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통영 섬 어무이들의 밥벌이 채록기’ 펴낸 김상현 기자
수십년 후에도 기억해야 할 풍경·생활·음식 기록
“통영 섬마을,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삶의 현장”
책 속 담긴 이야기, 우리네 아버지·어머니 인생사
【투데이신문 박세진 기자】잊혀져 가는 통영 섬마을 주민들의 소중한 이야기들을 한땀 한땀 새겨나갔다. 그렇게 13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그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록하고 또 기록했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파도가 거칠면 거친 대로 그는 섬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만난 섬마을 아버지와 어머니가 수십명이다. 그는 잔잔한 섬마을 곳곳에 고이 간직된 그들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서호시장에서 고기 장사를 하시던 어머니의 그리운 발자취가 보이기 시작했다. ‘통영 섬 어무이들의 밥벌이 채록기’를 쓴 김상현 씨의 이야기다.
한려수도(閑麗水道)의 비경(祕境)에서 만난 기록가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나면 더 이상 섬마을의 모습을 못 볼 수도 있잖아요. 그걸 남기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살았던 모습들. 그 소중한 장면들이 잊혀져 가는 것을 붙잡고 싶었죠”
통영에서 나고 자란 김 씨는 대학 시절을 제외하면 통영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통영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비밀스러운 모습들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무심코 지나칠 법한 장면들에 그의 시선이 닿자, 더욱 깊은 울림을 선사해왔다.
통영에 존재하는 570개의 섬들 중 42곳이 유인도다. 김씨는 통영에 위치한 39곳의 유인도를 다녔다. 그가 처음 섬으로 가게 된 계기는 ‘스트레스’의 해소였다. 직장 10년 차에 접어들 무렵, 그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었다. 그렇게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중, 우연히 보게 된 한 TV프로그램 속 장면이 눈에 밟혔다. 아름다운 자연과 정 많은 사람들, 한 상 가득 차려진 맛있는 먹거리. 문득 통영 바다 곳곳을 수놓는 섬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섬으로 향했다.
“섬을 갈 적이면 항상 믹스 커피를 마셨어요. 제가 원래 믹스 커피를 안마시거든요. 근데 어머니들이 쉽고 빠르게 내놓기 좋은게 믹스 커피니까. 함께 갓 내주시는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거죠. 저는 그 시간 속에서 어르신들의 이야기들을 기록해 나가는 겁니다. 어르신들과 차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의 물꼬를 트는 것이죠.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커피를 많이 얻어 먹는 집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럼 또 그 집에 커피 한 박스나 딸기를 양손 가득 들고 찾아뵙기도 하고 그랬죠”
그가 섬 마을 사람들과 조금 더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던 비장의 무기는 ‘믹스 커피’였다. 김 씨는 섬마을 어르신들이 커피를 타기 위해 물을 버너에 올리고, 올려진 물이 끓고, 하얀 종이컵에 담기는 시간을 적극 활용했다. 정성이 담긴 커피가 완성돼 가는 그 시간 동안 어르신의 집안을 하나, 둘 살펴보는 것이다. 어르신이 어떤 일을 종사하고 계시는지, 무엇에 관심이 있으신지, 식사는 제때 하셨는지 등을 빠르게 파악한다. 그리고 마치 오랜만에 만난 아들인 양 ‘그간 어떻게 지내셨느냐’ 너스레를 떤다. 그렇게 오고 가는 따뜻한 믹스커피의 온기가 섬마을 어르신들의 마음을 서서히 녹였다.
13년이라는 긴 세월, 그는 조급함에 쫓겼다
“섬에 다니는 동안 어느 순간부터 ‘밥은 묵고 댕기나?’ ‘오늘 잘 데는 있나?’하고 물어보시던 어무이가 한 분, 두 분씩 보이질 않기 시작했습니다. 돌아가신 거지요. 그러자 마음이 서서히 급해졌습니다”
그는 2008년부터 섬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2014년 ‘통영 섬 부엌 단디 탐사기’를 완성했다. 이어 2021년에는 ‘통영 섬 어무이들의 밥벌이 채록기’를 끝마쳤다. 책은 완성이 됐지만, 전해드릴 어르신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인터뷰 했던 어르신들 중 적지 않은 분들이 돌아가셨다. 어르신 대부분이 70대에서 80대로 연로하셨기 때문이다. 야속하게도 시간은 그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렇게 섬에 오고 간 지 13년에 접어든 그는 책을 출판하기 전 한 가지를 약속했다. 바로 어르신들 성함 앞에 고(故)라는 글자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 그들의 이야기가 죽지 않고 책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까닭에서다.
“책을 쓰면서 인터뷰 했던 분들이 하나둘 돌아가시니까 마음이 급해지더군요. 특히 히로시마 원자 폭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더욱 그랬습니다. 인터뷰 할 당시만해도 살아계셨지만, 책이 나왔을 때 결국 돌아가셨어요. 책을 전해드리려 방문하자 한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두 달만 일찍 오지 그랬냐’라고, 그 한마디에 결국 나와서 눈물을 쏟고 말았죠”
히로시마 원자 폭탄 할아버지는 한산도 앞바다에서 만난 어르신이다. 올해, 만 90세가 되는 이세우 어르신은 직접 히로시마 앞바다에서 원자 폭탄이 터지는 것을 지켜본 역사의 산증인이다. 1945년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할아버지는 멸치 배를 타고 히로시마로 떠났다. 바다 한 가운데서 거대한 원자 폭탄이 터지는 걸 보면서도 화상 입은 사람들을 섬으로 실어 날랐던 그다. 어르신이 남겨준 생생한 증언을 김 씨는 책에 고스란히 녹여냈다. 아쉽게도, 히로시마 원자 폭탄 할아버지는 더 이상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그는 김 씨의 책 속 한 장면을 기꺼이 장식해 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가슴 속에 죄책감을 품고 산다. 차마 책 한 권에 담아내지 못한 이야기가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이번 책 원고를 작성하면서 약 80페이지 가량이 제외됐습니다. 해당 분량을 제외하고도 총 379페이지가 나왔죠. 그 탓에 가슴 속에 미안한 분들도 엄청 많습니다. 책의 분량은 한정돼 있는데, 담고 싶은 이야기들이 넘치다 보니 모든 이야기를 담아내지 못했죠. 제한된 지면에 마땅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책을 출판 하기 위해선 여러 단락들을 제외해야만 했죠. 그 탓에 차마 담기지 못한 이야기들도 많습니다. 마음 같아선 한 분 한 분 모두 사진과 글로 담아 드리고 싶은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아 참 아쉽습니다. 그리고 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오랜 취재 끝에 만난 어머니의 발자취
“통영 섬 곳곳을 다니며 마지막에 느낀 감정은 마치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듯 한 기분이 든다는 거에요. 처음 섬에 발에 딛였을 때는 전혀 몰랐죠. 우리 어머니의 삶을 마주한 제가 느끼는 이 기분이 어떤건지”
통영 섬을 방문할 적이면 항상 새벽 서호시장에서 좌판 장사를 하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동충 통영수협에서 고기를 떼다가 장사를 해오셨던 김 씨의 어머니. 봄이 되면 리어카에 멸치를 한가득 싣고, “메르치 사이소, 메르치”를 통영 골목이 떠나가라 외쳐댔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그렇게 잊혀지지가 않는다. 온전히 자식들을 위해 새벽 일찍 시장에 나가시던 어머니. 씽씽 달리는 차량 옆에서 리어카를 끌며 흠칫 놀라시던 어머니. 오랜 취재 끝에 김 씨는 결국 미처 보지 못했던 어머니의 삶을 비로소 바로 마주하게 된 것이다.
통영 섬마을 어르신들은 거친 바다를 헤치며 물고기를 잡았다. 그 물고기를 하나, 둘 정성스레 말려 번 돈으로 자식을 배불리 먹이고 공부시켰다.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삶의 현장이다. 김 씨는 삶의 터전 속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인생을 기록하고자 했다. 이것이 그가 1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섬을 다닐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이 원동력을 앞세워 10년이 지나고 또 20년이 지나면 더 이상 볼 수 없는 소중한 장면들을 기꺼이 보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먼 훗날 시간이 흘러도 그 자리에 있을 보물 같은 기록들이다.
“끊임없이 기록하다 보니 책에는 다양한 섬사람들의 이야기들이 담기게 됐습니다. 통영의 마지막 남은 돛배를 발견하고 바다를 달린 노대도. 추석 명절 불어 닥친 태풍으로 열 셋집이 초상집으로 변한 비진도. 6.25전쟁의 소용돌이에서 포로수용소가 건설되면서 쫓겨나게 된 추봉도 사람들. 4전 5기의 추적 끝에 발견한 종이섬의 대구어장. 100년 된 매화가 피는 섬 좌도. 이는 50년 후에도 기억해야 할 섬의 풍경과 생활, 음식을 기록해달라고 선뜻 손을 내밀어준 동료들과 만들어낸 소중한 이야기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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