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헤드윅> ⓒ쇼노트

‘언니’가 돌아왔다. 붉게 칠한 입술, 아찔한 속눈썹에 과장된 가발, 반짝이는 의상까지 어느 하나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화려하다. 도도한 자태로 객석을 둘러보며 걸어와 무대에 이른 그는 이츠학과 디 앵그리인치 밴드를 향해 잠시 시선을 주곤, 쓰고 있던 마스크를 다소 신경질적으로 벗어 던졌다. 순간 그 모습이 어찌나 통쾌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이때 동시에 스친 찰나의 표정 또한 예사롭지 않다. 왠지 쓸쓸해 보이는 모습에 궁금증이 일기 시작할 무렵, 마이크를 잡은 그는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관객들을 위로하기 시작한다. 
 
스테디셀러 뮤지컬 ‘헤드윅’이 개막했다. 지난 7월 30일부터 오는 10월 31일까지 예정된 2021년 ‘헤드윅’은 공연장 규모를 넓혀 서울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 자리를 잡게 됐다. 지금까지는 콘서트형 뮤지컬이 가진 특성을 살리기 위해 중소형 극장에서 공연된 경우가 많았다. 특히 모텔 리버뷰를 그대로 재현한 듯했던 백암아트홀 공연은 요즘도 관객들 사이에서 종종 언급될 만큼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이번엔 더욱더 기대와 우려가 뒤섞인 마음으로 공연장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역시 ‘헤드윅’은 ‘헤드윅’이었다. 우선 달라진 규모에 맞춰 관객을 배려하기 위한 장치들이 곳곳에 마련돼 있어 눈에 띄었다. 폐차가 가득 쌓인 헤드윅의 콘서트장은 이전보다 훨씬 실감 나게 구현됐다. 또 때에 따라 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커다란 스크린 영상으로 보여주고, 전개상 이해를 돕기 위해 그래픽을 활용한 모습도 돋보였다. 비록 카 워시 퍼포먼스와 손수건 이벤트 등 일부 장면을 없애거나 대체해야 했지만, 이렇게나마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쁠 따름이다.   
 
헤드윅의 이야기는 일반적인 뮤지컬과 달리 모노드라마와 비슷하게 전개된다. 그러다 중간중간 노래를 부르며 분위기를 전환하는 형식이다. 처음엔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몰입하기 쉬운 극이기도 하다. 작품을 보다 보면 어느새 헤드윅은 마치 실존 인물처럼 불쑥 다가와 있다. 
 
극 중 넘버는 많지 않은 편이나, 모든 넘버가 탄탄하게 연결돼있는 데다 깊이 있는 표현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거친 록 스피릿이 담긴 ‘Exquisite Corpse’와 쓸쓸한 감상을 더한 ‘Midnight Radio’, 경쾌한 컨트리풍의 ‘Sugar Daddy’는 각기 다른 분위기로 작품에 맛을 더한다. 플라톤의 ‘향연’에 기반해 탄생한 ‘The Origin of Love’도 좋다. ‘Wicked Little Town’의 경우 헤드윅과 토미 버전으로 나뉘어 불리는데, 상처투성이가 된 헤드윅이 토미의 노래를 듣고 위로받는 장면은 가히 압권이라 말할 수 있다.

헤드윅 役 조승우 ⓒ쇼노트

본명 한셀 슈미트, 그리고 이제 헤드윅 로빈슨이라 불리는 인물은 동베를린에서 태어나 자유를 억압당한 환경에서 혼란스러운 유년기를 보내며 성장한다. 유일한 낙이라고는 미군 라디오 방송을 통해 데이비드 보위, 루 리드, 이기 팝과 같은 록 음악을 듣는 일이 전부였다. 어린 시절, 미군이었던 아버지로부터 성적 학대를 받고 자란 탓에 어머니와도 좀처럼 가까워질 수 없었던 그에게 베를린 장벽 너머 세상은 희망이었다. 그런 헤드윅을 향해 다름 아닌 미군 병사 루터가 손을 내민다. 달콤한 유혹에 빠진 그는 루터와 결혼해 미국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우지만, 자유엔 언제나 희생이 따르는 법이었다. 사랑은 금세 떠나버렸고, 성전환수술 실패로 남겨진 1인치의 살점은 마치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처럼 자리해 종종 헤드윅의 마음을 무너뜨렸다. 낯선 땅에 혼자 남겨진 채, 남성도 여성도 될 수 없어 갈수록 더 혼란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던 그가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지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러던 어느 날, 보모 일을 하러 갔던 집에서 만난 토미는 어느새 헤드윅의 뮤즈가 돼 새 희망을 꿈꾸게 한다. 둘은 음악이라는 공통분모로 엮여 급격히 가까워지는데, 결국 토미가 헤드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떠나면서 다시금 홀로 남는다. 그랬던 헤드윅의 곁에도 이제 서류상 배우자인 이츠학과 록 밴드 디 앵그리인치가 있다. 이후 토미는 정상급 록스타가 되어 많은 사랑을 받지만, 계속해서 토미의 주변을 맴돌던 헤드윅은 오히려 더 외로워졌을 뿐이다. 그는 이 모든 이야기를 담담한 어조로 이어가며 추억에 젖은 노래들을 들려준다. 
 
표면적으로 본다면 그저 한 성 소수자가 걸어왔던 고달픈 삶의 발자취 정도로 여길 수도 있겠으나 뮤지컬 ‘헤드윅’은 그렇게 단순한 작품이 아니다. 회색 지대에 선 그에게 그칠 줄 모른 차별과 혐오는 일상이었고, 깊이 베인 상처마저 온전히 홀로 감내할 몫이었다. 사실 돌이켜보면 우리 일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 꼭 사랑의 감정이 아니더라도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관계 속에서 상처받는 일 역시 비일비재하다. 이렇게 헤드윅의 입을 빌린 여러 이야기는 구체적인 상황만 다를 뿐, 결국 모두의 이야기였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한다.  
 
같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헤드윅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해석대로 작품 속 애드리브나 디테일, 분위기가 다르게 느껴지는 점 또한 ‘헤드윅’의 매력이다. 원작자 존 카메론 미첼 역시 무대 위 헤드윅이 자유롭길 바랐다고 한다. 뮤지컬 ‘헤드윅’은 공연 예술이 갖는 특성 가운데 현장성과 일회성을 가장 확실하게 구현하는 작품 중 하나다. 같은 배우가 연기하는 헤드윅도 회차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물론 기본적인 설정과 구성만큼은 반드시 지킨다. 자연히 러닝타임도 제각각이다. 쉼 없이 진행되는 러닝타임은 기본 135분으로 공지돼 있지만, 때에 따라 조금 더 오래 진행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헤드윅’ 마니아 ‘헤드헤즈’들의 경우, 다양한 캐스트로 작품을 반복해서 관람하는 경우가 많다.  

헤드윅 役 조승우 ⓒ쇼노트

올해로 무려 13번째 시즌을 맞이한 뮤지컬 ‘헤드윅’은 인기작다운 면모를 톡톡히 선보이고 있다. 티켓 오픈 때마다 예매처 서버가 심한 몸살을 앓을 정도인데, 올 시즌 예매 체감 난도는 훨씬 더 높아진 기분이다. 눈부신 캐스팅까지 한몫했다. 오리지널 캐스트 오만석과 조승우뿐만 아니라, 전 시즌에 이어 다시 돌아온 이규형도 반갑다. 여기에 새로운 헤드윅으로 고은성, 렌까지 합류해 기대를 모은다. 
 
그중에서도 ‘조드윅’ 조승우의 헤드윅은 남다른 입담과 깊이 있는 연기로 진한 향수를 자극했다. 그는 헤드윅이 품은 드라마를 유독 잘 살리는 배우로 유명하다. 작품과 워낙 오랜 인연을 맺어온 터라, 배우와 관객이 함께 시간을 달리며 감정을 공유하는 경험도 뜻깊다. 묵직한 망토를 날개처럼 활짝 펴고 빙빙 도는 모습이 여전하다 싶을 즈음, “이제 무릎이 아플까 봐 높이 뛰지 못해”라며 객석에 웃음이 번지게 하는 그다. 게다가 이토록 멋진 창을 선보이는 헤드윅이 어디에 또 있을까. 마치 히든 트랙처럼 조승우의 공연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몇몇 음악들도 참 특별하다. 공연 후반부에 이르러 차곡차곡 쌓인 감정을 토대로 마침내 처절한 절규를 터뜨릴 때면, 조용히 지켜보던 이들의 마음에도 어느새 멍이 든다. 특히 자신의 정체성과 같았던 노란 가발을 품에 안고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 숙인 모습은 배우가 느낀 고뇌를 그대로 담아 더 안쓰럽다. 과장된 메이크업 뒤에 숨겨졌던 그의 진짜 얼굴이 드러난 순간, 관객들은 숨을 죽이며 바라보게 된다. 빛이 새는 벽 틈으로 걸어가던 뒷모습도 오래도록 진한 여운으로 남아 잊히지 않는다. 

▲ 최윤영 평론가·아나운서·공연 칼럼니스트
-네이버 오디오클립 ‘최윤영의 Musical Pre:view 공연을 말하다’
-클래식, 콘서트 등 문화예술공연 전문 MC
-미디어 트레이닝 및 인터뷰,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전문 강사
-인천국제공항 아나운서, 경인방송 FM 리포터

시원한 가창력을 선보인 이츠학 이영미의 무대 역시 빼놓을 수 없다. 헤드윅과 마찬가지로 안타까운 사연을 품고 살아왔지만, 사실상 그와 정반대에 놓인 캐릭터다. 이츠학은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숨기는 데 더 익숙한 인물이다. 문득 자신이 겪어온 과거를 이츠학에게 되풀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헤드윅이 화해의 제스처를 취할 때, 잠시 망설이던 그가 결국 가발을 받아드는 장면도 인상 깊다. 때로는 묵직하게, 또 때로는 폭발하듯 노래하며 완벽한 하모니를 선보이는 모습 또한 강렬하다. 
 
이렇게 뮤지컬 ‘헤드윅’은 독특하고 다채로운 매력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하기에 완전해지려 부단히 애를 쓴다. 방법이 각기 다를지라도 목표는 같다. 미처 다 채워지지 않은 마음을 채우기 위해 어디엔가 있으리라 믿는 반쪽을 찾아 헤매는가 하면, 스스로 존재 가치를 찾으려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다. 어디든 속해야 편한 세상이지만 누군가로부터 꼭 무언가를 확인받지 않더라도 좋다. 모든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소중하단 깨달음은 크나큰 위로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뮤지컬 ‘헤드윅’은 경계에 선 모두를 응원하는 작품이다. 비로소 그가 자신에게 시선을 돌릴 때, 모두 함께 손을 높이 들어 화답하던 모습에서 우리는 희망을 본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이 오기까지 서로 보듬으며 나아가리란 무언의 다짐들이 오래도록 지속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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