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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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모두 외로울까. 정면의 스크린을 일제히 바라보고 있지만 서로의 얼굴은 끝내 볼 수 없으니까. 시를 읽는 사람들은 모두 외로울까. 같은 시를 읽고 있을지라도 각자의 손에 들린 시집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을 뿐이니까. 도심의 인파 속을 걸을 때면 그토록 많은 이들이 물리적으로는 공존하면서도 존재론적으로는 철저히 혼자일 수 있다는 사실보다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실감은 없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바로 옆에 앉아 거의 똑같은 자세로 작은 화면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무명의 누군가와 내가 아무것도 공유할 거리가 없을 수 있다는 사실만큼 놀라운 것은 없다. 쾌적하고 매끄러운 미래를 약속하며 조금씩, 그러나 어느새 성큼 사람들을 떨어뜨려 놓는 빛들이 무심하게 반짝이는 세계를 우리는 살고 있다.

반면 이 세계는 같은 영화를 보고 있는 너와 나의 영화적 경험이 같을 수 없다는 사실, 같은 시를 읽고 있는 너와 나의 시적 체험이 같을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도래할지도 모를 어떤 다른 가능성에 좀 더 조명을 비춰주기도 한다. 양안다 시인의 『작은 미래의 책』(현대문학 2018)은 그러한 외로움을 공유할 수 있게 되는 순간부터야말로 다른 세계가 열릴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누군가의 눈을 곧장 들여다보는 것보다 그 사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기이한 창문과 같은 것이 외로움의 형태로 곳곳에서 점멸하고 있으며, 때로는 한 권의 얄팍한 책으로 묶여 손아귀에 쥐어지기도 하노라고. 그렇다면 외로움은 사실 외로움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시인은 세계를 살고 타인을 겪으며 느끼는 것들을 미묘하게 달리 읽어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가령 “이해와 이해가 모여 오해에 가까워”(「낮은음자리표」)질 수 있다면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은 더 잘 오해하게 되는 것일 수 있다. “결심과 결정의 차이를 이해한다면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게”(「루저 내레이션」) 될 것이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특별하게 여기는 것은 삼갈 필요가 있는데 모두가 스스로를 특별하게 여기다보면 결국 “특별함에 가까워질수록 평범함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레몬 향을 쫓는 자들의 밀회」). 진실과 진심이, 맹세와 약속이 다르다는 것, 특별함이 평범함이 될 수 있다는 것. 이 미세한 차이가 결정적인 조타수가 되어 우리를 어디로 나아갈지 모를 물결 속에 끝없이 출렁이게 할 수도, 해변의 경계까지 밀어내어 모래알로 마냥 웅크리게 할 수도 있다.

시 속 화자에게는 이처럼 기약 없이 흔들리는 불안의 형태로만 붙들 수 있기에 허망한 자유를 함께 추구하는 ‘너’가 있다. 나와 너는 “그림자 사이로 깨진 햇빛, 어느 아이가 부모의 손 대신 놓친 고무풍선, 거리의 구석으로 굴러가는 나뭇잎/그중에서 그나마 값지다고 생각하는 것들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고(「펀치드렁크 드림」), 미래에의 전조로 가득 차 숨 막힐 듯 권태로운 세계를 책장 넘기듯, 채널 돌리듯 무심하게 지나갈 수 있다. “미래이며 사랑이고/우주이면서/우리”이기도 한 고유한 수식을 발견할 수도 있다(「이토록 작고 아름다운 (상)」). 등대가 아닌 오징어잡이 배의 조명으로 빛나는 수평선을 보면서도 충분히 감탄할 수 있고, 세계의 끝에서도 세계의 시작을 상상할 수 있다.

절망을 절망으로 보지 않고 믿어야 마땅한 것을 믿지 않는 이러한 ‘전위’의 흐름 속에서 화자와 그 동료들은 수식이 가리킬 수 없는 관계를 이어가고 자신들만의 규칙을 쌓아가며 그로부터 새로운 정서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그들은 “밤이 오는 건 새벽인데 사람들은 왜 아침이 온다고 하는 걸까” 자문하며 이 미묘한 인식의 어긋남 속에서, 그러니까 아침의 작열하는 밝음이 아닌 “새벽이 만드는 소량의 빛과 소음 속”에서야 발견할 수 있는 작은 기척, 두런거림, 서서히 옅어지는 그림자를 감지하고자 한다(「미열」). 그들이 생각하는 전위란 모든 것을 일거에 뒤집는 혼란이 아니라 이마를 오래 짚어보아야 알아차릴 수 있는 ‘미열’처럼 신중하게 포착해내지 않으면 금세 흩어지고 마는 희소한 물질과 같다.

그렇다면 무언가를 신중하게 오래 들여다보고 있는 이는 흡사 외로움에 닿아 있는 듯 보일지라도 사실은 세계의 전위에 대한 감각을 탐구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세계에 흩어져 있는 세계 속의 세계를 찬찬히 방문하며 이곳과 저곳의 미묘한 차이를 판별하는 연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시집의 후기로 수록된 에세이에서 시인은 시를 쓰고 영화를 만드는 일이 세계 속의 세계를 만드는 것과 같으며 그것이 세계의 ‘총체’와 같이 여겨진다고 말한다. 또 다른 세계가 세계의 바깥이 아니라 만두소나 빵의 앙금처럼 이 세계의 속에 들어 있다는 발상은 단순하지만 흥미롭다. 빵의 앙금까지 야무지게 먹어야 비로소 빵을 온전히 먹었다고 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세계 또한 세계의 속까지 두루 살펴본 뒤에야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속을 각자의 경로로 뒤지고 있는 우리는 분명 외롭지 않다. 혹은 외롭지 않기 위해 외로운 중이다. “모르기 때문에 시작되는 것이 있다고 당신은 믿는다./걸음마다 세계가 생기고/끝없이 걸어서 끝없는 세계가 생긴다면/당신은 세계의 전체를 볼 수 있을 것이다.”(「작은 미래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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