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엘리자벳’ 공연 사진. [사진제공=EMK뮤지컬컴퍼니]<br>
뮤지컬 ‘엘리자벳’ 공연 사진. [사진제공=EMK뮤지컬컴퍼니]

“루케니, 도대체 왜? 어째서 황후 엘리자벳을 죽였습니까?”

“내가 그녀를 암살한 건… 그녀가 원했기 때문이오!”

어두운 무대 중앙으로 툭 떨어진 올가미. 언제 봐도 강렬한 프롤로그는 뮤지컬 ‘엘리자벳’을 더 특별하게 만든다. 객석을 단숨에 소용돌이치던 격랑의 시대로 이끈 인물은 바로 황후 엘리자벳을 살해한 무정부주의자이자 작품해설자 루이지 루케니다. 백 년 동안 이어진 재판에서 엘리자벳 죽음의 배후를 밝히란 질문에 끊임없이 시달리던 루케니는 고통 속에 절규하며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증인으로 소환한다. 영혼을 잃은 채 꼭두각시처럼 변해버린 망인들의 모습은 화려하면서도 섬뜩하다. 그리고 죽음의 춤이 끝나갈 무렵, 무대를 향한 모두는 평생에 걸쳐 자유를 꿈꾼 한 여인의 이야기 속으로 자연스럽게 빨려 들어간다.

스테디셀러 뮤지컬 ‘엘리자벳’이 마지막 프로덕션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극작과 작사를 맡은 미하엘 쿤체와 작곡가 실베스터 르베이가 탄생시킨 뮤지컬로, 1992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처음 상연돼 올해로 30주년을 맞이했다. 19세기 합스부르크 왕가를 무대 위로 소환한 이 작품은 역사상 가장 성공한 독일 뮤지컬로 손꼽힐 뿐만 아니라 한국을 포함해 총 14개국에서 공연될 만큼 잘 알려진 뮤지컬이기도 하다. 좋은 작품 하나가 얼마나 대단한 파급력을 가질 수 있는지 보여준 대표 사례가 바로 뮤지컬 ‘엘리자벳’이다.

2012년 한국 초연 이후 지금까지 다섯 시즌을 선보인 뮤지컬 ‘엘리자벳’은 오스트리아 황후 엘리자벳의 비극적인 운명과 삶을 다룬다. 밝고 사랑스럽던 엘리자벳이 황제 프란츠 요제프와 결혼한 뒤로 궁에 갇혀 자유를 억압당하면서 점차 빛을 잃어가는 모습을 그렸는데, 극 전개를 따라 일어나는 커다란 감정 변화와 흥미를 유발하는 전개 덕분에 더 몰입하게 되는 뮤지컬이다. 물론 역사를 알고 보면 더욱 재미있다. 과거 사실에 놀라운 상상을 입혀 탄생한 작품은 현실과 환상을 자유롭게 오가며 감상의 폭을 넓히는 데 큰 역할을 한다. 특히 죽음이란 추상적 이미지를 인물로 형상화하면서 ‘죽음마저 사랑했던 황후’ 엘리자벳의 생애에 신비로움을 더한 점도 독특하게 다가온다. 이는 실제로 남겨진 엘리자벳의 일기장과 오스트리아 민담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결과물이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 그는 자신을 따르는 죽음의 천사들과 함께할 때 더 매력적이다. 죽음은 언제나 엘리자벳 곁에 머물면서 끊임없이 유혹한다. 그리고 절대 권력을 쥔 어머니의 그늘로부터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던 황제 요제프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을 수 없어 끝까지 엘리자벳을 붙잡는다. 심지어 언젠가 황후의 목숨을 앗아갈 루케니 마저 엘리자벳의 일상에 늘 주목한다. 이렇게 모두의 사랑과 집착을 불러일으킨 황후가 걸어온 삶이 얼마나 서글프도록 아름다웠을지는 짐작한 바와 같다.

뮤지컬 ‘엘리자벳’ 공연 사진. [사진제공=EMK뮤지컬컴퍼니]
뮤지컬 ‘엘리자벳’ 공연 사진. [사진제공=EMK뮤지컬컴퍼니]

지난 8월 30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에서 개막한 이번 공연은 10년에 걸친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시즌인 만큼 남다른 의미를 담고 있어 더욱 소중하다. 그래서 놓쳐서는 안 될 무대라 여겨지기도 한다. 또 그동안 뮤지컬 ‘엘리자벳’을 통해 감동적인 무대를 선보였던 배우들과 새롭게 합류하는 배우들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 낸 신선한 조화 역시 흥미롭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배역은 타이틀 롤인 엘리자벳이다. 2022년 마지막 시즌 ‘엘리자벳’을 장식할 주인공은 작품 초연부터 쭉 함께해 온 옥주현과 ‘떠 오르는 뉴 엘리’ 이지혜가 차지했다. 더블 캐스트로 진행되는 공연이 쉽지 않을 법도 한데, 각자 가진 매력이 한층 돋보이는 무대를 선보이면서 뮤지컬 ‘엘리자벳’을 이끌고 있다.

다시 돌아온 ‘죽음’ 김준수와 신성록, 오랜만에 루케니로 함께 하는 박은태도 반갑다. 모두 믿고 보는 베테랑인 만큼 배역에 완벽히 어울리는 모습과 동시에 지금까지 뮤지컬 ‘엘리자벳’을 이끌어 온 전설다운 공연을 펼치면서 작품이 가진 오묘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한껏 고조한다.

가수 겸 연기자 노민우가 선보일 죽음, 그리고 베이스바리톤 길병민의 데뷔 무대도 여러모로 기대를 모았다. 노민우와 길병민은 그동안 뛰어난 실력을 토대로 각자의 영역에서 많은 사랑을 받아온 바 있다. 워낙 파격적인 캐스팅이다 보니 캐스팅 공개 당시 일부 우려의 목소리도 들렸지만, 역시 실력파 배우들답게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무대를 선보이며 커다란 박수를 이끌고 있다.

화려함 뒤에 숨겨진 외로움은 날이 갈수록 존재감을 키워갔다. 굳건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궁전에서 사회적 책무란 명분 아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살 수밖에 없었던 엘리자벳을 보면 자연스레 새장 속에 갇혀 구슬피 우는 새가 떠오른다. 하지만 성난 군중의 눈에 황후가 품은 슬픔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운명의 소용돌이는 중심인물들을 향해 거침없이 파고들어 모든 것을 폭풍처럼 휩쓸어 버렸고, 남은 선택은 오직 죽음으로부터 얻게 될 구원뿐이었다. 슬픔으로 가득한 파도가 잔물결을 남긴 채 멀어졌을 때 비로소 죽음이 내민 손을 잡고 입을 맞추는 엘리자벳의 모습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 최윤영 평론가·아나운서·공연 칼럼니스트<br>-네이버 오디오클립 ‘최윤영의 Musical Pre:view 공연을 말하다’<br>-클래식, 콘서트 등 문화예술공연 전문 MC<br>-미디어 트레이닝 및 인터뷰,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전문 강사<br>-인천국제공항 아나운서, 경인방송 FM 리포터<br>
▲ 최윤영 평론가·아나운서·공연 칼럼니스트
-네이버 오디오클립 ‘최윤영의 Musical Pre:view 공연을 말하다’
-클래식, 콘서트 등 문화예술공연 전문 MC
-미디어 트레이닝 및 인터뷰,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전문 강사
-인천국제공항 아나운서, 경인방송 FM 리포터

이토록 강렬한 이야기는 인물의 감정선을 타고 흐른 음악들로 완성된다. 특히 1막 엔딩을 장식한 ‘나는 나만의 것’은 엘리자벳이 추구한 주체적 삶의 의지를 다시 한번 강조해 마음을 울린다. 수많은 갈등 상황 속에서 새로이 마음을 다잡으며 자유를 부르짖는 황후의 외침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감동적이다. 또 눈부신 퍼포먼스와 함께인 ‘마지막 춤’과 2막의 문을 화려하게 여는 ‘키치’ 역시 극 중 분위기를 전환하는 역할을 맡아 전개에 탄력을 더한다.

뮤지컬 ‘엘리자벳’은 오는 11월 13일까지 약속된 여정을 이어간다. 이야기는 언젠가 새롭게 다시 우리 곁을 찾을 테지만, 지금 이 모습은 곧 뮤지컬 역사 속 한 페이지로 남게 될 것이다. 마지막에 담긴 의미가 남다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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