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br>▸철학박사<br>▸​​상지대학교 조교수<br>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한국은 군인들에 의한 정변(政變)이 많이 일어난 나라다. 현대사에서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의 12.12 군사정변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이것을 한국사 전체로 확대하면 더 많은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조선 왕조의 성립은 성리학을 익힌 신진사대부가 신흥 무인 세력과 결탁해 생긴 왕조로 군인인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결정적이었기 때문에 무인들의 정변에 의해 수립된 왕조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리고 고려 중기에 있었던 무신정변(1170)도 군인에 의한 정변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잘 알려진대로 무신정변은 고려 의종(毅宗, 1127-1173)을 폐위시키고 의종의 동생을 왕으로 옹립(명종, 明宗, 1131-1202)한 사건이다. 무신들은 의종 24년(1170), 의종이 보현원(普賢院)에 행차했을 때 문신(文臣)들을 학살했고, 이후 의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을 옹립한 후 실권을 장악했다. 이후 약 100여년 동안 정중부(鄭仲夫, 1174-1179)를 비롯해 이의방(李義方, 1170-1174), 경대승(慶大升, 1179-1183), 이의민(李義旼, 1183-1196) 등을 거쳐 최씨 부자들이 60년 정도 유지하다가 삼별초 출신의 김준(金俊, 1258-1268), 임연(林衍, 1268-1270), 임유무(林惟茂, 1270) 등의 인물이 실권을 거머줬다. 그리고 대몽항쟁 기간 동안 몽골과 화의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자는 의견을 가졌던 무신들이 임유무를 살해하면서 무신정권은 마무리됐다.

고려 대의 무신정변은 무신들이 자신들에 대한 차별과 낮은 처우에 반발해 일어난 사건이었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요(遙), 금(金) 등의 침략을 받았고, 이것을 물리치는 과정이 있었다. 이런 상황만 생각하면 무신들은 나름 집권층의 일부로 사회적 지위를 가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 무신들의 처우는 매우 낮았다. 이전의 외침을 물리쳤던 주역인 강감찬(姜邯贊, 948-1031), 윤관(尹瓘, ?-1111) 등은 모두 문관 출신이었다. 특히 윤관은 전쟁터에서도 서책을 놓지 않았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또한 묘청의 난을 진압한 김부식(金富軾, 1075-1151) 역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저자일 정도로 학식이 높았다. 그렇다보니 무신들은 외세의 침략이 있어도 군부의 지휘자가 될 수 없었다. 게다가 조선시대 무신들이 무과라는 시험과 검증을 거치는 것과 달리, 고려 초의 무신들은 평소 싸움을 잘 하는 사람들을 등용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의 수준을 담보할 수 없었고, 이것은 문신 귀족들의 차별과 홀대로 이어졌다. 실제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켰을 당시 급여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의종과 문신이 여흥을 즐길 동안 비를 맞으며 경계를 서는 경우도 있었다.

무신정변의 원인에는 의종의 실정(失政)도 있었다. 의종은 “태평하고 문신을 좋아했던 군주”로 평가될 정도로 정치 개혁 등에 별다른 뜻이 없었다. 이 때문에 의종 대 정국은 일정한 정치 노선을 갖지 못하여서, 정치 운영은 왕의 측근과 환관에 의해 좌우되며 다분히 즉흥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왕실에서는 사치스러운 행사가 빈번했는데, 행사를 치를 때마다 정중부를 비롯한 무인과 병사들이 주변을 지켜야 했고, 행사가 길어질수록 무인들은 더욱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게 됐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당대에 지배층에 의한 실정이 있었지만, 무신정변이 이것을 바꾼다는 대의명분은 없었음을 의미한다.

명분 없는 정변은 더 큰 실정을 낳았다. 잇따라 실권을 잡았던 무신들은 왕을 함부로 바꾸고 문신귀족보다 더 심한 향락과 폭정을 일삼았다. 이에 무신정변 이후 김보당(金甫當, ?-1173)의 난을 비롯한 무신 집권 세력을 제거하려는 시도부터, 망이·망소이의 난과 같이 폭정에 견디지 못한 백성들과 노비들의 난도 이어졌다.

무신정변 기간 동안 집권했던 무신들이 모두 좋지 않은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었다. 경대승의 경우 그가 사망했을 때 백성들이 통곡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당대에 평가가 좋았던 사람이었다. 최씨 집권기의 주요 집권자 중 한 명인 최우(崔瑀, 1166-1249)가 집권했을 때 이규보(李奎報, 1169-1241) 같은 문인도 등장했고,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 재판본 등 금속활자를 이용한 출판물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다른 무신 집권자들과 달리 문신들을 우대하고 이들을 자신의 통치에 이용했다는 점이다.

무신정변은 자신이 받은 처우에 불만을 품은 상태에서 대의명분 없이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사건이다. 이것을 집권한 무신정권은 자신이 가장 잘 하는 수단을 이용해 정권을 유지했다. 그 결과 가장 큰 피해를 받는 사람들은 반대 세력이 아닌 백성들이었다. 그리고 무신들이 척결했던 문신들을 예우하고 정치에 참여시켰던 무신 집권자가 그나마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다. “공정과 상식”을 부르짖으며 집권한 현 정부의 지지율이 점차 떨어지는 상황에서 정부와 여당 등 집권자들은 무신정변에서 교훈을 얻었으면 좋겠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