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추억에 새로운 색을 입힌 ‘뉴트로’가 대세입니다. 소비자에게 오랜 기간 사랑받아 온 기업들은 촌스러움을 훈장처럼 장식한 한정판 레트로 제품들을 앞다퉈 내놓고 있습니다. 비단 물건 뿐 아니라 옛 세탁소나 공장 간판을 그대로 살린 카페 등 힙한 과거를 그려낸 공간 또한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래된 기록이 담긴 물건과 공간들은 추억을 다시 마주한 중년에게는 반가움을, 새로운 세대에게는 신선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기자는 켜켜이 쌓인 시간을 들춰, 거창하지 않은 일상 속 ‘추억템’을 소개해보려 합니다.

좌측부터 1960년대 곰표 중력밀가루 지대, 1950년대 밀가루 지대, 1960년대 암소표 박력밀가루 지대 ⓒ대한제분

【투데이신문 김효인 기자】 “밥 먹었니? 한국인은 밥심으로 사는거야”

자주 들어본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밥은 끼니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밥 먹었냐는 질문이 안부와 친근감의 표시인 것처럼요. 

그러나 이제는 빵과 과자, 파스타와 국수 등 무궁무진한 음식을 제공하는 밀가루도 식재료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데요. ‘밥심’으로 살던 한국인들이 밀가루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요.

해방 이후 격동기였던 1952년으로 돌아가 보죠. 이때는 한국전쟁이 진행 중이었고, 식량 사정 뿐 아니라 정말 모든 면에서 어려웠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다 식량난으로 어려움을 겪던 우리 국민들에게 미국의 구호 물품으로 밀가루가 제공된 겁니다. 대한민국 대표 장수상표인 대한제분은 바로 그 밀을 가공하기 위해 설립됐습니다.

대한제분 공장 전경 ⓒ대한제분

1952년 인천에서 설립된 소맥분 제조회사인 대한제분은 창업 직후 부족한 식량을 공급해 국민의 식생활 개선에 한 몫을 하게 됩니다. 이후 1960년대 혼분식정책으로 인한 밀가루 가공식품의 발달로 본격적으로 한국인의 식탁과 입맛을 사로잡습니다. 

이후 1960~1970년대 회사 매출이 급성장하며 재계 상위 기업으로 손꼽힌 대한제분은 70년을 바라보는 현재까지도 그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렵고 힘든 시절, 국민들에게 밀가루라는 신세계를 보여줬던 대한제분은 최근 한 번 더 새로운 역사를 씁니다. 바로 대한제분의 마스코트 ‘표곰이’인데요. 국내 브랜드의 선풍적인 협업 현상을 이끈 일등공신입니다. 

대한제분의 상표는 본디 ‘백곰’이었습니다. 이는 옛 창경원(현 창경궁)에 희귀 동물들이 도입되면서 북극곰도 들어왔는데, 이때 뽀얀 흰색의 북극곰과 밀가루의 이미지가 유사한 점에 착안해 만들어졌죠. 당시에는 문맹률이 높았기에 ‘백곰의 이미지=밀가루’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도록 직관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요.

이 우직한 백곰이 표곰이로서 소비자들을 만나게 된 계기는 흥미롭게도 한 패션 브랜드의 상표 무단도용이었습니다. 티셔츠를 소량 제작해 유명인에게 협찬하게 되면서 알려진 거죠.

이에 대한제분은 소송이 아닌 협업을 선택했고, 이는 신의 한수가 돼 식품과 패션, 출판 등 분야를 막론한 곰표 컬래버레이션 붐이 불게 됐습니다. 

재미와 위트, 반전을 기본으로 장착한 곰표는 뉴트로(New+복고) 감성을 타고 맥주부터 주방용품, 필기구, 화장품, 세제 등 수십 종에 달하는 제품으로 소비자를 만났죠.  

곰표의 다양한 협업 제품 ⓒ대한제분

그렇다고 곰표가 무턱대고 협업에 나선 것은 아닙니다. 밀가루 브랜드라는 본질을 살리기 위해 밀로 만들어진 곰표맥주, 밀 누룩 효모가 들어간 표문 막걸리, 밀이 들어간 곰표 식혜, 곰표 떡볶이를 선보인 것이죠.

미백 기능성을 가진 곰표 밀가루쿠션과 ‘밀가루 설거지’에 착안한 곰표 주방세제도 본연 사업인 밀가루 사업의 정체성을 강화한 좋은 예입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신선함을 제공한 곰표의 인기는 필연적이었던 것일까요, BGF리테일의 CU편의점에서 출시한 곰표 밀맥주가 600만캔이 넘게 팔리는 등 여러 협업상품은 대부분 완판행진을 보였고 품귀현상을 빚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낯선 익숙함’으로 소비자를 사로잡은 데 이어 대한제분은 글로벌심층수와 베이커리 카페, 반려동물사업 등을 확장해 회사를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도약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70여년 세월 동안 한국인의 밀가루 사랑 뿌리를 제공한 대한제분이, 이제는 그저 오래되고 진부한 브랜드를 넘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신선한 브랜드 이미지를 잘 구축해나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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