한 연주, 영상미가 더해져 더욱 세련된 느낌을 주는 빅토리아 양식 무대 디자인이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새해가 되어도 여전한 현실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신나게 웃어보고 싶다면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의 책장을 넘겨보자. 150분간 펼쳐질 ‘진짜 신사’ 몬티의 대담하면서도 재미있는 여정이 평범한 일상에 놀라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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