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연천은 제2의 고향...거처도 옮겨”
“장례지도사는 행운...망자가 나를 살렸다”
이준석과 청년정치1세대 상징...재기 모색
“이준석 당대표 되던 날 처음 ‘망자’ 모셔”
“전세사기 피해자 보상 방안 마련 시급해”

장례지도사 팀장으로 활동 중인 손수조 전 새누리당 중앙미래세대위원장. ©투데이신문
장례지도사 팀장으로 활동 중인 손수조 전 새누리당 중앙미래세대위원장.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윤철순 기자】 문재인 55.04%, 손수조 43.75%.

2012년 4월 11일 치러진 19대 총선 부산 사상구 선거결과는 5년 후 대통령이 된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후보의 ‘신승’으로 끝났다. 그럼에도 스물일곱 여성 신예(新銳)를 야권 유력주자 대항마로 내세웠던 당시 새누리당 대표 박근혜의 ‘자객공천’은 성공적이었다는 평가가 컸다.

전국구 거물이었던 문재인을 상당기간 사상에 묶어두며 타 지역 지원유세를 차단할 수 있었음은 물론, ‘젊고 참신한 이미지’로 여론 주목도를 높이며 새누리당의 약점이었던 ‘꼰대정당’을 쇄신하는 효과도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거의 여왕’으로 불리던 그가 사상구를 세 번씩 찾은 것도 모두 이 때문이었다.

언론고시(言論考試)를 준비하던 ‘취준생 손수조’ 또한, 비록 낙선하긴 했지만 야권의 유력 차기 대권주자였던 문재인에 비하면 크게 잃을 것도 없었다.

이후 헌정 최초의 30대 ‘0선’ 당대표 기록을 세우게 되는 이준석과 함께 대표적인 ‘박근혜 키즈’로 이름을 날리며 ‘청년정치 1세대’의 상징으로 부상한 손수조는, 4년 후인 2016년 4월 13일 20대 총선에서도 같은 지역 공천을 따내며 본선에 진출했다.

지난 2012년 3월 13일 오후.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4.11 총선 최대 격전지로 떠오른 부산 사상구 손수조 후보 선거사무실을 방문, 격려한 뒤 함께 차량을 타고 이동하며 시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지난 2012년 3월 13일 오후.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4.11 총선 최대 격전지로 떠오른 부산 사상구 손수조 후보 선거사무실을 방문, 격려한 뒤 함께 차량을 타고 이동하며 시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옥새 파동’, ‘진박 감별’ 등 유례없는 공천 후유증 속에 이 지역 18대 국회의원이었던 ‘터줏대감’ 장제원이 연이은 ‘손수조 전략공천’에 반발하며 새누리당을 탈당,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37.51%)됐기 때문이다.

‘문재인의 지역구’를 물려받은 민주당 후보 배재정(35.87%)과의 치열한 접전 끝에 1.63% 차로 힘겹게 이겼지만, 장제원은 이후 사상에서 3선을 기록하며 윤석열 정권 탄생의 일등공신이 됐다. 당시 손수조는 26.45%로 3위에 그쳤다.

두 번의 낙선에 따른 내상은 치명적이었다. 겁 없이 뛰어든 첫 선거도 그랬지만, 재공천까지의 4년은 그야말로 ‘아귀다툼’이었다. 출처 불명의 마타도어에 탄원, 고발, 스파이까지. 당협위원장을 끌어내리기 위한 온갖 공작이 난무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치 괴물’이 돼갔다. 자괴감 때문에도 괴로웠지만, 무엇보다 큰 ‘고통’은 지역구 관리에 필요한 운영비 마련이었다. 산악회도 만들어야 했고, 여러 협의체도 필요했다. 그땐 그렇게 하는 게 전부인 줄 알았다.

“법적으로 후원금도 못 받는데, 지구당 운영비가 월 수백(만원)씩 들어가더라고요. 요즘엔 개인방송이나 SNS 같은 다양한 운영 방법이 많지만, 그땐 그런 방식밖에 없는 줄 알았어요. 하하.” 표정은 밝았지만, 속내는 편치 않아 보였다.

연간 억대에 이르는 비용 충당을 위해 부모 돈은 물론 빚까지 내야만 했다. 점점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중도에 포기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심정으로 앞만 보고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돌파해왔지만, 결과는 두 번의 실패로 끝났다. 배신과 모략의 정치판. 사람이 싫어졌다. 아니, 두렵고 무서웠다. 그 길로 부산을 떴다. 우울감이 급습해왔지만, 주저앉을 수도 없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젖먹이까지, 토끼 같은 자식 둘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아리게 빛났다.

먹고 살기 위해선 뭐든 해야만 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물론, 정치 빼고 할 수 있는 건 다 찾아봤다. 음식장사도 해보고, 동생이 운영하는 횟집에서 생선회도 떠봤다. 당시 회칼에 베인 손등의 상처는 지금도 훈장처럼 새겨져 있다. 그렇게 육아와 씨름하며 몇 년을 방황하다 우연히 접한 게 ‘장례지도사’였다.

장례지도사 팀장으로 활동 중인 손수조 전 새누리당 중앙미래세대위원장. [사진제공=본인]
장례지도사 팀장으로 활동 중인 손수조 전 새누리당 중앙미래세대위원장. [사진제공=본인]

“장례지도사는 행운...처음 ‘인정’받아”


20대 총선 5년이 지난 2021년 6월 11일, 경기도의 한 장례식장.

「할머니는 눈을 감은 채 편안히 누워 계셨다. 우린 정성을 다해 ‘염습(殓袭)’했다.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던 유족들은 오열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입관 후 슬픔을 가눈 유족들은 우리 손을 꼭 잡은 채 연신 ‘고맙다’며 인사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내야만 하는 유족들의 한없는 슬픔을 함께 나누며 위로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이해할 수 없었을 테다. 누구나 돈을 벌기 위해 직업을 갖지만, 어떤 일이 이처럼 숭고하고 가슴 따뜻할 수 있을까.

정치활동 하면서 누군가에게 제대로 된 도움 한 번 준 적이 없는데, 가장 큰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위로해줄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이었다.

입관식을 마친 후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어섰을 때, TV 화면에서 이준석 당대표 당선 속보가 실시간으로 올라왔다. 10년 전 정치 활동을 함께 시작한 ‘동기 이준석’이 보수정당 70년 역사를 다시 쓴 거였다. 온 몸에 전율이 흘렀다. 내 일처럼 기뻤다. 축하 전화가 덩달았다.

1985년생 동갑내기 이준석이 당 대표에 오르던 날 나는 장례지도사가 돼 첫 망자를 모셨다. 손수조 저(著) <장례지도사가 된 청년 정치인> 중 발췌」

‘망자를 모시는’ 엄숙한 과정은 치유와 회복의 시간이었다. 두 번의 선거를 통한 극심한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로 깊어진 상처가 ‘완치’된 것은 물론, 다시 사회로 나갈 ‘정신 근육’을 키울 수 있었던 행운의 기회였다.

방송기자를 꿈꾸던 이십대 취준생이 정치 거물과의 한 판 승부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으나, 두 번의 선거 패배 후 ‘뜬금없이’ 장례지도사의 길을 걷고 있다.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

경기 북부에서 3년째 장례지도사로 활동하며 지역민들과 끈끈한 연대를 이어오고 있는 ‘박근혜 키즈 손수조’가 정치 재개를 선언했다.

“망자가 나를 살렸다”며 동두천·연천을 ‘제2의 고향’으로 삼겠다는 ‘장의사 손수조’를 여의도 투데이신문사에서 만났다.

장례지도사 팀장으로 활동 중인 손수조 전 새누리당 중앙미래세대위원장. ©투데이신문
장례지도사 팀장으로 활동 중인 손수조 전 새누리당 중앙미래세대위원장. ©투데이신문

“전세사기 피해, 개인 문제 아냐”


2012년 취업준비생이었던 손수조가 3000만원으로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겠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응원했지만, 선거판에서 좀 놀아 봤다는 ‘선수’들은 “코흘리개 애송이가 멋모르고 까분다”며 비웃었다. 실제 손수조 본인도 직접 겪은 후에야 ‘말도 안 되는 공약’이었음을 깨달았다.

혹자들은 젊음을 ‘실패할 특권’으로 포장하며 ‘아프니까 청춘’이라 애써 위로한다. 그러나 요즘 청년들은 ‘아프면 환자일 뿐’이라고 되받아친다. 그만큼 청년들의 삶이 녹록치 않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3000만원은 큰돈이다. 최근 수많은 청년들을 무너뜨리고 있는 전세사기 사건 피해 금액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 수천만원 때문에 청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우리 사회가 이 비극을 멈춰 세울 수 있을지, 지금으로선 막막할 뿐이다.

‘전세사기 피해로 많은 청년들이 신음하고 있다’는 지적에 ‘청년 손수조’는 “적정 수준의 피해자 보상 방안이 시급히 마련돼야한다”며 “어떻게 이 지경까지 온 건지, 국가와 사회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짚어봐야 한다”고 분노했다.

-정치권이 여러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뾰족한 수가 없어 보입니다. 현 사태의 근본책임이 정치권에 있다는 비판까지 나오는데.

“100%, 아니 200% 맞는 얘깁니다. 이 문제는 정치권은 물론, 역대 모든 정부의 잘못된 정책 때문에 빚어진 일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게 시한폭탄처럼 곳곳에 상존한다는 겁니다. 부동산은 물론이고 환경, 에너지 등 미래세대가 떠안아야 할 현안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특히, 연금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잖아요. 젊은 사람들이 분노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나요.”

-같은 청년 입장에서, 어떤 해법이 필요하다고 보나요.

“‘이렇게 해결해야 한다’는 묘안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일단 적정 수준의 보상안과 함께 재발방지에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가 차원의 시스템적 보완도 시급하고요.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결국 정치입니다. 정치를 개혁해야 국가 시스템도, 부동산도, 연금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봅니다.”

두 번의 패배로 인한 충격과 후유증을 극복하는 동안 어떤 신념이 선걸까. ‘정치라면 신물이 난다’던 심경 고백이 무색해보였다. ‘장례지도사’가 돼 세상 밖으로 나왔지만, 10년 전의 ‘박근혜 키즈 손수조’는 분명 아니었다.

2050년까지 대한민국의 미래를 청년들이 준비하자는 ‘정치개혁 2050’에도 참여하고 있는 손수조는 “정치 혐오가 심각한 수준이지만, 그런 만큼 중요성 또한 간과해선 안 된다”며 “청년세대의 적극적인 참여가 정치개혁을 이루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한다.

장례지도사 팀장으로 활동 중인 손수조 전 새누리당 중앙미래세대위원장. ©투데이신문
장례지도사 팀장으로 활동 중인 손수조 전 새누리당 중앙미래세대위원장. ©투데이신문

사람 살리는 ‘의사’ 고민하다 ‘장의사’ 길 선택


1년 전 출간한 <손수조, 장례지도사가 된 청년 정치인>에서 그는, 두 번 낙선 후 “앞으로 뭘 하며 살아야할까”에 대해 고민하다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밝힌 바 있다. 정치를 결심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고 싶었던 그는 의학전문대학원 입학을 위해 입시요강을 들춰보며 예상 문제까지 풀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아닌, 죽은 사람을 떠나보내는 ‘장의사’가 됐다. 왜 였을까.

-장례지도사 3년차인데, 쉽지 않은 길을 선택했어요.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요.

“정치하면서 알게 된 동생이 이쪽에서 오래 일 해왔는데, 그 친구가 자신이 운영하는 장례업체 마케팅을 맡아 함께해보자 그러더라고요. 일종의 동업 제안이었죠. 정말 낯설고 생소한 일이었는데, 당시엔 이것저것 가릴 형편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자본이 필요 없다는 게 끌리더라고요. 그런데, 뭘 알아야 이사를 하던 팀장을 하던 하잖아요. 그래서 ‘현장부터 가보자’ 한 게 입관식 참관이었습니다. 그때 완전히 빠졌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쉽게 결정할 분야가 아닌 것 같은데.

“장례라는 게 참 신비롭더라고요. 사람한테 치여서 사람 만나는 게 두려웠는데, 돌아가신 분을 정성껏 모시니까 유족분들이 저를 인정해주시는 거예요. 망자를 씻기고 수의를 입혀 염포로 묶는 걸 ‘습염(襲殮)’이라 하는데, 이런 제 모습을 보고 ‘고맙고 감사하다’ 그러시는 겁니다. 정치할 땐 사방이 적이고 나를 왜 이렇게 미워하나, 그런 생각으로 살았는데 인정받고 좋아해주시니 신이 날 수밖에 없는 거죠.”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동공도 커졌다. 상기된 표정에서 ‘신비롭다’고 한 말이 무엇을 얘기하고자하는 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정치와 장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조합이 당시 처한 환경과 맞물리며 ‘치유와 새 삶의 희망’을 만들어낸 거였다.

-‘일반 회사’에 취업할 생각은 없었나 봅니다.

“그게 쉽지 않더라고요. 제 책에 ‘정치단절녀’란 표현이 있는데 정치 말고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으니까 일반회사 취업도 안 되는 겁니다. 오히려 정치 이력이 걸림돌이었죠. 물려받을 가업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술이나 라이선스 같은 것도 없다 보니 새 일 찾기가 정말 힘들더라고요.”

부산 떠난 지 한참 후, ‘육아 맘 손수조’는 코로나19 직전까지 서울 신사동에서 고깃집을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장례지도사 활동을 시작하면서 지난 2020년 폐업했다.

-주로 경기 북부지역에서 활동했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처음 시작할 때 그쪽 지역 담당을 맡았었거든요. 3년 가까이 동두천과 연천, 의정부 쪽에서 활동하다 보니 이젠 웬만한 지역민들과는 가족처럼 지냅니다. 하하. 제가 신비롭다고 했잖아요. 사실 장례 한 번 치르고 나면 유족들과 한 가족처럼 지냅니다. 정말로. 그러다 보니 지역에 대한 애착도 커지고 정도 많이 들었죠.”

지난 2012년 3월 2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제19대 총선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발대식 및 공천장 수여식에서 박근혜 선거대책위원장이 부산 사상에 출마하는 손수조 후보에게 공천장을 수여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지난 2012년 3월 2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제19대 총선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발대식 및 공천장 수여식에서 박근혜 선거대책위원장이 부산 사상에 출마하는 손수조 후보에게 공천장을 수여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두 번째 출마까지의 4년은 고통의 시간”


초중고 12년 동안 학생회장직을 도맡았다는 ‘리더 손수조’는 스스로를 ‘관종’이라 불렀다. ‘끼와 에너지’가 넘치는 자신을 그렇게 표현한 거다. 서울에서 언론고시를 준비하다 출마 결심 후 집(사상구)에 내려갔을 때, 부모는 “그럴 줄 알았다”고 반응한 게 전부였다고 한다. 말려도 안 된다는 걸 알았단 얘기다

무모한 도전이긴 했지만, 현실은 더 막막했다. 인맥도 정보도 전무했던 스물일곱 취준생이 기댈 곳이라곤 인터넷뿐이었다.

포털에서 ‘공천’을 검색하자 ‘새누리당 공천심사위원회’가 떴다. 인재영입위원장 이메일 주소를 찾아 공천을 신청했다. 그렇게 시작한 도전이 우여곡절을 거치며 ‘박근혜 키즈’로, 재공천으로 이어졌다.

-재도전까지 4년의 시간을 보낸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공천이 보장된 것도 아니고.

“고통의 시간이었어요. 버텨내야 하는 과제이기도 했고요. 제가 장례 일을 하면서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덜 무섭다’고 얘기하는데, 당시 위원장하면서 너무 힘들었어요. 도와주겠다고 온 분은 ‘공작’을 위해 접근한 ‘스파이’였고, 대놓고 돈을 요구하고, 사람 빼가는 건 일도 아니고. 사람한테 당하는 건 그렇다 쳐도 돈 마련하는 건 정말 괴로웠죠.”

-‘지역 관리’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든다는 얘긴 들어봤습니다.

“저도 그렇게 많이 들어갈 줄 몰랐어요. 원외여서 후원금도 못 받는데, 사무실 운영하고 산악회 굴리고 지역 협의회 여럿 조직하려니까 엄청난 돈이 들더라고요. 그래도 안 할 수가 없어요. 모든 게 사람과 연결돼 있고, 다들 또 그렇게 하니까. 그러니 온 집안이 힘들고 여차하면 엄청난 빚더미에 앉게 되는 거죠. 지금이야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지만, 당시엔 안 하면 안 되는 걸로 알았거든요.”

얼마나 힘들었을까. 가늠조차 어려웠다. 30대 경계에서 마주한 전쟁 같은 일상을 4년이나 버텨낸 걸 동 세대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니 모든 걸 스스로 견뎌내야 했을 테지만, 그런 ‘고통’을 왜 다시 반복하려는 걸까. 첫 도전 당시 얘길 들어봐야겠다.

장례지도사 팀장으로 활동 중인 손수조 전 새누리당 중앙미래세대위원장. ©투데이신문
장례지도사 팀장으로 활동 중인 손수조 전 새누리당 중앙미래세대위원장. ©투데이신문

-‘3000만원으로 문재인과 한 판 붙어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언제쯤인가요.

“처음부터 출마를 생각한 건 아니었어요. 문재인 후보가 제 고향인 사상구를 대권 길목쯤으로 여기니, ‘이건 아니다’는 목소리를 내고 싶었을 뿐이었죠. 정치는 지역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거라 믿어왔는데, 대권을 꿈꾸는 분이 사상구를 도구로 이용하니까 이걸 지적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그때 처음 현실 정치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떤 목소리를 냈나요.

“근데, 좀 더 생각해보니 직접 출마하는 게 낫겠더라고요. 왜냐하면, 사상구는 제가 태어나 자란 동네이기도 하고 젊고 역동적인 정치 신인이 대권주자와 겨룬다면 원래 생각했던 목소리 효과도 더 크지 않을까 그렇게 판단한 겁니다.”

-당시, 사상구에 ‘당협위원장’이 없었나요?

“사고 지구당이라 없었어요. 한 마디로 ‘무주공산’이었던 거죠. 그러니까 부산의 다른 지역에 사무실까지 냈던 문 후보가 여기다 싶어 이쪽으로 온 겁니다. 그랬기 때문에 더더욱 진정성이 없다고 봤고요.”

-소기의 목적은 이룬 셈이네요.

“하하. 힘은 들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효과를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죠.”

-두 번째 도전 때는 ‘후보철회 회유’도 있었다면서요.

“맞아요. 경쟁후보 측 인사가 좀 보자고 하길래 만났더니, 당시 예비후보 기탁금으로 납부한 500만원을 물어줄 테니 사퇴하라 그러더라고요. 아주 노골적으로. 여자인데다 나이도 어리고 하다 보니, 만만하게 본 거죠. 첨엔 ‘듣보잡’이라서 신경도 안 쓰더니, 언론에서 다루기 시작하니까 앗 뜨거라 싶었던 모양이에요. 말도 안 되는 얘기하지 말라며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하하.”

-거의 막장 정치드라마 수준이네요.

“정말 그렇더라고요. 드라마에선 사람도 죽이고 하는데, 그런 내용만 빼면 유사성이 참 많아요. 제가 거물과도 붙어보고, 지역 토호와 싸워보기도 했잖아요. 정체불명의 ‘마타도어(흑색선전)’는 더 심한 것 같아요. 실제 미행을 당해보기도 했으니까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된 지난 2017년 3월 31일 새벽, 박 전 대통령을 태운 호송차량이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로 들어서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된 지난 2017년 3월 31일 새벽, 박 전 대통령을 태운 호송차량이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로 들어서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정치판 완전히 바꿔야...청년 참여 절실”


-‘박근혜 키즈’로 이름을 날렸는데, 박 대통령 탄핵 때 심경은 어땠나요.

“당시엔 정치활동을 거의 접고 집에서 애 키우고 있을 때인데, 텔레비전 화면으로 소식을 접하고 억장이 무너졌죠. 키즈니 뭐니를 떠나 인간적인 도움을 많이 받은 입장이라서인지 그런 생각만 들더라고요. 우는 것 말고는 딱히 할 게 없다보니 더 아팠고요. 안타까운 마음은 지금도 크죠.”

그의 손목엔 박근혜 전 대통령 재임시절 제작된 기념시계(박근혜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봉황 문양과 박 전 대통령의 친필 사인(sign)이 선명했다.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재개한 건가요.

“지난번 전당대회 때 안철수 당대표 후보 캠프 대변인단에 참여했는데, 위기에 처한 정치와 국가의 실태가 피부에 와 닿더라고요. 그때 ‘이대로 가만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당장 이런저런 정치활동을 하겠다는 계획이 선명한 건 아니지만, 경기도 북부 쪽에서 3년간 활동하다보니 도와주시겠다는 분들도 많이 계셔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주로 어떤 활동을 하는 건지.

“개인적으로 내년 총선에 출마할 청년 연대를 꾸리고 있는데, 청년세대의 정치 참여가 지금보다 크게 늘어야 합니다. 젊은 층이 많이 모여 목소리를 키우고 세력화해야 기득권과 맞설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내년 총선까지 남은 1년 동안 청년 세대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매진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아마, 상당한 청년들이 현실정치에 뛰어들 겁니다.”

-‘정치개혁’을 계속 언급하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정치판을 완전히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저를 비롯한 많은 청년들의 공통된 인식입니다. 안 그러면 전세사기보다 더 큰 혼란이 지속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당장 내년 총선 선거제부터 바꿔야 해요. 소선거구제가 얼마나 큰 폐단을 불러왔습니까. 양극단으로 갈가리 찢기고. 대선거구제로 가야 합니다. 국회의원 3선 제한, 특권 내려놓기 같은 것도 빨리 도입해야하고요.”

-기성 정치권 스스로 목에 방울을 단다는 게 쉽지 않잖아요.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는 거잖아요. 시민사회에서 계속 목소리를 내야합니다. 저를 비롯한 여러 청년들도 그런 차원에서 활동하는 건데, 아무 일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잖아요. 어떤 식으로든 기성 정치권을 향해 계속 소리 지르고, 압박해야죠. 내년 총선을 통해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이준석 전 대표에게 전당대회 출마를 직접 권유했다는 얘기도 있어요.

“하하. 2021년 4·7 재보궐선거 직후 이준석, 배현진과 사석에서 만나 그런 얘길 한 적이 있긴 하죠. 흉금 없이 만나는 사람들이라 가벼운 농담 수준에서 주고받은 건데, 정작 당사자들은 ‘어림없는 얘기’라며 흘려 듣더라고요. 그러더니, 나중엔 둘 다 출마해서 당선까지 됐죠. 하하하. 두 사람이 당선되는 걸 보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이준석 당대표 끌어내리기’나 박지현 전 민주당 공동비대위원장 문제 등을 두고 ‘기성세대가 청년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국민들이 그렇게 보신다면, 이용당한 게 맞는 거죠. 결과적으로. 그런데, 새로운 세대는 항상 기성세대의 증명을 받아야만 했어요. 20~30대에 국회의원이 된 김영삼·김대중 대통령도 그랬지만, 청년정치인으로 제도권에 들어온 586 민주화세대는 지금도 주류잖아요. 저나 이준석 박지현 같은 ‘뉴노멀’ 청년 정치인들 역시 증명이 필요하지만, 문제는 허들이 너무 높다는 거죠. 그걸 못 넘으니까 이용당한 거라는 평가가 나오는 게 아닌가 싶어요.”

지난 3년 동안 ‘망자와의 인연’을 통해 몸과 마음을 치유했다는 장례지도사 손수조. ‘정신 근육’까지 단단히 다졌다는 ‘박근혜 키즈’ 손수조가 다시 날기 위해 최근 동두천에 둥지를 틀었다.

현실정치를 애써 외면해온지 7년. 고향 부산이 아닌 천리 길 외딴 ‘최북단 접경지’에서 지난 두 번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다시 비상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장례지도사 팀장으로 활동 중인 손수조 전 새누리당 부산 사상구 당협위원장. ©투데이신문<br>
장례지도사 팀장으로 활동 중인 손수조 전 새누리당 중앙미래세대위원장. ©투데이신문

손수조는.

1985년 부산 북구(사상구)에서 태어나  초중고를 나온 뒤 이화여자대학교에 입학,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 방송기자를 꿈꾸며 언론고시를 준비하다 스물일곱 되던 해인 2012년, 고향 사상구에서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시 문재인 민주통합당 상임고문과 겨뤘다.

당시 언론들은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이 대권 경쟁자인 문재인에게 타격을 주기위해 손수조를 ‘자객공천’한 것이라 보도했다. 당선보다는 거물의 낙선이 목적인 자객공천은 일본의 파벌정치에서 비롯됐지만, 손수조는 이후 한국 정치사에서 자객공천이 거론 될 때마다 등장하는 상징이 됐다.

전·현직 국회의원 등 쟁쟁한 경쟁자들을 모두 제치며 최종 후보에 오르기까지, 당시 ‘청년 손수조’가 취한 신박한 ‘공천 도전기’는 유명한 일화가 됐다.

‘전세금 3000만원’으로 총선을 치르겠다고 선언해 상당한 주목을 끌었다. 비록 442만원을 더 써 ‘공약’을 지키진 못했지만, 정치 거물을 상대로 11.29%차까지 따라붙었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성과를 이뤘다는 평가를 받았다.

20대 총선 낙선 후 단기일자리를 옮겨 다니며 ‘워킹맘’으로 전전하다 ‘장례지도사’로 진로를 바꾼 손수조는, 최근 총선에 출마할 동년배 청년들을 조직하며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현재 후불제 상조회사 총괄이사로 재직하며 사회연구기관 ‘리더스클럽’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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