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br>▸철학박사<br>▸​​상지대학교 조교수<br>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조선이 개국한 뒤 조선의 개국이 왕위 찬탈이라고 판단한 일부 고려의 신진사대부들은 조선의 조정에 출사(出仕)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서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들을 양성했다. 고려말 신진사대부들은 고려 말 중국에서 유입된 신유학인 성리학을 받아들였고, 이것을 사상적 기반으로 몰락하고 있던 고려 왕조를 다시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고려를 완전히 갈아엎고 새로운 왕조가 생겨야 한다는 일부의 신진사대부가 또다시 갈라졌다.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이색(李穡, 1328~1396), 길재(吉再, 1353~1419) 등 소위 삼은(三隱)과 정도전(鄭道傳, 1342~1398), 하륜(河崙, 1347~1416) 등이 양측의 대표적인 신진사대부였다. 조선 개창 이후 정몽주, 이색, 길재의 학문 풍조를 좇았던 사람들은 계속해서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후학들을 길러냈다. 그리고 이들을 일컬어서 사림(士林)이라고 부른다.

이후 성종(成宗, 1457~1494)을 비롯한 호학 군주들이 이들을 발탁하면서, 사림은 본격적으로 조정에 입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산군(燕山君, 1476~1506) 대에 있었던 무오사화(戊午史禍)로 인해 사림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계속 폭정을 일삼던 연산군이 반정(反正)으로 왕위에서 쫓겨났고, 중종(中宗, 1488~1544)이 왕위에 등극했다. 중종은 반정으로 자신을 왕으로 옹립한 사람들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하고자 사림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기 시작했다. 이때 등용된 사람이 바로 당시 사림의 리더로 평가받던 조광조(趙光祖, 1482~1519)였다.

잘 알려진 대로 등용된 직후 조광조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연산군 대의 사화(士禍)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사림들의 원한을 풀어주고, 연산군 대에 폐지된 성균관을 원상복구 시켰다. 또한 자신의 스승인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을 비롯한 사림 인물의 배향(配享)을 추진했다. 그리고 향약(鄕約)을 장려했고, 지역의 인재를 추천하는 현량과(賢良科)를 제안했다.

조광조가 추진했던 이러한 정책은 성리학을 정치의 사상적 배경으로 정착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특히 공자(孔子) 이후 지속적으로 강조되었고, 성군(聖君)과 신료들의 최고의 이상이었던 민본정치를 실천하려는 의지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자칫 조광조의 “표면적인 의도”로만 보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사림의 배향에서 조광조는 무리하게 자신의 스승인 김굉필을 배향 대상자에 끼워 넣었다. 향약은 조광조와 사림의 기반인 도성 이외의 지역 사람들의 추천을 위한 수단이 돼버렸다. 시범 실시된 현량과로 천거된 사림들의 상당수는 조광조의 제자거나 조광조를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최근 학계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났던 것이 조광조가 가진 기득권을 향한 성급한 일반화 때문이라는 주장이 주목받고 있다. 중종을 예로 들어보자. 중종은 반정에 의해 왕이 된 사람이다. 원래 왕이 되려면 세자 책봉 이전부터 왕실의 사람으로서 갖춰야 하는 각종 소양을 배우고, 세자로 책봉되면 왕이 되기 위한 수업을 받는다. 길고 힘든 과정을 거쳐야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중종은 반정으로 인해서 왕이 되었기 때문에 조광조의 입장에서 중종은 왕이 되기 위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군왕이었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해 조광조는 중종을 평가절하했고, 중종을 성군으로 만들기 위해 중종 직언(直言)한다는 이유로 중종에게 선을 넘는 발언과 제안을 했다. 중종의 입장에서도 반정 공신들의 권력이 비대해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초반에는 조광조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후 조광조는 선을 넘는 발언과 정책 제안이 늘었고, 이에 중종이 점차 그를 경계했다.

다음 예로 당시 기득권 세력이었던 반정 공신들을 꼽을 수 있다. 중종반정에 공이 있던 신하들은 반정공신으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조광조는 이들 가운데 상당수의 공훈(功勳)을 삭제할 것을 제안했다. 물론 실제로 반정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공신 반열에 오른 사례가 많았다. 그런데 조광조는 실제 반정에 참여한 사람들까지 공훈을 삭제하는 등 공신들 전체를 성급하게 일반화했다. 또한 당시 공신들 가운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부정과 부패를 저지른 사람들도 있었지만, 오랜 기간 조정에 몸담으면서 경륜을 쌓은 신하들도 있었다. 이들을 정밀하게 구분하지 않고, 모두 부정한 세력으로 규정해서 조광조는 상당수의 기득권을 가진 신하들을 정적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광조는 과도한 자기 확신에 빠져서 객관성을 잃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조광조 정책의 상당수가 당대 사회를 개혁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옮음을 과신한 나머지 자신의 사람들을 과도하게 등용하고 죄 없고 훌륭한 공신까지 적으로 돌렸다. 또한 중종으로부터 사약을 받을 때도 조광조는 사약을 가져온 관리들이 중종의 재등용 교지를 가지고 온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최근 대통령실,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주요 정당 모두 국정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다. 이 과정을 보면 기득권 지키기, 과도한 자기 확신, 적대 세력을 향한 성급한 일반화가 발견된다. 의도가 악하지 않았던 조광조도 결국 이러한 요인 때문에 중종으로부터 사약을 받았다. 대통령실, 여당, 야당도 국민들이 내리는 정치적 사약을 항상 두려워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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