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3년 만에 산문집으로 돌아온 시인 이병률

◈무언가를 저지르는 에너지에 청춘의 생명 있어
◈가장 많이 아팠던 사랑을 말미암아 써내린 글
◈‘메리골드’라는 꽃과 꽃말이 이번 신간을 잘 설명
◈나는 이미지적인 사람…이미지로 순간을 간직해

달 출판사에서 만난 이병률 시인ⓒ투데이신문
달 출판사에서 만난 이병률 시인ⓒ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박중선 기자】 “사람을 진정 사람이게 하는 것은 누구나 가지고 태어난 그리움의 인자(因子) 때문일 것이고, 바로 그 그리움 때문에라도 사람은 섬뜩할 정도로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을 가지고 사는 건지도” -도서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5쪽

사랑은 집에서 기르는 식물을 위해 빗물을 받아 두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밤새 그리움을 뒤적이다 어느 페이지를 접어놓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벗어둔 뒷모습을 아스라이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병률 시인은 말한다. 당신의 바다는 잘 있냐고. 잊혀 지지 않는 존재는 밀물처럼 밀려와 어느새 발목에서 찰랑거린다. 어느 날은 차라리 높은 파도라 하겠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을 하고 어떤 사랑은 잊지 못한다. 누구는 사랑이 밥 먹여 주냐고 말한다. 반문한다. 실제로 밥 먹여 주지 않는가. 내안의 모든 세포들에게.

오후 두 시. 바삭해진 햇볕의 살갗이 들이닥친 파주 출판단지를 걸으며 이제서야 가을의 몸통으로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마침 이병률 시인과의 첫 만남을 책갈피처럼 쓰려고 굳이 이곳을 찾았다면 근사한 변명이지 않은가. 사랑하기 위해 떠난 시인이 오랜만에 안부의 편지를 부쳤다. 당신의 사랑은 안녕하냐고.

이병률 시인은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좋은 사람들’과 ‘그날들’이 당선돼 등단했다. 현재는 문학동네 계열 출판사인 달의 대표로 있다. 그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들을 순서대로 적어내려가기 위해 글쓰기를 시작했다가 실수처럼 그 길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투데이신문은 신간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로 3년만에 독자들에게 돌아온 이병률 시인과 경기 파주에 위치한 달 출판사에서 만나 그의 사랑에 대한 소식과 이야기를 들어봤다.

Q. 책 전반에 흐르고 있는 사랑의 대상은 어떤 특정한 대상 한 분이신가요.

네. 가장 많이 아팠던 사랑. 그 한 사람과의 사랑 때문에 결국 이 책이 태어나지 않았을까 합니다. 결국 모든 사랑은 끝나는 것이죠. 다만 그 사랑들이 화석처럼 순간순간 들춰지며 글을 쓰게 했습니다.

Q. 이번 신간뿐만 아니라 시인님이 운영하시는 달 출판사에서 출간하는 책들은 표지가 인상적이에요. 시인이 아닌 출판사 대표로서 특별히 신경 쓰는 부분인가요.

디자인에 많이 개입하는 편이에요. 책 자체를 좋아하는 건 기본이고 책 디자인에 관심이 많아서 출판업을 하고 있어요. 여행 산문집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같은 경우 책을 집필할 때쯤 내년엔 어떤 톤의 색감을 사람들이 좋아할까 생각하다 거의 색 위주로 디자인을 했어요.  

Q. 이번 신간에 수록된 사진은 전부 필름 사진이라고 들었습니다. 필름 사진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서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이미지는 있지만 필름 카메라는 아무래도 더디게, 느리게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피사체를 좀 더 들여다보게 되는 섬세한 작업이라는 점이 매력이지 않을까요. 앞으로는 필름 사진을 좀 더 찍지 않을까 생각을 하게 되는 책 작업이었습니다.

Q. 역시 시인님에게 사진 얘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네요. 사진과 글, 어떤 장면과 감정의 순간 그리고 이야기를 기록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기능을 하지만 각각의 매력은 다른 것 같습니다. 사진과 문장에 대한 시인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자신을 이미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풀어서 이야기를 하자면 이미지를 좋아하는 사람. 여성은 다른 감각으로 대상을 읽고 상황을 읽는데 남성은 시각적인 것으로 읽는다는 것과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미지로 기억하는 순간순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제 기억력보다 이미지로 기억하는 그런 순간들이 저한테는 굉장히 중요해서 그런 것들을 글로 써 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한 장 한 장의 사진들을 문장으로 녹이는 것이 시의 작업이라고 한다면 사진을 좋아할 수밖에 없고 사진을 다 기록할 수밖에 없는 제가 만들어진 것이죠. 그걸 빼놓고는 제 산문도 시도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의 스무 살, 카메라의 묘한 생김새에 끌려 중고카메라를 샀고 그 후로 간혹 사진적인 삶을 산다고 한다. 

Q. 사진을 찍을 수 없는 상황도 있지 않나요.

그런 경우에는 가슴에 저장해 두려고 하는 편이에요. 사람이라는 게 기억이나 이미지를 저장하는 용량에 한계가 있으니까 카메라가 너무나 그걸 잘 도와주는 도구라는 걸 느끼죠.

Q. 사진전을 여셔도 될 거 같아요.

네. 사실 이번 책이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사진전이라는 걸 하게 됐어요. 저는 사진전을 본격적으로 하는 것 자체가 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저의 본업이 아니기 때문에 좀 꺼려왔고 조금 미뤄왔다면 좀 자연스럽고 소박하게 제주에 오래된 카페 ‘로즈’라고 하는데서 많은 사진 말고 크지 않은 사진으로 구성해서 해보자는 제안이 와서 오픈했고 이달 23일까지 전시하게 됐습니다.

이병률 시인이 새벽시장에서 직접 골라 사온 아스클레피아스ⓒ투데이신문
이병률 시인이 새벽시장에서 직접 골라 사온 아스클레피아스ⓒ투데이신문

Q. ‘그대가 준 꽃’이라는 식물가게도 운영 중인걸로 아는데 어떤 곳인지 궁금합니다. 

며칠 전에 문을 닫았어요. 저의 허영이기도 했는데, 식물 다루는 걸 제대로 배운 적도 없지만 너무 좋아해서 혼자 기르면서 알게 된 것들을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했던 바람이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여행을 자주 떠나는 바람에 지속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어요. 

식물들은 한 사람이 계속 그 식물을 대하는 시계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시기를 한 사람이 쭉 관리를 해야 되는데 그런 상황이 되지 못했죠. 식물 가게는 그냥 식물을 좋아하는 일과는 달랐습니다. 시장을 자주 다녀야 했기 때문에 식물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게 된 기회가 됐습니다. 오늘도 새벽에 시장에 가서 꽃을 사왔습니다.

Q. 독자들이 많이 찾아왔을 것 같아요.

많은 분들과 다른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북토크나 어떤 사인회에 가서 작가를 만나는 거랑은 다른 개념으로 가게에 오시는 거니까. 저는 식물을 기르는 일이나 좋아하는 일은 시를 쓰는 일과 일치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퍼포먼스를 통해서 저의 시심을 전달하는 현장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Q. 햇빛의 농도와 바람 그리고 청명한 하늘. 오늘 날씨가 진짜 가을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날 어울릴만한 꽃이 있을까요.

‘메리골드’라는 꽃이 1층 창가에 놓여 있습니다. 노란색 꽃이에요 향이 정말 진해요. 여름의 끝자락에 한창 피는 그런 꽃인데 레이스 같은 결을 갖고 있어요. 나라마다 꽃말이 약간씩 다를 수 있는데 제가 스페인 여행 중 어느 시골 마을에서 본 꽃이 메리골드였어요. 

‘당신과 영원히 오래 살고 싶어요’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어요. 쓸데없이 로맨틱하다며 냉소적인 웃음으로 돌아섰는데 그게 되게 영혼이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누구나 프러포즈 할 때 그런 사랑의 감정과 영혼에 대해서 생각을 할 텐데 문득 그 꽃과 꽃말이 이번에 나온 신간을 잘 설명해 준다는 생각이 드네요.

Q.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책장에 꽂혀있는 책을 통해 그 사람의 취향이나 성향을 유추하기도 하잖아요. 시인님은 어떤 통로로 사람을 바라보시나요. 그리고 어떤 사람을 좋아하시나요.

그냥 보통사람하고는 조금 달랐으면 싶어요. 나이에 맞는, 성 개념에 맞는 또는 사회기준에 맞는 그런 것들이 있는데 그걸 좆는 사람이 아닌 약간 독특한 분위기의 사람에게 눈길이 가요. 그리고 저를 어려워하지 않고 자기 얘기를 자연스럽게 하는 사람들에 인연이 좀 쉽게 열리는 것 같아요. 또 하나 중요한 포인트는 결핍이 느껴지는 사람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는 것 같아요.

Q. 어떤 종류의 결핍일까요.

어떤 종류에 관계없이 정신적이든 환경적이든 결핍이 느껴져서 바싹 마른 상태인 사람. 제가 쭉 집중하게 되는 인간형인 것 같습니다.

Q. 연민도 섞여 있는 건가요.

그렇죠. 제가 사춘기 시절 환경적으로 닮고 싶은 사람이 제한돼 있었어요. 열려있지 않은 환경 속에서 성장을 해서 그런지 그런 감정에 마음이 기웁니다.

Q. 책 끝부분에 ‘매일 정각에 자신에게 들리는 일’이라는 이 문구에서 “자신과 마주하지 못하는 일은 비극이다”라고 말한 프란츠 카프카가 떠올랐습니다. 시인님에게 있어 매일 정각에 자신에게 들리는 일은 어떤 의미인가요.

그 개념이랑 많이 다르지 않을 것 같아요. 내 주변에 가득 차 있는 그런 사람들 속에서 나를 잃어버리는 것보다 내가 좋아하는 걸 한 가지씩 놓치지 않는 그런 것으로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무엇을 할 때 정신이 맑아지고 심장이 뛰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하루에 한 번씩 있으면 좋겠다는 의미일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저도 최근에는 산책할 시간이 좀처럼 생기지 않으니까 어떻게든 산책을 하자. 그래서 온전히 내 시간을 갖자. 의식일 수도 있지만 저에겐 굉장히 중요하고요. 

내가 무엇을 마주했을 때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떤 시간대를 만났을 때 나임을 확인할 수 있는 거.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늘리자 그런 개념이었고, 그러려면 일부러 시간을 안배해서 비워둬야 하잖아요. 그런 정도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병률 시인의 신간 &lt;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gt;ⓒ투데이신문
이병률 시인의 신간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투데이신문

Q. 요즘은 밖으로 넘쳐 흘러내리는 농도 깊은 감정들을 오글거린다는 이유로 서둘러 닦느라 바쁜 것 같습니다. 이러한 풍조는 마치 절절한 사랑이 멋스럽지 못하다고 여겨지거나 불안한 세대의 사치스러운 감정으로 전락하게 돼버린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 시인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너무나 좋은 질문이신 것 같아요. 처음 듣는 질문입니다. 한 인간이 갖는 풍성함과 풍요로움 같은 것들이에요. 그것이 감수성일 수도 있고 감정의 극대화일 수도 있는데 이런 것들이 넘쳐나면 안 되는 풍조로 굳어져 가는 게 안타깝죠.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건데 규격화하고 어떻게 해야 하고 너무 닭살스러운건 안되고 너무 올드한건 안 되고. 어제 북토크 때 대구를 갔다 왔는데 어떤 분이 “옛날에 쓰신 글을 이번에 출판한 것 같다”며 “지금 나이의 감성으로 쓴 것 같지 않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어떻게 대답을 해줘야 할까 고민하다 한 마디 했습니다. 

“어제 쓴 글을 오늘 그냥 낸 겁니다” 

Q. 무라카미 하루키의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이라는 소설에  빗대어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한때 어떤 사람의 한 조각만으로도 100퍼센트의 사랑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보통은 나이가 들어가며 1퍼센트의 망설임 때문에 사랑에 쉽게 뛰어들지 못합니다. 시인님은 어떻습니까.

저는 1퍼센트의 감정만으로도 사랑을 시작하겠습니다. 근데 그 1퍼센트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들어야 되고 노력해야 되고 깨질 확률을 전제로 하는 거잖아요. 1퍼센트에서 100퍼센트까지 쌓으려면 이게 안 될 확률이 더 높다고 해버리는 것이 나이들어감이고 청춘의 반대편으로 달아나는 겁니다. 뭔가를 저지를 준비만 되면 1퍼센트의 감정이더라도 뛰어들 수 있어야 하는데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이죠. 

청춘은 끝났다고 선언해버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지금 말씀하신 그런 현상들이 있는 것이죠. 무언가를 저지르는 에너지에 청춘의 생명이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될 것이라고 미리 예견하는 것들이 우리를 망설이게 하고 우리는 더 이상 사랑을 하지 못하게 되죠. 

Q. 시인 보들레르는 “떠나기 위해 떠나는 자가 참다운 여행자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치 시인님을 위한 말이기도 한 것 같은데요 시인님에게 여행은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피를 바꾸려고 많이 애를 쓰는 것 같아요. 제 피가 어떤 피 인지는 모르겠지만 좀 더 나빠져도 상관이 없고 지금의 피는 아니었으면 합니다. 좀 더 들끓고 에너지가 넘치는 강력한 피를 희망합니다. 

제가 무난한 피로 태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면 굉장히 불쾌한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뭔가 저지를 수 없는 어쩌면 소심하게 태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저를 더욱더 도전적인 피로 바꾸려고 하는지도 몰라요. 

글을 쓰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고 말할 수도 있겠어요. 새로운 것을 계속 흡입하고 낯선 바람을 계속 맞아야 나는 단련이 되고 또 그러면서 내 피도 바뀔 것이라는 믿음. 자신을 디자인 하지 않으면서 남을 울리거나 흔드는 글을 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일찍 한거죠. 그래서 여행은 작가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말씀드리기엔 너무 많이 책을 냈지만 저는 계속해서 작가가 되는 과정에 있고 여행은 그 교육의 현장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나는 당신에게 나무 한 그루를 심는다. 매일 물을 주고 돋아나는 잎을 관찰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려함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려 함이라는 것을 당신에게 고백한다” -도서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256쪽

Q. 최근 예비 작가들이 문예지 등단이나 신춘문예를 목표로 하기 보단 독립출판사를 통해 글을 발표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출판사 대표로서 어떻게 보시는지요. 그리고 독립출판사가 대형 출판사들 사이에서 가질 수 있는 독자적 무기가 있을까요.

일단은 기존의 출판사들이 선호하지 않는 또 출판 의사를 갖고 있지 않는 경향의 책들이 독립출판의 개념을 통해 출간이 되는데 저는 굉장히 격려하고 독려합니다.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나는 내 몸 속에서 책을 한 권 가지고 태어난 것 같은데 이 책들이 계속 꺼내져 있고 책갈피가 계속 바람이 불 때마다 흩날리고 있고, 내가 경험을 쌓을 때마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빈 페이지가 계속 기록되어지고 채워지고 있구나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을 거라 생각해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책을 세상에 꺼내놓기에는 출판이라는 벽, 어떤 기성의 틀은 조금 편하지 않겠죠. 이러한 환경 속에서 독립출판 시스템은 굉장히 좋은 현상이죠. 그리고 왜 모든 사람들이 등단제도를 통해 그 제도를 뛰어넘어야만 작가라는 자격을 가질 수 있을까라고 생각을 한다면 그 자체 역시도 구태의연한 형식에 불과하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사인할 때 이런 말을 많이 써 드립니다.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요”

Q. 어떤 유명한 평론가분이 말씀하시기를 신인문학상이나 신춘문예의 당선은 어느 날 심사담당자 책상 위에 우연히 취향에 맞는 원고가 놓여 졌을 뿐이므로 당선에 자만하지 말 것이며 낙선에 실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시인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너무나 동감해요. 평가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너무 좌우되는 것이니까. 그 사람 취향에 잘 맞는 원고를 만났을 때 어떤 부싯돌 효과를 내는 것처럼 그런 것에 불과하죠. 그래서 당선되는 일도 상을 받는 일도 그게 저는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Q. 요즘 출판되는 책들의 트렌드는 ‘위로’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여러 이유로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러한 트렌드는 간혹 자신의 상처나 외로움, 우울함 등의 감정을 쉽게 외면하고 싶은 욕망이 키운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마치 두통이 왔을 때 쉽게 해결할 수 있는 타이레놀 같은 글이랄까요.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 인생의 여정이라는 말. 너무나 흔한 말이긴 한데 외로움, 상처, 슬픔, 정신적 허기, 상대적 박탈감 등 여러 가지를 포함하겠지만 이런 것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조각되거든요. 이런 것들을 간단히 해소하거나 회피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온전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불안 요소들이 나를 조각하는데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이에요. 이번 신간 전편에 흐르고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섞여있는데 이 사랑을 통해서 내 자신은 조각이 되고 이 조각이 된 나를 대면하는 일이 결국 우리 인생의 끝에 남아 있지 않는가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흠뻑 다 받아들이고 자신을 계속 조각하며 사랑이라는 감정을 얻는다면 괜찮은 자신을 마주하지 않을까요. 이것이 이번에 쓴 책의 주제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Q. 마지막은 가벼운 질문으로 마치겠습니다. 왠지 시인님은 벌써 크리스마스 계획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삿포로에 갈 예정입니다. 일 년에 한 번씩 가고자 하는 주의고 가서 혼자 어떤 의식 같은 거를 치르죠. 안 마시던 혼술도 조금 해보고 눈 속에서 길 위에서 꽁꽁 얼고 눈을 맞으며 혼자 있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다음 시집에 대한 이런저런 구체적인 무엇들을 생각하려 합니다. 내년에는 일 년 내내 시를 쓸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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