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출발선 다른 ‘남녀’…韓, 유리천장 지수 ‘꼴찌’ 선정
성별 구분 없애기 전 ‘평평하게’…성 편향 문제 해결이 우선
젠더 구분 없는 옷차림 속 여성 역사…기업·소비자 ‘시너지’
‘나다움’ 중시하는 MZ세대들…새로운 시대정신 ‘젠더 뉴트럴’

우리 사회에는 남성과 여성, 즉 성별에 따라붙는 고정관념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최근에는 젠더 감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마케팅에 나섰다가 기업의 평판과 이미지가 무너지는 사례가 잦아 젠더 이슈에 귀를 기울이는 사회 분위기가 어느 정도 조성된 상황이다.

그러나 여전히 산업 전반에서는 성별에 대한 차별적 인식과 그로 인한 피해 사례가 산적해 있다. 이처럼 남녀 간 전반적인 불평등과 격차 등은 현대사회의 숙제처럼 남아있다. 이제 소비자‧기업‧정부 등 모든 경제 주체가 젠더와 관련된 문제의식을 갖고,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할 때다. 

이에 <투데이신문>은 산업 전반에 깔려있는 젠더 차별에 대해 심층적으로 파악하고 조명함으로써 근본적인 사회 구조적인 문제는 무엇이고 성평등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길은 무엇인지 탐색해봤다.

[사진제공=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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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신문 김효인 조유빈 기자】 정신의학 분야의 개척자 칼 구스타브 융은 “사람은 누구나 ‘아니마(여성성)’와 ‘아니무스(남성성)’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철학자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경우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지금까지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론은 명확하게 구분돼 왔다. 이는 오직 남성과 여성, 두 개의 젠더만을 상정하는 ‘젠더 이분법’ 논리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이미 법적으로 성별을 이분화해 나누고 있다. 예를 들어 주민등록번호의 뒷자리에서 맨 처음으로 나오는 숫자가 1(3, 9)인지 2(4, 0)인지로 성별 구별이 가능하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통상 젠더 이분법에는 ‘젠더리즘’ 사상이 반영되는 경우가 많다. 젠더리즘은 생물학적 성별과 성 정체성을 비롯해 관습적인 성적 특성들까지 하나의 성으로 일치해야 한다는 관점을 뜻한다. 즉 태어났을 때부터 성별에 따라 방식, 행동거지, 성적지향 등이 이미 결정됐다고 보는 셈이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는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젠더리즘 사고가 당연시됐다. 이에 우리는 사회에서 규정하는 여성성과 남성성을 학습하면서 ‘여자는 여자답게, 남자는 남자답게’를 끊임없이 요구받아왔다. 생물학적인 성(sex)에 의해 사회적인 성(gender) 또한 그래야 한다는 압박을 받아온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분법적인 성별 구분에서 벗어나 ‘남녀’가 아닌 ‘사람 그 자체’, ‘나다움’ 등을 중시하는 움직임이 펼쳐지고 있다. 그중 떠오르고 있는 현상이 바로 성별이라는 제한에서 벗어나 나 자체의 삶을 영위한다는 의미를 가진 ‘젠더 뉴트럴’(Gender Neutral)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젠더 뉴트럴 열풍이 불게 된 것 자체가 뷰티업계, 패션업계, 문화예술업계 등 기업과 소비자의 합이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기업들은 현세대의 코드(code)에 맞춰 젠더 뉴트럴을 반영한 제품들을 출시하고, 소비자들은 이를 주목하면서 하나의 트렌드로 작용했다.

이를 통해 위협적인 기업 리스크로 다가왔던 젠더 이슈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점과 새로운 기회로까지 제시되고 있다. 특히 최근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이 급부상하며 지속가능성 측면이 강조되고 있는 만큼 기업과 정부에서도 다양성에 대한 고민에 나서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사진제공=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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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성(性)벽…‘젠더 뉴트럴’ 겨냥한 기업들

여성이 자유롭게 바지를 입을 수 있게 된 것은 그렇게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다. 19세기 때부터 여성이 바지를 착용하는 것을 따로 법으로 금지하기도 했다. 특히 프랑스 파리에서는 지난 2013년 여성 바지 착용 금지법을 200년 만에 폐지했다. 이처럼 세간에서 여성도 충분히 바지를 입을 수 있다는 당연한 일이 약 100~200년가량의 세월이 걸린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난 2018년 미국 여성복 브랜드 앤 테일러는 ‘바지는 힘이다’(Pants Are Power)라는 슬로건과 함께 바지의 진화를 패션에만 국한하지 않고 여성 평등의 상징이라고 표하며 이를 기념하기 위한 캠페인을 개최하기도 했다.

반대로 남성들 사이에서도 ‘치마 패션’이 예전에 비해 파격적이지 않게 됐다. 일상에서는 치마를 입은 남성이 보이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이를 아예 불가능한 일로 치부하지 않는다. 실제로 배우나 모델들이 치마 패션 화보를 찍기도 했다.

이처럼 여성과 남성의 의상 등에서 성별의 구별이 없어지는 현상은 1956년 미국의 성(性) 과학자 솔로킹의 저서 ‘미국의 성혁명’에서 ‘유니섹스’(Unisex)라는 표현으로 등장한 바 있다.

앞서 설명했던 젠더 뉴트럴은 유니섹스와 비슷한 개념이기도 하다. 다만 유니섹스가 남녀 공용이라는 개념이라고 한다면, 젠더 뉴트럴은 성별이라는 제한을 벗어나 ‘나다움’을 추구한다는 관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즉 여성과 남성이 다같이 입을 수 있는 옷이 유니섹스라고 한다면, 여성과 남성 구별 없이 단지 ‘내가 좋아하는 옷’은 젠더 뉴트럴로 보면 된다.

현재 젠더 뉴트럴은 패션과 뷰티업계 쪽에서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 김용섭 소장의 저서인 ‘라이프 트렌드 2019: 젠더 뉴트럴’에 따르면 젠더 뉴트럴은 여성과 남성의 구분 없이 그 경계가 모호해지는 성 중립적 사회 현상으로 패션과 화장품, 유통, 마케팅에서 두드러지며 그 외 다양한 분야로 널리 확산 중이다.

대표적으로 남성 아이돌이 여성에게만 국한됐던 색조 화장품 모델로 나오는 경우를 이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을 예로 들 수 있다. 국내 최초로 젠더 뉴트럴 콘셉트를 드러낸 메이크업 브랜드 ‘라카’는 남녀 모델 모두 같은 색의 립스틱을 바른 화보를 공개해 화제를 모았다. 론칭 시기인 2018년에 비해, 2019년 매출이 22배 증가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이밖에도 2018년 국내에 정식 론칭된 ‘지방시뷰티’에서는 강다니엘을 모델로 기용해 립스틱 바른 모습을 공개했고, 동종업계인 ‘클리오’ 또한 붉은 립스틱을 바른 남자 아이돌을 모델로 내세웠다.

이러한 현상은 여성용품 분야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JAJU’는 지난해 말 여성용 사각팬티를 선보였고, 출시 2개월 만에 속옷 전체 매출의 10%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많은 업계 중에서도 뷰티나 패션업계에서만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이는 해당 분야가 지금까지 젠더 이분법이 명확한 분야였던 점에서 기인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간 워낙 보수적인 업계였기에 이러한 현상이 더 두드러져 보이는 동시에 외적인 요소와 관련된 소비자 욕구 반영 또한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옷에 관심이 많은 황모(25·남)씨는 “백화점에서 옷을 사러 갈 때만 봐도 여성복과 남성복을 아예 구분해서 따로 층을 쓰는 경우가 많다”며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하면 여성복이어서 결국 구매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어 평소에 옷 구경을 즐겨한다는 김모(26·남)씨는 “패션과 뷰티 업계는 사람의 외관과 관련이 많은 만큼 소비자의 욕구와도 직결되는 부분이 있다”며 “젠더 뉴트럴의 반영이 해당 업계에서 빠르게 퍼진 것 역시 소비자의 의견이 반영됐다고 생각한다”고 짚었다.

패션업계 관계자 또한 “최근 패션 전반에서 ‘나다움’을 중시하는 소비자들이 계속 증가하는 추세”라며 “특히 MZ세대들의 소비성향이 스스로가 지향하는 가치를 중점으로 두고 있는 만큼 이러한 움직임이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사진제공=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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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세대, 집단보단 ‘개인’ 중시…정체성 가치 확립

사회적 규범의 속박에 벗어나고 싶어 하는 소비자들의 열망은 기업들을 움직이게 만든다. 젊은이의 상징인 MZ세대 사이에서 개인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흘러가면서 이러한 젠더 뉴트럴 현상도 주목을 받고 있다.

서울대학교 김난도 교수가 집필한 <트렌드 코리아 2023>에서는 현재 우리 사회가 개인의 취향, 산업의 형태, 사회적 가치가 점차 극소 단위로 파편화되는 ‘나노사회’에 돌입했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특히 조직에 소속되기보다는 혼자 일하는 노동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증가했고, 이 모든 변화의 결과로서 구성원 사이의 공통분모는 계속해서 작아지며 사람들의 가치관은 점차 ‘나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설명이다.

과거 기성세대가 개인을 개인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집단으로 먼저 바라봤던 시선이 존재했다면 MZ세대들에게서는 집단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면이 드러나고 있다. 이는 어떤 집단의 부속물이 아닌 개인 특성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사회로 변화돼 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특히 MZ세대의 소비 특징 중 ‘미닝아웃’과 ‘가치소비’에서 이러한 특성이 더 두드러진다. 자신의 신념을 뜻하는 ‘mean’과 ‘커밍아웃’의 합성어인 미닝아웃은 자신의 개성과 신념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표현하는 행위를 뜻한다. 가치소비 또한 비슷한 맥락으로, 가성비를 따지기보다는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에 맞는 제품을 소비한다는 의미다.

이러한 소비성향은 최근 ESG 경영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젠더 뉴트럴 열풍이 MZ세대 위주로 퍼지기 시작한 점도 이에 기인한 것으로 고려된다.

이와 관련 부산에 거주하는 강모(27·여)씨는 “개인마다 고유의 특성이 있는데 우리 사회는 이걸 단순히 성별로만 구분해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강했고, 개인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하다”며 “이제는 성별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각자의 성향에 맞게 개인을 평가 또는 판단해야 한다. 이는 타인을 잘 이해할 수 있고, 스스로에 대한 정체성 확립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젠더 뉴트럴이 실제로 사회에 반영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은 남아 있다. 성별을 구분 짓지 않는 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 부분인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이 나오는 것이다.

대전에 거주하고 있는 이모(27·여)씨는 “성별을 구분 짓지 않고 그 사람 자체만 보고 생각해야 하는 것은 알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며 “이미 어느 정도 자아가 형성된 청소년 이상의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는 건 어려운 일인 만큼 젠더 뉴트럴은 단순히 이상적인 단어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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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뉴트럴’ 유행에서 멈추나…“여성 인식부터 개선해야”

그렇다면 현재 젠더 뉴트럴의 열풍을 단순히 패션·뷰티업계의 유행을 넘어 하나의 사회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게 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전문가는 이러한 젠더 뉴트럴이 사회에 정착되려면 현재 기울어져 있는 업계와 정부의 성 편향을 평평하게 맞추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동아대학교 기초교양대학 임소연 교수는 “성별을 구분 짓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 사람 자체를 봐야 된다는 건 중요하다. 집단 평균을 통해 개인 평가를 하면 안된다”며 “다만 성별 차이가 없이 다 똑같다고 보는 것도 위험한 생각이다. 우선 여성에 대한 인식이 남성과 비슷하게 올라가야 비로소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이어 “현 사회는 성 편향적인 상황을 보이고 있는 만큼 차이가 없다는 발언은 자칫하면 기울어져 있는 상태가 기준이 돼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일과생애연구본부 김난주 연구위원 또한 “현 사회는 기울어진 운동장인 상태다. 여성과 남성을 동일하게 보기에는 아직 출발선이 다르다”며 “우리나라의 경우 대표적인 성차별 사례로 성별간 임금 격차가 거론되고 있다. 실제 OECD 국가 중 우리나라 임금 격차 순위는 매번 하위권에 머무르는 실정”이라고 짚었다.

이어 “구조적인 성차별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개인의 힘으로 어떻게 되는 건 또 다른 문제”라며 “평평한 운동장에서 남녀 서로가 능력을 평가받을 때가 언제 될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악순환이 또 반복되기 전 정부에서 먼저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기업 경영성과 평가사이트인 시이오(CEO)스코어가 지난 2020년에 발행한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매출액 상위 200대 상장사의 등기임원 1444명(2019년 9월 기준) 중 여성 등기임원은 39명(2.7%)이었다.

이처럼 여성이 조직 내의 일정 서열 이상으로 오르지 못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유리천장’이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서 공개한 유리천장 지수의 순위에 따르면 한국은 29위로 꼴찌를 기록했다.

유리천장 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38개 나라 가운데 29개 나라의 성별 임금격차,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 기업 내 여성 관리직 및 임원 비율, 남녀 육아휴직 현황 등 10개 항목의 각 나라 현황을 종합해 산출한 지수를 뜻한다.

그나마 현재 젠더 차별 이슈들이 도마 위로 오르면서, 젠더 뉴트럴과 같은 사회적인 움직임과 혁신이 정부나 기업 발전의 핵심 동력이 될 수 있다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는 상황이다.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개최한 2022 글로벌 ESG포럼 ‘젠더혁신과 ESG 지속 가능 발전’ 세션에서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 류석현 교수는 “젠더(혁신)가 (기업 발전의) 핵심 동력이라고 본다”며 “아직은 명확한 사례가 없는 상황이지만, ESG와 관련한 젠더혁신으로는 양성평등과 다양성이 고려되고 있는 만큼 앞으로 논리적인 분석과 사례를 수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여성노동자회 배진경 대표도 “현재 정부나 기업에서 공식적으로 젠더 관련 이슈 얘기들이 나온다는 것은 문제를 인지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좋은 시그널”이라며 “이를 더 견고하게 다지기 위해서도 정부나 회사 안에서 내부적인 기구를 설치하거나 외부 전문가들의 참여 등이 더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는 국가 운영에 있어서도 어떤 철학에 기반하고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만들어 가는지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한다”며 “현재 사회 구성원 대다수의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야 하는 상황이며 이를 빠르게 견인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국가의 역할”이라고 주장했다.

이제는 예전부터 내려왔던 관념으로 인해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 짓는 것이 아니라 더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함께 힘을 모아야 할 시점이 도래했다. 특히 기업과 정부에서도 곧 막을 열 ‘젠더혁신’ 시대를 위해 기존에 있던 편향적이고 고정적인 틀을 깨고 다양성에 맞춰 준비 태세를 갖춰야 할 때다.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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